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는 이벤트로 해결하는 게 효과가 좋아요
오늘은 제게 감정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선사한 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날 오후 4시는 아주 최악이었어요. 미용실에 갔는데 커트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처음 간 미용실도 아닌데 미용사분의 레이어드 컷에 대한 철학이 그 사이 상당히 달라진 모양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해보는 정직한 풀뱅 앞머리에 단발을 마주하곤, 저녁을 먹을 때까지 우울해했죠. 괜히 화장실 거울로 머리만 들여다보며 다시는 그 미용실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반복했습니다. 아니, 겨우 머리 망한 게 최악의 하루라니- 싶겠지만 그때는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중요했던 이십 대 초반이었기에, 과장 좀 보태서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휩싸였습니다. 머리를 보고 있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고 기분만 잔뜩 나빠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거실로 나가서 부모님께 냅다 외쳤습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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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분전환 겸 케이크 사러 갔다 올게.
2. 보다 보니 마틸다 머리 같고 오히려 좋아!
3. 화장실 거울에 물때가 좀 많이 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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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사실 여기에 답은 없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화투를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갑자기 웬 화투냐며 의아해하던 엄마 아빠는 제 집요함에 주섬주섬 담요와 화투를 꺼내왔죠. 그리고 패(?)의 그림을 짚어가며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곧 인생 첫 화투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두두둥. 사실 꽤 이전 일이라 이겼는지 졌는지도 기억이 흐릿합니다. 다만 선명하게 남은 건 그날 저희 가족이 배꼽 빠지게 여러 번 웃었다는 거예요! (아,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이거 새 다섯 마리 아니냐며 흥분해서 고도리를 외치던 순간만은 생생합니다.)
그날 실컷 웃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했습니다. 인생 처음 화투도 배워보고, 오늘 정말 재밌었다! 한바탕 정신없이 웃고 나니깐 머리도 그렇게까지 미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다시 보니 어려 보이고 뭐, 쓰읍,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저는 늘 스스로를 관찰하는 편이라, 아까까지 거의 물에 젖은 고양이처럼 예민했던 사람이 순식간에 인생은 즐거워 모드로 바뀐 것에 감탄하며 비결을 생각해 봤습니다. 화투가 왜 이렇게나 효과적이었을까? 제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이벤트는 이벤트로 덮는 거구나!
아마 그 상태에서 좋아하는 케잌을 먹거나 재미있는 예능을 봐도 기분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것들은 즐겁고 소소하고 소중한 순간들이지만, 일상적이기에 임팩트가 크진 않습니다. 말하자면, 기분이 상한 이유가 뜻밖의 자극 때문이라면, 기분을 전환하는 데에도 낯선 무언가에 의한 도파민에 효과적인 거죠.
물론 머리가 망한 정도라서 기분이 좋아졌지, 더 심각한 일이었다면 화투가 아니라 홀덤펍에 진출해서 돈을 따도 기분이 썩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큰 일을 넘기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아, 단순히 잊고 무뎌지기 위한 절대적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어떤 일들은 지나고 나면 재평가가 가능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때 망할 놈의 회사를 때려치우고 힘들었지만 그 덕에 새로운 길로 갈 수 있었고, 죽을 만큼 사랑한 그 사람을 보냈기에 지금의 내 짝지를 만날 수 있었던 법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때는 몰라요. 스티브 잡스 또한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성실하게 아파하고, 충분히 울었다면 일어나서 뭐라도 하면서 지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뭐라도 하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운이 반등하는 기점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럴 땐 일단은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참 기억에 남았던, "살민 살아진다"의 정신으로 매일을 해결해 봅시다.
그래도 일의 여파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경우, 즉 최악의 한 달 혹은 최악의 한 해 까지는 아니고 상사에게 끝내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거나 소소한 불운들이 들이닥친 최악의 '하루'인 경우에는, 최고의 하루로 어떻게든 만들어봅시다. 사소한 일로 남은 하루를 짜증으로 채우기엔 내일도 모레도 방해꾼들이 줄 지어 서있습니다. 제게 화투가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듯, 언젠가 해보고 싶은 나만의 위시리스트가 분명 있을 거예요. (물론 충동적으로 지나친 사행성이나 위험한 시도를 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 읽는 분들 모두 오늘 하루가 힘드셨다면, 스스로를 재밌게 놀아주는 저녁이 되길 바랄게요. 남이 듣고는 이게 무슨 이벤트야, 하더라도 내게 특별하다면 이벤트입니다. 고스톱 경력 nn년의 우리 할머니가 이 글을 읽으신다면, 화투 한번 친 걸로 감동받아서 글까지 쓰는 손녀딸이 얼마나 귀엽겠어요!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그거, 하면 기분전환 될 것 같은 그거, 바로 그겁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의 소중한 오늘을 위해, 치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