戀書

부치지 못한 편지

by 외별


<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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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잠들지 못하는 밤입니다

이제 당신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한 번도 나를 본 적 없는 당신을, 내가 내 속에서 일방적으로 잊고자 하는 것이기에 저 말이 적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 쓰고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라 여겨주세요, 당신.

그리움은 스스로 진화하는 생명 같습니다. 내 속의 당신을 내쫓고 당신의 이름표만 가슴에 붙인 제정 러시아 어느 공주이거나 혹은 결점은 전혀 없는 선녀쯤으로 만들어 당신의 자리에 앉혀놓더군요. 정작 당신은 아이가 앉아있는 유모차도 번쩍 들어 올리는 아랫배가 적당히 나온 아줌마인데도 말입니다.

눈을 질끈 감아도 날마다 자라나는 나팔꽃 줄기처럼 조금씩 옭아매더니 어느새 동아줄이 되어 목을 조릅니다.

이쯤 해서 당신을 떠나야 하는 게 맞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

당신과 나는 만난 일 없는 철새인 것 같습니다. 여름과 겨울의 간극만큼이나 멀리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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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새가 떠나간 들판에 무수히 찍힌 발자국을 빈틈없이 메우면서 겨울새가 날아든다. 잘려나간 벼의 밑동을 부리가 해지도록 쪼아 여름새 날아간 주소를 찾아보아도 빈들에는 비망록 한 줄 적혀있지 않다. 새는 그렇게 온 겨울을 지나다 여름새를 찾아 또 다른 겨울로 떠나고 겨울새가 떠난 자리에 여름새는 다시 온다. 빈들이 아닌 들판, 수풀 우거져 겨우내 찍어놓은 겨울새의 발자국은 흔적도 없다. 여름새는 겨울새가 다녀간 것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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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동이 트는 모양입니다. 당신을 아직도 떠나지 못했는데도. 아마 오늘 밤에도, 나는 당신을 떠나려고 잠을 자지 못하겠지요.

당신은 어디선가 아침상에 올릴 황태 해장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나는 아침부터 해장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겨울새 한 마리 때 이르게 날아든 건들거리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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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 외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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