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ranaim Lee Oct 22. 2021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종종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랑,

내가 그 사람한테 목숨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기준이다


"사랑을 하면 내 몸처럼 사랑하게 돼."


누나는 그래서 사랑을 조심해야된다고 나를 아는 누구든 나의 신앙같은 사랑관에 경고를 보낸다 나는 신앙이든 사랑이든 혈루병 걸린 그녀처럼 간절했고 우물가의 여인처럼 기다리다 외로워진 것을 안다 


X는 내가 힘들어하는 얘기들을 차분히 다 들어주던 동생이었다 열살이나 차이났지만 나름 인생의 굴곡이 있어서 그런지 어른스러운 편이웠고 오히려 나를 딸처럼 살뜰하게 챙겨줬다 고집이 센 편이었지만 나에게는 딱히 고집을 세우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힘들 때 곁에 있던 건 다름아닌 그였다 위로가 되어주는 그에게 조금씩 마음이 열렸다 


못생긴 외모도 제법 평범하게 보일정도로 나는 이 친구의 외모보다 마음을 봤고 그의 능력보다 매력을 보려고 애썼다 사귀는 동안에도 도무지 설레지 않아서 그만두려고도 했지만 그의 뜨거움에 내가 녹아내렸다 

그는 자신이 진짜 사랑을 하는 것 같다며 자신이 모르던 자신을 본다며 감격스러워했고 그 전의 X들에게 얼마나 성의없었는지 반성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께 소개시켜주고 싶다며 나와 결혼하고도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졸업 못한 학생이었고 그가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든 사업을 하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인 건 사실이었지만 나에게는 본질이 중요했다


물론 나의 자아 A는 그래 좋은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봐도 괜찮지 않니 대신 그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호전된다면, 정도였고 자아B는 아니야 내가 바라던 사람도 상황도 아니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였다 나는 

MBTI가 한번 뒤바뀌었고 이제는 그다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므로 직관적으로 그가 내 베필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무렵 그에게서 모국어가 흘러나왔다 


그는 전과 다르게 아이처럼 칭얼대기 시작했고 짜증을 섞기도 했으며 차분하게 대화를 하려고하면 언성을 높였다 벌금통장이라는 걸 만든 게 있었는데 카드는 내 이름으로 만들어서 나한테 쓰라며 줘놓고 거기서 돈을 뺏다 넣었다 또 뺀 흔적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공동명의였지만 자체 뽑기나 복권을 긁어 등수가 나오면 내가 선물이나 소원을 들어줬고 꽝이 나오면 벌금을 내기로한 이벤트여서 사실 벌금은 내게 준 것이 맞으나 나는 공동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자기 돈이라 자기가 썼다는 개소리는 맞지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파탄나는 건 순식간이겠지


신경쓰는 일이 생기면 내가 옆에 있던말던 거기에만 집중하고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고 몰에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다니다가 조금만 지체되면 말은 마음대로 해 난 상관없어 라고 해놓고 얼굴은 굳어져서 삐져있다가 나중에 그 일을 얘기하며 터지기도 했다


배고픈데 누나가 너무 돌아다녔잖아 짜증나게 


배려가 이전과 달리 반이상으로 줄어들었고 별거 아닌 일에 자존심 세우고 감정적여지는 그를 보고 실망스러웠다 나는 잘 싸우고 싶어 그리고 잘 화해하고 싶어 그렇지만 그는 잘 싸우는 법도 잘 화해하는 법도 모르겠다며 어렵다고만 말하는 널 보니 넌 모국어를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사람이구나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하면서 그런 아버지와 똑같이 구는 너에게 소름이 끼쳐서 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도 실망했다며 구구절절한 편지를 세통이나 넘게 써서 보냈다 문장 속에 진심이 있으니까 나는 그런 모습의 그라도 이해하고 받아줬다


우리는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고 또 싸웠다 물론 싸울 수 있다 역시나 잘 풀면 되는거라고 생각했다 나만

