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기
오래된 일기
-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물리량이 아니다
일기 1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당신을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입을 갖고도, 말을 갖고도, 수만 마디의 말을 하면서도, 오로지 단 한마디 사랑한다는 그 말만은 하지 못하고 반벙어리 흉내를 내야 하는 사람의 가슴에는 사랑이라는 말을 쉽게 뱉어버리고 금세 돌아서 잊어버리고 마는 사람보다 훨씬 깊은 우물이 파입니다. 그 우물 속에는 입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매 순간 죽어버리고 만 '사랑해'라는 신음들이 수북하게 쌓여 아찔하게 출렁댑니다. 버려지고서도 죽지 못해 온몸을 필사적으로 흔들고 있는 '사랑해'란 신음...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모르셔도 좋습니다. 아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그 말들이 신음이 아니라 말들로 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정을 들고서 당신 가슴을 쪼아댈 것이 분명하니까요. 당신 가슴에도 자리 잡고 일렁이고 싶어서, 당신 가슴에 우물을 판다고 그 단단한 부리를 들이밀 테니 말이에요. 그때에 당신이 아픈 것이 싫습니다. 그냥,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혼자 사랑하렵니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못하는 고백 하나쯤 가슴에 안고 살아가렵니다. 바다를 그리워한 선인장처럼...
일기 2
시간은 하나인데 시간이 머물다 가는 사람들에 따라 그 색깔은 다 틀립니다. 천차만별. 봄날 일제히 고개를 내미는 꽃들의 빛깔이며 자태며 크기가 다 다른 것처럼 저마다의 가슴에 품는 시간이 다릅니다. 당신은 제게 목련보다 더 큰 나사못으로 왔습니다. 봄이 다 가기도 전에 뚝뚝 눈물처럼 지고 말 하얀 목련처럼 왔습니다. 꽃은 지고 말아도 꽃이 피었던 자리엔 피어 살았던 흔적이 선연하듯 당신이 언젠가 꽃처럼 봉우리째... 제게서 떨어진다 해도 내 가슴을 죄였던 나사못의 흉터는 아름답게 짓물러 있을 겁니다. 상처는 그리움을 먹고 자라는 물고기 같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눈물 흘러 가슴에 출렁대는 수조엔 싱싱한 상처가 詩를 쓰고 있을 겁니다. 그 詩는 눈이 없어도 물고기처럼 헤엄쳐 당신을 향해 갑니다. 당신이 저를 보지 못해도, 나 역시 당신을 보지 못해도... 흉터 안에서는 음파를 밀어 올리는 싱싱한 상처가 헤엄칠 겁니다. 당신으로 인해 살아 있는 즐거운 유영입니다.
일기 3
당신이 없습니다. 카페 밖의 거리에 바람이 세찹니다. 낙엽이 날립니다. 계절은 아직 겨울인데 어느 가을쯤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이 이토록 오래도록 거리를 쏘다녔습니다. 그 낙엽이 기특해 가만히 들어 책갈피에 꽂으려 합니다. 잎이 꽃이 됩니다. 채 봄이 오기도 전에 피었던 꽃잎 한 장 추락하여 내 쓸쓸한 거리에 낙엽처럼 쏘다닙니다. 내 발자국이 낙엽이 됩니다.
일기 4
당신을 만나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입니다. 생의 어디쯤에서 이곳을 향해 오실지 모르는 당신이지만 나는 당신이 계신 곳도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당신에게로 흐릅니다. 처음부터 가슴 허물어지는 만남을 기대하며 흐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금도 조급하거나 두리번거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어느새 잔뿌리를 내리고 있는 육신은 돌멩이 혹은 바위를 닮아 있습니다. 다만, 내 안에 있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속하지 않은 내 영혼만 부지런히 당신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아주 가끔씩 내게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가끔이 나에게는 다른 사람을 만난 모든 시간을 합한 것보다 큰 의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있어달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망망대해 남태평양에서 십자성을 좇는 마음 같습니다. 멀리 있기에 더더욱 빛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그 거리가 하나도 슬프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멀리서도 당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내 안의 그리움... 진하게 삭고 있습니다....
일기 5
나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 놓인 탁자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바닥은 비할 바 없이 편평하기만 한데... 웃자란 다리 하나 때문에 탁자 위에 놓인 기물들이 모두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내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일 때도 웃자란 다리의 반대쪽을 향해서 기우는 탁자... 마치 내 마음 같습니다. 내 안에 들어온 모든 시간들 중.... 유독 당신을 향한 시간만이 웃자라 있어 나를 통째로 흔들고 있습니다. 내 안의 중력은 당신을 향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안의 모든 것이 당신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탁자 위의 기물들이 모조리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진 컵이 깨지고, 쟁반이 금가고... 모든 것이 다 부서졌습니다... 내 안의 오래된 것들도 이처럼 부서집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남김없이 부서집니다... 그 빈자리에 당신은 새로움을 세웁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다른, 자라지 못했던 시간들도 내 안에서 몸을 불리고... 나는 당신 안에서... 다리의 길이가 똑같아진 튼실한, 키 큰 탁자가 됩니다... 새로운 탁자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지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소서... 비워있는 이 자리로... 지진처럼.... 오소서...
일기 6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늘, 짜릿한 흥분을 줍니다. 기다리는 동안의 그 시간 속에서... 내 안의 당신이 잘 익고 있습니다... 당신을 담은 나의 영혼도... 향기를 더해 갑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을 기다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