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나

나의 시리우스, 윤동주 시인을 그리며

by 외별


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비 앞에서의 나를 추억함>

고등학교 때 겉표지가 너덜거릴 때까지 들고 다니던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인의 삶과, 시인의 시와, 시인의 외모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 마음의 우상이었던... 시인 윤동주. 대학에 들어와서 교정에 그리도 흠모하던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도 좋았다.

그랬기에,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 앞에서 많은 시간을 혹은 서성대고 혹은 머물며 혹은 돌아가거나 혹은 스쳐 지나다녔다. 용돈이 생기면 아낌없이 털어 꽃을 사서 기꺼이 바치며 시인을 추모하였고, 어쩌다 생긴 공강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사색하면서 마음을 제대로 쉴 수 있게 풀어놓는 곳이 되었고, 어쩌다 마음이 힘겨운 일이 있는 때에 술 취한 속내를 마음껏 토해낼 수 있는 곳이 되어 주었다. 그뿐인가 친구와 늦은 시간까지 별을 헤며 젊은 격정을 다변으로 늘어놓기도 하고, 낭만을 주워 올리는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시인의 시비 앞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돌이켜 보면, 단 한 번도 윤동주 시인은 그의 시비 앞을 즐겨 찾는 내게 반갑다면 손 내밀어 등 두드려 준 일 없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와 주저앉는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모교를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윤동주 시인의 시비..... 문득... 고운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찾아가고 싶다. 오래도록 서지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을... 풀어내며... 윤동주 시비는 그간 잘 있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진다.

교정을 떠나온 시간이 너무도 아득하다. 그리움은 이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사람을 이끌어대는 중력인 것 같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중력. 그 중력에 아무 항거 없이 순응하고 싶은... 오늘, 하지만 시간은 얼음 호수같이 차갑기만하다.. 외별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세계>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1. 짧고 불행한 생애와 시


윤동주의 시는 아름답고도 투명하고 결곧은 결정체들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내재적 의미는, 시가 쓰인 시기가 일본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던 만큼, 역사적 애환과 맞물려 훨씬 더 중충적이고도 풍부한 모습으로 읽힌다. 그것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28세의 빛나는 나이로 일본에서 옥사하며 불행하게 마감한 그의 삶이 시에 더한 빛을 던져 준 것이 되고 말았다.


윤동주는 생전에 문단에 발표를 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한 적이 없는 무명의 문학청년이었다. 용정 광명중학교에 다니던 시절「가톨릭소년」에 동시 몇 편을 발표했고, 조선일보와 연희전문의 문과에서 발행한「문우」에 시 몇 편이 실려 있을 뿐이다. 해방 후 1947년 경향일보 2월 3일 자에 시인 정지용이 생애를 덧붙여 쓴 시「쉽게 씌워진 시-고 윤동주」가 실려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지 시작했다.


그 외 대부분의 시는 해방 후에 간행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1.30)에 실려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 암흑기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시로 풀어놓았던 윤동주는 시적 성취의 높이만큼이나 극적이었던 삶을 시와 맞바꾼 것일까?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의 기독교 신앙이 두터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에 기독교 학교인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고, 13세(1930)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몇 호 펴냈다. 14세에 대랍자의 중국인 관립학교에 다니다가 용정으로 이사해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초한대」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라는 시 세편이 17세(1934년)에 쓰인 최초의 시이지만, 이미 습작기의 작품 수준을 웃도는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나 남아 있는 시는 없다. 18세(1935년)에 전학해 간 평양 숭실중학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가하는데 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처하기 전에 자퇴하고 만다.


이 때문에 용정에 돌아온 윤동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서 졸업을 하는데, 문학을 반대하는 부친과 맞서 단식을 하고 가출까지 하면서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비로소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시는 계속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고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24세(1941년)에 자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했으나 상황의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5세(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겼는데, 1943년 7월에 귀향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재판에 회부된 윤동주는 2년형을 선고받았다. 해방을 여섯 달 남겨 놓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가 비통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시 '규슈(九州) 제국대 생체 해부 사건'과 관련지어 전쟁 시에 부족한 혈장 대용으로 식염수를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생체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죽음도 이 생체 실험의 희생물이라는 의혹에 싸여 있다.



2. 제기된 문제들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1954년에 발표된 고석규의「윤동주의 정신적 소묘」뿐이었다. 1970년대 김윤식. 김현이 펴낸「한국문학사」에서 윤동주의 작품을 대표적인 저항시로 꼽은 이래로 그의 시를 두고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논란이 되어 온 것은 그가 과연 저항 시인인가에 대해 제기된 의문이었다.


그를 저항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젊은 나이에 옥사한 사실에 둘 수 있다. 윤동주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직접 비판하고 나서거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끄러움에 대한 강박 관념을 보여 주는 시어들, 사색과 실존 의식에 우러나오는 저항의식 또는 실향의식 까지를 사회적 또는 정신사적 맥락에서 일제 암흑기에 저항하는 태도로 논의해 왔다.


