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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naim Lee Mar 27. 2021

신앙의 열린 결말

빈야드와 신사도 운동이 미친 열린 예배

영화의 결말은 보통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으로 나눠진다. 사람들은 이 두 결말을 뻔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모호한, 열린 결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중반, 교회에는 열린 예배가 유행했다
사운드가 빵빵한 스피커와 연주팀, 넓은 무대와 조명
황홀하고 감동적인 ccm은 강대상을 무대 삼아 찬양팀이 공연을 했다 예배는 어느 순간 공연이 되었다
찬양 리더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위로성 멘트들과 주님을 부르짖는 기도 멘트를 적절히 섞어 호소하고 유도했다 시작은 잔잔한 찬양 특히 힘든 것 내려놓고 이리오라는 위로의 찬양을, 중간쯤에는 다 같이 손뼉 치고 율동하고 뛰는 신나는 찬양을 마지막으로는 감동스러운 찬양으로 흥분을 가라앉힌다 사실 이런 찬양 퍼레이드만으로도 눈물 콧물 쏙 빼는 힐링타임이 된다 찬양은 설교 전에 찬양으로 마음 문을 여는 것이라고 그래야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그렇게 배웠지만 정작 열정적이던 찬양 시간에 비해 설교시간에 조는 성도들이 태반이었다 특히 한두 시간 전부터 준비하는 찬양팀은 졸음과의 사투를 벌인다

마음이 공허할 때 찬양이나 ccm을 들으면 신기하게 평안해지면서 주님으로 채워진다 음악은 이토록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을 일으키는 예술이다
몸 자체가 악기이던 루시엘이 자신의 능력을 믿고 교만해져서 천국에서 퇴출당한 얘긴 유명하다 그렇게 루시퍼가 된 악마를 따라 음악은, 신을 찬양하던 수단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음악을 하면 사탄이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들이 되었으니 신성성은 잃었다는 것이다

교회마다 열린 예배와 찬양집회 늘어났고 몽환적이고 감동적인 ccm들이 들어왔다 가사는 주님을 경배하는 찬양이 아닌 자꾸만 뭔가를 내려달라는 갈급함이나 빨리 임재하라는 주님 소환 가사들이었고 멜로디나 코드 진행만으로도 주님 만날 것만 같은 곡들이 찬양 대신  예배당에 울렸다 찬양에 은혜를 받는 건지 멜로디에 취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찬양단으로 꽤 오래 열린 예배를 섬기고 찬양 선교 사역을 다니면서 순간순간 오는 교만들이 있었다
모두가 우리를 보고 우리의 찬양을 듣고 나는 지금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는 나 자신에 취한 적도 있었고 몽환적인 ccm을 듣고 부르며 자기감정에 빠져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게 두려워서 적어도 가사에 집중하면서 기도하듯 부르기도 했다 당시에 나는 ccm에 예수님, 은혜, 성령. 임재 등의 가사를 대수롭지 않게 보고 찬양이라고 생각했으나 엄마는 ccm과 찬양은 다르다며 선을 긋곤 하셨다 그러나 꽤 오래 열린 예배를 드린 결과, 엄마는 ccm에 익숙해지셨고 심지어 자주 듣게 되셨다


음악의 형식이 힙합이던 이디엠이던 아이리쉬던 판소리던 내 중심이 바로 서있으면 그것이 찬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관이 담긴 가사로 부르는 것은 가요를 부르는 것보다 위험하지 않을까

대형교회들은 성공주의, 기복주의, 행복 등의 설교들을 쏟아낸다 지금도 나는 가끔 이런 마약 같은 설교가 듣고 싶다 비전을 제시하는 긍정적인 설교들 현실이 지옥 같으니까 자꾸만 교회에서 천국을 바라지 한번 듣고 나면 일주일을 버티게 해주는 마약

목사님은 단상을 휘젓고 다니며 호통을 치셨다 (이것을 우리는 카리스마라고 불렀다) 금요철야예배나 수련회에서의 은사주의 사역이 시작되고 소문나면

교회는 더욱더 사람들이 몰려온다

한국 교회가 이방 신앙을 흡수하던 초기의 천주교처럼 한국의 샤머니즘을 흡수하다 보니 기복신앙이 강해졌고 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온 신사도와 빈야드, IHOP를 분별하지 못해서 패망했다고 본다 교회에 분별없는 개방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관습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건축에 미쳐서 분기별 부흥회 이벤트를 하는데

