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과 민방위 훈련

일상에 서서

by 외별


완장과 민방위 훈련
-일상에 서서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넓은 대로를 질주하던 차들이 일순간 숨죽여 길가로 정렬해 섰다. 사람들은 갑자기 침투한 예정된 상황에 지루한 일상을 등에 지고 아주 잠시 두더지처럼 지하도로 흘러들었다. 그렇다 아주 잠시지만 일상을 내버려 두고 숨어있던 시간이었다.



어릴 적에는 임진강 너머 북쪽의 땅은 모두 붉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속의 벽화에 나옴직한, 사람의 몸뚱이에 이리의 머리를 한 사람들이 허리에 무시무시한 총칼을 차고서 상아만큼 길게 뻗은 이빨에 벌건 피를 흘리며 서로의 피를 빨아대는 흡혈귀의 땅. 그 땅엔 어린아이들이 모두 고드름처럼 매달려 얼어 살거라 생각했다. 천둥이라도 심하게 치는 날엔 마치 북쪽에서 쏘아대는 대포 소리 같아 불안한 마음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날 밝기만 기다렸고, 어김없이 꿈에선 얼어붙은 한강을 쫓기듯 건너고 있었다.



운동장에 모인 전교생이 붉은 허수아비에게 돌을 마구 던져댔다. “전쟁 미치광이 죽여라” 선생님이 선창을 하면 죽는 게 뭔지도 모르는 우리도 목이 터져라 죽여라를 따라 외치며 분노의 눈길을 배운 바대로 허수아비에게 쏟아부었다. 어디선가 불붙은 막대기가 던져지고 불길이 하늘을 향해 오르면 함성은 불길보다 더 먼저 커져서 땅을 두드려 댔다. 미치광이 허수아비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이 저런 건가 생각을 하면, 바람이 무척이나 심하게 불었다. 선생님들은 유난히 목이 많이 쉰 아이들을 불러 어깨를 어루만지며 사탕을 듬뿍 나눠주셨다. 하지만 내 목은 언제나 쉬질 않았고, 난 쉬지 않는 강철 목을 한없이 원망하곤 했다.




“아저씨 안으로 좀 들어가 주세요” 민방위 완장을 찬 젊은 사내가 핏대를 세워 말했다. 사내가 든 붉은색 유도봉이 피 묻은 죽창처럼 보여 난 금세 자라목을 하고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선 지하도 계단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랬다. 누가 작은 소리로 질책을 해도 난, 그저 아니라 말하지 못하고 일단 사람들 속으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버릇처럼. 뒤로 움찔 물러서는 내 모습을 보고 사내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고는 아무도 없는 대로에 대고 연신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사내는 매일 민방위 훈련이 계속되기를 원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아듣기 힘든 말로 웅성대는 사람들의 말속에 시간이란 것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바람소리만 들렸다. 사람의 말은 말이 되지 않고 그저 바람에 묻혀서 내 귀로 도달하지 못했다.



사이렌이 길게 울리고 훈련 상황을 종료하는 방송이 귓전을 때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모두 분주하게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난, 여전히 지하도에 남아있었고 완장을 찬 사내는 내게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날들이 전쟁처럼 느껴져 선뜻 길로 나서질 못했다. 여전히 내 목은 자라처럼 오그라들어 있었고, 사람으로 북적대는 거리에서 피난민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민방위 훈련은 해제되었지만 기실 전쟁이 시작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내겐 총, 칼도 없었다. 이제 정말 두려운 것은 북쪽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매번 날 무장해제 시키는 무섭도록 무심한 일상이었다. 그럴 때면 차라리 어릴 적 그 미친 공포가 오히려 그리워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