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된 옛 연인을 잊는 방법
대부분 그리운 옛 애인이 한 명 정도는 있을 거예요. 생각만 해도 아직 눈물 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풋풋한 시절 만나서 아련한 추억이 된 사람도 있겠죠. 죽도록 싸우고 끝냈지만 애증인지 뭔지, 너무 보고픈 사람도 있을 거고요. 우리의 뇌는 아마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면 좋았던 기억만 남겨두는 것 같습니다. 속된 말로 '좋을 대로 기억한다'라고 하죠.
저도 약 4년간 만났던 첫 연인과 헤어진 후, 한동안 다시 연락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어요. 두 손 맞잡고 누볐던 캠퍼스를 걸으며 그 시절을 떠올리고, 함께 불렀던 노래를 들으며 궁상맞게 울기도 했죠. 그래도 다행히 새벽 2시에 "자니?"를 보내는 흑역사를 생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친구가 정말 끈질기게 저를 말렸거든요. 그 친구는 바로, 헤어지고 나서 쓴 메모장입니다. 제목은 "oo이가 생각나면 읽어볼 것". 어쩐지 비장하지 않나요.
자그마치 8번까지 빼곡히 적혀있는 이 메모에는 그 애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유가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이별을 촉발한 사건, 그간 쌓여왔던 감정들과 관계에서 느꼈던 근원적 문제를 거의 분석 리포트처럼 써 두었달까요. 이처럼 뇌의 '전남친 미화 프로젝트'가 진행되기 전에 생생한 마음으로 썼던 분노의 메모는 미래의 제게 아주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고이다가도 이것만 읽으면 눈물이 쏙 들어가면서 잘 헤어졌단 생각이 들어요. 마음속 상상극장에서도 행복했던 기억이 아닌 헤어지기 직전의 날들이 상연되고, 극장 배경음악도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에서 비장한 사운드의 'Kill this love'로 바뀐답니다.
저는 이 메모의 끝-내주는(혹은 끝을 내주는!) 효과를 몸소 경험한 뒤로, 연애를 끝낼 때마다 '이별 후 메모'부터 작성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덕분에 헤어진 모든 이들에게 미련이 없어요. 그러니 정 많고 눈물 많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합니다. 헤어진 그날, 어쩌다 헤어질 마음을 먹었는지 친구한테 고자질하듯이 구구절절 메모하세요. 쌓인 실망이 쌓인 정을 압도해 버린 그 순간을 날카롭게 기억할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미련스럽게 전 애인 SNS 염탐하는 미래의 나를 단속한다는 생각으로, 그간 실망한 모든 내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하세요. 특히 아닌 걸 알지만 애증에 자꾸 붙잡히는 커플들,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이 인간이랑 엮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써보세요.
내가 차인 연애에서도 메모가 의미 없진 않습니다. 모든 연애에는 헤어짐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상대가 헤어질 결심을 할 동안 내가 관계의 균열을 전혀 모르는 일도 드뭅니다. (그런 경우엔 상대가 엄청난 회피형이거나, 내가 많이 잘못했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어떤 케이스든 미련 가질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아무튼 대부분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그로 인한 갈등이 반복되었을 테니, 헤어짐을 말한 건 그이지만 사실 나도 이 관계가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를 찬찬히 써보세요. 쉽게 해결되면 이별까지 가지 않았을 사유들입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만난 사람이 너무 그리운 경우에도 다행히 방법은 있습니다. 헤어진 후에 분명 누군가에겐 왜 헤어졌는지 구구절절 털어놓았을 거예요. 우리는 서로의 인간 메모장인 법이죠. 그 얘기 들어준 친구한테 전화해 보세요. 나는 좋았던 순간을 기억하지만, 전애인 험담만 실컷 들은 친구는 최악의 에피소드만 골라서 알고 있습니다. 정신 번쩍 들게 알려줄 거예요.
그렇지만 사실 저는 -재회 결사반대파-는 아니에요. 나중에 메모를 읽어봤는데 어렸던 내가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였을 수 있죠. 철저히 내 입장에서 썼는데도 현재의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는 메모라면, 그 이별의 귀책사유는 상대에게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내가 속이 좁았네!'를 외치며 연락해 보기 전에 그 사람은 밴댕이 소갈딱지였던 전 애인을 어떻게 기억할지 한 번쯤은 객관화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메모는 나름 역할을 한 셈입니다!)
앞에서 '이걸 읽고 나면 마음속 상상극장에서도 행복했던 기억이 아닌, 헤어지기 직전의 날들이 상연된다'라고 했는데, 이게 핵심입니다. 헤어지고 나면 당연히 좋았던 날이 생각납니다. 행복했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면 애초에 사귈 이유가 없었어요. 사랑스러웠던 그 사람과 날 아프고 외롭게 했던 그 사람은 동일인물이지만, 사실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세월이 가져다준 가치관의 변화, 달라진 환경은 사람을 조금씩 바꾸는 법입니다. 심지어 헤어진 지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때와는 더욱이 다른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참 예뻤던 그와 나의 어린 날에 머무르지 마시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봅시다. 또 아플지 몰라도, 사랑 안 할 거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