Epilogue
2023년 11월 12일, 몬테네그로 코토르 호텔 방에 있을 때였다.
불현듯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명확한 결심이 가슴에 내리 꽂힌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때 배고팠다. 늘 그렇듯 여행 경비가 모자라서 삶은 계란과 인도네시아 라면을 먹으며 버텼다. 비가 온 어느 날 불어 터진 라면을 꾸역꾸역 먹으며 창밖을 보던 그때, 갑자기 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을 쓰자. 내 모든 여행기를 엮어 책을 만들자. 이렇게 구질구질한 순간을 드러내더라도 한 번 해보자.” 나는 먹던 라면을 싱크대에 두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고 10개의 목차를 써 내려갔다. 술술 나왔다. 차고 넘쳤다. 이렇게 갖고 있으면서 이 확신이 들기까지 오래도 걸렸다는 생각을 했다.
쉽지 않았다. 이 글의 주인공이 나라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에피소드 3개쯤 썼을 때였나. 주인공을 사랑해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비가 여러 번 있었다. 내가 뭐라고 별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여행 그거 남들 다 가는 건데 무슨 에세이를 쓰겠다고. 그런 목소리가 들리면 책상 앞에 앉기 싫었다.
문제는 이거다. 나는 나의 상처를 말하지 않는 게 더 강한 태도라 여겼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넌지시 흘려보내는 행위 자체가 ‘내 상처를 너에게 털어놓았으니 나를 더 특별하게 대하도록 해’라는 고취적인 마음이 섞여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의 상처를 듣는 일도, 내 상처를 말하는 일도 다 싫었다.
그런데, 세상 밖에 내 이야기를 내놓겠다고?
쓰던 글을 두고 도망치면 몬테네그로에서 라면을 먹다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내가 자꾸 아른거렸다. 아직 어린 애송이지만 그런 결심은 인생에서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핀셋으로 도마뱀의 탈피를 돕듯이 상처를 덮고 있던 허물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초반에 쓴 글은 다 허물이다. 여러 번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알맹이 비슷한 걸 발견할 때마다 여기에 하나둘씩 올렸다.
나는 그 알맹이가 개구리 알이었으면 한다. 어느 날 뒷다리가 쑥, 하고 나와 헤엄쳐 당신에게로 가 닿았으면 좋겠다.
여행을 마치고 인천대교를 건널 때,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나 헤아려본다.
그 변화가 아주 쓸데없는 것이라도 괜찮다.
루마니아에서 마신 위스키가 맛있어서 독한 술이 좋아졌어. 보스니아 호텔에서 복도에서 떠들던 아저씨한테 한 마디 한 뒤로 대담해진 것 같아. 역시 트레킹을 더 잘하게 됐지. 폴란드에서 등산을 꽤 했으니까. 런던에서 들었던 그 노래 덕분에 프랭크 시나트라가 좋아졌어. 체코로 가는 야간버스에서 폐소공포증이 더 심해졌어. 독일에서 만난 친구와 친해져서 영어가 더 편해졌어.
그런 변화를 알아채는 게 재밌다. 취향이 세밀해지고, 마음이 견고해지고, 낯선 풍경에 내 인생이 녹아든다. 여행을 할수록 내가 조금 더 좋아진다. 나는 이제 내가 싫다고는 말 못 하는 사람이 됐다. 아직 사랑하는 정도까진… 모르겠지만. 10개국만 더 가보고 다시 생각해 보겠다.
여기까지다. 내 여행기는 여기서 끝이다.
정들었던 글을 끝내니까 서운하네. 조금 더 쓰고 싶은데. 언젠가 미련 있는 전애인처럼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까지 안녕, 여러분.
P.S 멕시코에서는 한쪽에만 보조개가 있는 사람이 전생에 천사였다고 한다. 나는 왼쪽에만 보조개가 있다. 그래서 멕시코에 가면 나는 천사다. 다음엔 멕시코에 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