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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naim Lee Jul 14. 2022

부천

1

달라지는 건 없었다 기분 같은 건 조금도 나아지지도 않았다 거지 같은 한 끼에 피 같은 돈을 내고도 현금이 아니니 우습게 긁었다 카드는 상처가 아니니 피처럼 붉게 흘러도 관망할 수가 있다 이탈리아 값비싼 비누를 샀다 공허할수록 보이지 않는 향기에 집착한다 마시면 취기만 남기고 사라질 술에도 마침내 사라질 누군가의 입술에도


2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나는 불안을 디폴트로 여긴다 그럴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온 우주가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다만 떠나가지 않은 채 떠나지는 않은 채로


3

미친 듯 미친 듯이 해본 게 무엇이지 무엇이었지 물집이 터지고 발톱이 빠지도록 해본 게 무엇이었지 나는 아무것에도 미치지 않았었구나 죽기 직전까지 달려본 적 없는 사람이구나 그저 한량처럼 살다가 소멸하는 위성 같은 존재였구나


4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침대였는데 그토록 지루하게 살아내면서도 기어코 지루하지 않게 살려고 꿈만 꾸었구나 갚지도 못할 미래들을 빌려다가 갚지도 못할 사랑만 하다가 불어나는구나 나는 필름처럼 돌돌 말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구나 계절처럼 이자만 늘어가고 있구나


5

흑백 편지를 적는다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조금 더 정결해지기 위하여 검정을 긁어내듯 지워내듯 꾹꾹 눌러 담듯 적는다 젖는다 비에 비애 모든 감정을 축소시킬 수 있는 문어체로 심장의 개수를 늘려간다


6

오래,

아주 오래 말을 섞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결을 빗으며 엉켜있던 마음을 풀고 싶었습니다


7

않는구나 더는 나를 사랑을 비 오는 밤을 뚫고 간다 안전벨트를 매고 젖으며 적으며 간다 축축한 밤을 안고 우는 강물을 달래며 건넌다 다리 위에서 흔들리던 마음들 나는 갈피를 잃었지 너를 미워하면서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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