특히 부흥회 마지막 날에는 교회 의자를 뒤로 밀고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주님 한번 만나보겠다고 부르짖곤 했다 사방은 어둡지 스피커에는 감동적이고 몽환적인 찬양이 깔리지 (사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시절마다 찾아오는 생의 번뇌가 떠올라 눈물이 난다) 그때 목사님의 구구절절한 회개 회유와 안수까지 더해지면 뒤로 넘어가는 성도들이 입신을 하거나 방언을 받거나 치유를 받는다 그것이 주님 능력의 임파테이션(전이)인지 사탄의 눈속임인지 알 길이 없다

나는 방언에 욕심이 없는 편인데 다들 방언 방언하며 안 받으면 신앙이 없는 것처럼 대해서 한 번은 부흥회 때 방언을 받겠다며 애썼는데 신기하게도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혀가 마비되듯 움직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5초 정도 애매하게 와서는 기도가 끝나니 사라졌지만

"진짜 주님이 주신 은사라면 왔다가 사라져서는 왜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거죠?"

내 방언에는 실패했지만 엄마 아빠의 방언은 어릴 적부터 들어와서 또렷이 기억한다 지금도 엄마 방언을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니까 물론 방언과 기도로 귀신을 내쫓는 걸 많이 보았고 기도로 병이 나은 적도 있어서 은사적인 것들이 거짓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은사주의가 문제라는 점이다 신앙도 과유불급이라는 것

교회는 매년 표어가 바뀌었다 직분을 새로 받고 등업 되는 성도들이 생긴다 모임의 구성원이 바뀌고 셀장이 바뀐다 그중 새 신자를 전도하는 것이 교회의 큰 목표이다 보니 (당시에는 몰랐지만 신사도에서 파생된 초신자 정책 프로그램인) 알파코스, G12, 두 날개 프로그램 등

안 해본 게 없다 특히 가계의 저주 끊어내기는 유전학과 미신을 연구하던 내게 흥미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나 그게 과연 쓰고 종이를 태우는 의식으로 가계의 저주가 없어지는 것인가 지금도 의심스럽다 한 때 땅밟기라고 해서 교회 청년부마다 곳곳에 절에 가서 이곳에 있는 사탄을 내쫓는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도장깨기식의 이벤트도 있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간증의 위험성 또한 비슷하다 성령체험, 기적 체험, 치유 체험, 입신 체험이나 천국에 다녀오는 임사체험까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MSG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중고등부, 청년부, 장년부에는 셀모임이라는 소그룹이 있다 5-6명의 셀원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자진하거나 투표나 추천으로 뽑힌 셀장들이 제자화 훈련을 통해 리더가 되어 모임원들을 이끄는데 이것 또한 다단계의 방법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으며 G12의 일환이다

G12 제자훈련에 대해서도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 같은 삶을 살자라는 모티브만 보면 긍정적으로 보이는데 막상 주님은 그 당시에 제자훈련에 실패한 거 아니었나 그들이 뭘 어떻게 할지 다 알고 계셨다지만 유다나 베드로만 봐도 철저히 실패한 케이스다 그것을 모티브 삼아 예수의 제자처럼 훈련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본다

제자화 훈련의 뿌리를 찾다 보면 꿈(비전)을 통해 우리를 쓰시는 하나님, 이라는 로그 라인과 마주할 수 있는데 나도 이것에 꽤 오래 지배받고 있었다

"나의 꿈이 성공해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라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확신을 갖고 살다 보니 실패를 할 때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지 못하는 나는 결국 주님이 택하지 않는 백성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했기 때문이다

신사도의 사상은 연예인, 셀럽, 정치인들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기를 주장하는데 (나 또한 긍정적인 효과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그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사상과 선동이 될지 생각이나 해봤을까
  
언젠가 이 땅에서 상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성공주의적 멘트보다는 나를 이 땅에 보내주신 그분의 의와 뜻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그것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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