특히 김용직은 그를 보다 적극적인 항일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시를 저항시, 민족시로 분류하려는 논의 외에 전통적인 서정시의 계열에서 순수 서정시로 파악하려는 견해들이 있다. 오세영은 윤동주의 옥사사건을 추상적으로 미화시키면 의도적 오류가 발생될 수 있다는 점, 식민지 치하에 36년간이나 있으면서도 떳떳하게 항거한 자랑스러운 저항 시인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 윤동주 유고 시집이 간행된 이래로 한국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과 사회구조가 저항 시인을 요청해 온 점 등을 지적했다.


둘째는 윤동주의 문학사적인 위치에 대한 문제이다. 생전에 문단과 전혀 관련하지 않았던 그의 시집이 1941년에 발간됨으로써 시작 시기와 독자층이 시대적으로 엇물려 윤동주의 독자층은 잠재적이라는 것이다. 시는 태어난 그 시기로부터 바로 생명력을 얻으므로 윤동주의 시를 우리 시사의 암흑기에 두는 데는 커다란 이견이 없다.


셋째는 윤동주가 20세에서 23세에 집중적으로 쓴 동시 수십 편이 관심을 모았는데 이를 두고 퇴행 현상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퇴행 현상으로 보지 않는 김윤식의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기독교적인 경향에 대한 해석의 논란이 있었다. 윤동주의 시편들에는 비교적 모호한 구석이 많은데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이해할 때 많은 해석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3. 작품의 경향과 특성


1) 초기 시와 동시에서의 현실과 이상의 거리


윤동주의 작품 활동은 1936년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가톨릭 소년」지에「병아리」(11월호),「빗자루」(12월호)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미 알려져 있듯이 1934년에「초한대」,「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1935년에「거리에서」,「창공」등의 초기 시편들이 먼저 씌어졌다. 그의 초기 시들은 그 수준이 미숙하고 관념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젊은 시인 윤동주가 그 시대를 현실적으로 인식한 고뇌의 편린들을 만날 수 있다.


초한대」에서 '어둠'과 맞서며 깨끗한 제물의 향내를 맡는 의지나 「삶과 죽음」에서 죽음을 삶 속에 수용하는 자를 위인으로 두는 시적 사유는 윤동주가 마감한 삶의 방향성을 시적 출발기에서 이미 예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윤동주는 1936년대 후반기부터 1938년까지 집중적으로 동시를 썼다.「병아리」,「햇비」,「무얼 먹고 사나」,「굴뚝」,「아침」, 「애기의 새벽」,「해바라기 얼굴」,「산울림」등의 동시들을 대하면 구체적이면서 쉽고 진솔한 시어로 짜여 있어 순수하고 맑은 동심의 세계를 읽을 수 있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산울림」전문


「산울림」과 같이 빼어난 동시를 쓰던 그는 1938년 이후에는 더 이상 동시를 쓰지 않았는데 시적 성취가 높은 후반의 시들과 초기 시들 사이에 이 동시의 세계가 끼여 있어 단절감을 줄 정도이다. 시인의 내면에 어두운 당대 현실과는 순도 높게 대비되는 청순성이 동시를 통해 유감없이 표현되었던 서정성의 한 특징을 보여 준 것으로 이해된다.


현실의 모순과 삶의 어둠을 체감하면서 동시에 유년기의 화해로운 세계를 꿈꾸며 노래했던 여유가 마음에 설 자리는 1938년 이후에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일까?

그런데 동시에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감과 감탄을 앞세우며 행복한 자아의 모습을 드러내면서도「해바라기 얼굴」,「오줌싸개 지도」와 같이 이 현실적 삶의 불안은 피해 갈 수 없었던 흔적을 시화하고 있다. 이 부분들에서 후기 시 세계로 통하는 시적 자아의 내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1936년에 쓰여진 시「가슴 1」,「가슴 2」에서 답답한 현실에 가슴을 치다가 재만 남는 상황이 절실하게 표현되어 동시의 세계로 담아낼 수 없는 심정의 한 극단적인 정황이 드러난다. 현실과 이상이 괴리된 상황 속에 처한 시인이 동시 장르와 시 장르 사이를 오가면서 내면적 자아 성찰의 세계로 깊어져 가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2) 정체성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과 내면성찰


1930년대 이후의 시인들에게 식민지하의 지식인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정체성에 대한 절실한 의문에서 놓여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더구나 북간도에서 평양, 용정, 서울, 일본도쿄, 후쿠오카로, 마지막 유골이 되어 북간도로 떠돌아다닌 윤동주에게 '나'가 뿌리내릴 고향은 어디였을까? 그의 시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심상중의 하나도'고향', '향수'이다.


