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비에 젖은 소주를 마셔 본 일 있니?

by 외별

<비에 젖은 소주를 마셔 본 일 있니?>



추억을 반추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여행만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이 오롯이 홀로만의 반추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과 공유하는 경우에는 지나간 시간과 그 시간에 투영된 과거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강하게 통합하는 하나의 얼개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윤동주가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려보는 것같이 과거의 무수한 추억이 담긴 자신만의 비밀한 우물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단순한 감성의 일탈로 치부될 일은 아닌 듯하다.


해서, 오늘은 아빠에게 가장 소중한 의미, 가장 큰 사랑의 울 아들과 아빠의 젊었던 시절의 한 단면, 깊은 인상으로 남았던 어느 한 지점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__________________


비에 젖은 술을 마셔본 일 있니? 그 맛을 기억해 낼 수 있니? 난, 비에 젖은 술을 두 번 마셨지만, 비록 그 술맛을 전혀 떠올릴 수 없지만, 잔 잡아 권했던 한밤중의 빗소리와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미세한 떨림까지 기억해 낼 수 있어. 참말이야. 언제냐고? 음, 이것도 대학 다닐 때였구나 내 인생의 화양연화, 그 시절에 있었던 일이구나.


대학 다닐 때 난 연극에 푹 빠져 살았었지. 없는 살림에 대학 보내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극에 미쳐 다니던 아들놈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까맣게 탔었을까? 하지만, 난 그것도 모르고 오로지 연극에 내 몸을 불태우고 다녔었어. 왜 좋은지 이유를 물으면 이성적인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없어. 그저 좋았으니까. 어두운 객석 너머에 반짝이는 눈빛이며, 숨죽여 내뿜는 뜨거운 숨결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으로도 무대엔 피가 흘렀었어. 더운 피가 말이야.


난 전공 공부는 전혀 도외시하고 틈만 나면 대본을 썼어. 내가 쓴 대본은 전부 모노드라마였지. 사실 모든 것을 갖춘 그런 극단에서 연극을 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 몇몇과 함께 조촐하게 무대에 올리곤 했던 시절이었거든....


우리 학교에 다니는 대구 출신학생들의 연합체 대구학우회에서 나를 초청한 것은 85년 2월 겨울이었어. 마침, 공연시간 40분 정도 길이의 모노드라마 대본도 집필을 끝냈던 참이라 난 흔쾌히 공연 요청에 응했고 대구 동성로의 제법 규모가 컸던 어느 카페에서 열린 그날의 공연은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어. 게다가 그때 돈으로 100여만 원 공연비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였지 뭐야...


바로 제주로 갔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살고 있는 제주. 그때 처음으로 가 본 제주에 난 홀딱 반할 수밖에 없었어. 하늘, 바다, 백사장,,,, 그리고 사람,,,, 무엇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지. 한 보름간 제주도에 머물면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지. 내 발바닥으로 제주의 지도를 그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겨울비가 억수로 내리 퍼붓던 날... 제주에서 떠나기 삼 일 전... 친구들과 난 갑갑한 술집에서 벗어나 그 무지막지한 비를 다 맞으며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지... 제주도 일대에서는 유명한 '한일소주'... 겨울비에 감기 걸릴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었어. 모두 마음속에 뜨거운 장작불을 지피고 있었으니까...


그때 친구들이 말했지. 대구에서 공연했던 모노드라마 그 연극을 자기네들에게 보여달라고. 나는 친구들 넷을 앞에 앉혀놓고 방파제 위를 무대 삼아... 기꺼이 공연을 했어... 대구에서 했던 거보다 더 뜨거웠던 것 같아...


그때 마셨던 술, 비 반 술 반.... 난, 여태껏 마셨던 그 어떤 술도... 아무리 고급 술도... 그때 비에 젖었던 그 술보다 맛있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어... 아마도, 방파제에서 얽혔던 우리 팔들이 마치 혈관 같았기 때문일 거야...


생각난다... 제주,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던... 방파제... 그 위에, 젊었던 우리...


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빠는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삶에 있어서 가장 빛나야 하는 순간인 대학 시절을 온통 취업 준비에 올인해서 무한경쟁과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고, 사회가 그런 경쟁을 당연시하고 또 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게 과연 바른 것인가 하는 생각에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자괴감이 가끔 드는 것도 사실이란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늘 밝음과 유쾌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미래까지 확실하게 준비한 울 아들을 보면서 "역시"라고 생각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미래 가치를 위해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고 현재의 달콤한 낭만을 접어두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울 아들은 기어코 선생님이 되는 길을 성공적으로 진입했으니, 아빠는 참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위에 적었던 것은 아빠의 여러 모습 중, 한 단면인 낭만적 기질과 관련된 것인데, 울 아들에게도 아빠를 닮아서 낭만적 기질이 많이 있는 것을 아빠는 잘 알고 있단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조금 여유로운 날에, 울 아들과 산 좋고 물 좋은 곳, 바람 좋고 향기 좋은 곳에 앉아서, 비에 젖은 술을 함께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엔 아마도 깨끗하고 시원한 소주가 제격이겠지? ㅎㅎ


언제나 사랑한다 울 아들


2023년 03월 06일

울 아들과 소주를 마시고 싶은 아빠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