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백수 아버지

by 외별

<백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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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백수였습니다.
가장으로서 기본적 책무인 가족생계 문제와 자식교육 등 모든 대소사를 외면하신 채, 그 무거운 짐을 모두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해결하도록 위임하고는 무게에서 비껴선 당신은 시시때때로 산 좋은 곳으로 물 좋은 곳으로 떠돌면서 술을 벗하고 바람을 벗하며 사셨기에 우리 집은 늘 찢어지게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 사 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키고자 열망하신 어머니는 늦은 밤까지 삯바느질을 하셨기에 손톱 밑은 늘 검은 멍이 들어 있었고 겨울이 되면 바늘독이 잔뜩 오른 손금 사이가 쩍쩍 갈라져 늘 피가 흐르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 한순간도 바늘을 내려놓지 못하셨었죠.

바람처럼 떠돌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여독을 푸신다고 단칸방의 반쯤을 차지하고 누우셔서 몇 날며칠을 주무시고, 그러다가 잠에 지쳐 일어나시면 석고처럼 앉아서 그저 술만 드셨지요.

그럴 때 당신은 항상 무엇이 마음에 안 드셨는지 어머니며 자식들에게 아주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서 툭하면 화내시기 일쑤였습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신 우리 집은 개미새끼 한 마리 조차 숨소리를 내지 못할 정로 분위기가 무거웠고 마치 칼 위에 서있는 느낌이 들정도로 공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의 광기가 집안을 휩쓸고 있을 때마다, 나는 가족들에게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막무가내로 화를 내시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으로 치를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부당한 권위에 대적하지 못하는 내 작은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원망하곤 했습니다.

자연히 아버지와 가족들 사이에는 넘지 못할 간극이 생기고,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혼자였었습니다.

항상 뻔뻔스러우리만큼 당당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담도암으로 나무토막처럼 쓰러지시고, 6개월 동안 병원에서 꼼짝없이 누워계시다가 슬픈 눈으로 돌아가신 날, 손바닥만 한 묫자리 하나 봐드리는 대신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임진강 뿌려다오"라고 하신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려 재가 된 아버지를 가슴에 안았을 때 전 처음 알았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안아드린 일 없는 아버지가 너무도 가볍다는 사실을. 그리곤 재가 된 아버지를 북풍 거센 임진강에 뿌리면서 가슴속 밑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눈물을 처음으로 흘렸습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이율배반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더랬습니다.

내 아버지는 실향민이셨습니다. 혈혈단신으로 가진 것 하나 없는 빈 몸으로 1.4 후퇴 때 남의 땅으로 밀려내려와 사셨던 그 고난의 세월. 아버지는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혈육인 우리들이 언제 당신에게서 떠나갈까 늘 두려워 당신이 먼저 떠나시는 연습을 하셨던 것임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당신도 어찌할 수 없는, 굴곡진 애정이었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장을 수습하면서 말이지요. 시간 날 때마다 찾았던 곳이 임진각이었고 그곳에서 생사도 모르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늘 그리워하셨던 빈 가슴이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를 떠나왔던 것처럼 우리들도 당신의 곁을 훌쩍 떠날 것이 늘 두려웠던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는 임진강 바람 속에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지 너무도 오래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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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면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에게 허허로운 등을 쉬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보면서 아버지 또한 우리들에게 먼지보다 가벼운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기일이 가까워지면서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재가 되어 허공 중에 뿌려졌던 아버지의 너무도 가볍던 육신이 그립습니다. 진작에 마음을 열어 마른 아버지를 등에 업었었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가벼운지, 아버지의 속이 얼마나 비었었는지 진작에 알았다면 그토록 아버지를 증오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회한에 눈물 흐릅니다.

마음 흐린 날 찾아갈 묫자리 하나 없는 허허로운 마음이 임진강 그 세차던 바람 속으로 달려갑니다. 하늘로 가신 아버지, 거기서는 마음 평안하게 잘 지내고 계신 거지요? 아버지.

다음 생에는 제가 아버지의 아버지로 태어날게요. 그래서, 꼭 아버지가 생전에 속으로 흘리셨던 눈물만큼, 꼭 그만큼만 울어보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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