「별 헤는 밤」(1941년),「사랑스러운 추억」(1942년)에서 시적 자화는 이상과 현실의 지난한 거리를 부끄러움으로 인식하면서 가난한 이웃들, 애착이 가는 물건들, 동물들, 시인들까지 그리움의 대상을 일일이 확인한다. 뿌리 깊은 고향 상실의 비애는「또 다른 고향」(1941년)에서 절정에 이른다. 밤새워 어둠을 짖는 '지조 높은 개'에 쫓기는 '나'는 비참한 고향의 현실을 뛰어넘어 떳떳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상향,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꿈꾸는 의지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모순된 현실, 삶의 괴로움에 처하는 부끄러운 시적 자아는 사명감과 숙명감을 깨달으며 의지를 보여 주기에 이른다. 대표작「서시」(1941년)를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전문



2년 먼저 쓰여진 시「자화상」(1939년)에서는 우물에 비추인 달을 응시하며 자신을 반성적 거리를 두고 관조하고 다시 자연과 조화되는 자아의 모습에서 반성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서시'에 이르면 자연과 우주의 세계를 주관적인 의식 세계를 통해 노래하던 이전의 시세계에서 과거와 결별하고 사명감과 숙명을 깨닫으며 강하고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추구하는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의지를 보여준다.


자기 내면으로만 응시하던 시적 자아를 외부 세계로 눈을 넓히고 세계와의 관계를 모색하며 새로운 자아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시의 외부 현실이 역사적으로 참담했던 시기였던 만큼 '나'는 '민족의 역사' 속에 선'나'의 사명감과 관련된 함의를 가진다."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자아성찰에 따른 지순한 절규는 시「무서운 시간」(1941년)에서 역사의 시간에 귀 기울여 극한의 위기감을 예감하게 한다.



거 나를 부른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 전문


역사가 도전해 오는 소리에 온몸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극적이다. 비극적 상황으로 내몰린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나"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의 귀로길에서 예민한 자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는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지 못하고 살아왔으며"손들어 표할 하늘"도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도 없는 고단한 현실에 깊이 절망하는 화자의 상황 의식은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삶에 대한 에너지는 남아 호흡을 하면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경험을 의미화하고 "내 죽는 날"인 최후의 나의 모습까지 예감한다. '일'을 마치지 않은 나는 아직은 살아 있다는 강한 자의식으로 자기실현의 순간, 소명을 다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3)인고의 구도, 새 시대의 소망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의 '간'과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는 윤동주 시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상징적 매개물이다. 표면적으로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시인의 저항 의식은 시「간」(1941년)과 「십자가」(1941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중략)...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간」 전문



「간」은 전래의 귀토지설의 신화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결합한 풍자적인 상상력이 놀라운 작품이다. 용궁에서 위기에 처하자 슬기롭게 꾀를 내어 자기의 목숨을 지킨 '토끼"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고서도 끝끝내 인고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시인의 실존적 자존심의 대응물이다. 일제 강점기가 극한 상황에 처하던 당시 생명의 핵심인 '간'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자는 살아 있는 정신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내하고 자책하는 시인의 저항 의식은 기독교적 속죄양 의식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시「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는 숙연한 결단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역경을 기억하며 현실적이 괴로움을 견디려는 시적 화자의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 준 것이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면,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시인의 예감으로 역사적 사실에 한 발 앞서 식민지 지식인의 새로운 정체성의 한 면모를 시로써 빚어 놓는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를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전문


「쉽게 씌어진 시」(1942년)에서 죽음과 같은 삶 속에서 부활을 믿으며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는 미래를 향한 강한 기다림의 염원을 품을 수밖에 없다.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조국을 빼앗아 간 일본의 "육 첩"하숙방에서 쉽게 시를 쓰는 것을 자조하면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의 정신은 끝내 잃지 않고 있다.


화자가 기다리는 아침에는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아침과 우리 민족이 당연히 맞이해야 될 아침이라는 의미가 겹쳐져 있다. 이 시로 연행되어 일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은 이 시가 일본인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며 또한 이 시가 품은 내밀한 뜻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4. 문학사적 의미와 앞으로의 연구과제


윤동주의 대표작들은『문장』과『인문평론』을 위시한 문예지가 폐간당하고 모국어를 전혀 쓸 수 없었던 시기, 많은 지식인이 검거되고 투옥되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문학활동이 전면적으로 불가능해진 시기에 집중적으로 쓰여졌다. 윤동주 시의 대부분은 해방 직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의 시들은 가장 어두운 역사적 시대 속에서 문학적 사명과 신념을 투명한 대속의 자세로 살아남은 유물이다.


"일제하 마지막 시인인 동시에 해방 후의 시단과 연결되는 맨 처음의 시인이며, 일제하와 해방 후를 잇는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이라는 문학사적 위치는 아직도 낡지 않은 논의로 머문다. 사망 당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보관되어 있었다던 의문의 시편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시가 저항시인가의 여부에 대한 논의보다는 시가 가진 본래의 저항성의 본질과 어떠한 형태로 관련성을 갖는지에 대해 보다 진전된 논의들이 이어져야 한다.


윤동주는 일제 말기 암흑기를 살면서 자아 성찰을 통하여 내면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역사의식을 표현했다. 시대의 무게에 비하면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암흑기 문단사의 별로서 존재한다. 그 이유는 현실의 어둠을 견뎌 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고,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참회하고 절망의 극한에 이르러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속적으로 노래했던 그 신념의 빛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오픈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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