맛집에는 줄이 길지 나는 기다리는 것을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치환하는 편이다 내가 먹고 싶은 걸 같이 먹고 싶다던 그는 기다리는 것에 반감을 보였다 짜증이 잔뜩 난 그와 맞은편 카페에 가려했고 그와 가고 싶었던 카페였는데 두세명 줄을 보곤 여길? 여길 가자는 거냐며 화를 내길래 당황해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내가 문닫혔다고 말한 가게에 기어코 다시 가서 문고리를 잡고 흔든 다음에야 다른 카페로 향했다 그가 먹고 싶다던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그는 날 위해 내가 먹고 싶다는 가게에 가줬는데 내가 줄서는 거 미리 예약자 써야한다고 재촉한 얘기에 화가 났다고 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짜증났던거 아니니 라고 말하려다가 삼켰다 기분 풀라고 아이스크림을 사줬는데 나한테 먹어보라는 소리없이 혼자 잘만 먹더라 역시 대화나 사과도 없이 나 기분 안좋아 표정으로 뚱해 있길래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다섯살이니까 그제야 목마르다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줬다 


그와 만날 때마다 다섯살 아들과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누나동생으로 잘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지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음식을 먹을 때 지지않고 먹었다 더 먹으라고 챙김받은 기억은 없다 내가 젓가락을 놓으면 거기에 밥까지 비벼먹었고 남기는 게 싫다며 배불러도 꾸역꾸역 먹었고 나중에는 내것까지 가져다 먹었다 뭘 먹을까하다가 닭발이 먹고 싶다고 해서 주문했는데 맛있게 잘 먹어놓고 나중에 한다는 소리가 내가 좋아하는 닭발만 시켰다고 자기는 오돌뼈 먹고 싶었는데 누나땜에 못시켰다고 화를 냈다 아니 그게 뭐라고 먹고 싶으면 추가로 시키면 돼지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 꺼낸 얘기가 내가 자기를 배려해주지 않았다며 오돌뼈얘기를 말하는데 정말 황당했다 먹기 싫다는 닭발 억지로 먹인 것도 아닌데 나는 상대 배려없이 내멋대로 구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가스라이팅인가?


날 아는 사람들은 왜 언니가 먹고 싶은건 말 안하고 남들 먹자는 거 먹냐며 너도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하던데 누나 먹고 싶은거 먹자는 남친의 말에 나는 여전히 아니야 네가 먹고 싶은거 먹자 라고 해야하는건가 여태 그렇게 배려해왔는데 닭발 한 번 먹고 싶었던 내가 그토록 이기적인 인간이었던가 그렇지만 너는 건강검진하느라 금식인 내 옆에서 먹고 싶은 음식들을 나열했지 나는 농반진반으로 놀리는거냐고 물었는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며 포악스럽게 따졌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아는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언제든 먼저 손 내밀던 나는 그날만큼은 입을 잠그고 길을 걸었다 도무지 화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검진이 끝날 때까지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일을 풀려고 애써봤는데 그는 자포자기 한 것 같았다 자기도 그런 자신을 바꿀 수 없을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나한테 이유를 찾고 싶은 것 같았다 자기 사랑만 받아주면 나만의 천사가 되어줄 것만 같던 그는 지독한 악마가 되어 내곁에 맴돌았다 고마웠다 비교적 짧은 인연으로 있다 가줘서


(열등감이 심한 남자 만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게 적극적인 연하에게는 약해지는 마음이여)


그래도 어딘가에 자신의 몸보다 나를 더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면 내 목숨 맡겨도 될 것 같다고 

그와 같이 늙어가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고 그런 당신과 함께라면 결혼이라는 제도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보니 스무 살 때인가 장기기증을 신청했었다 재로 돌아갈 몸보다 우리의 영혼이 소중하니까

내가 사라져도 살아지는 나의 육신이라면 그것도 의미있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엄마

결이 같아야 견고하게 버티는 거라고 지구의 중력을 버티는 동안 

나보다 더 사랑할 당신과 당신 자신보다 날사랑할 당신이 만날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목가적인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