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변론

처용 아내를 위한 변명

by 외별


처용 아내를 위한 변명


"내 안에서 나는 예수님이 되기도 하고 부처님이 되기도 한다. 내 속에서 너를 백 번 혹은 천 번도 넘게 죽였다가 다시 살려내기도 했거든..."


만약 내가 처용의 아내였다면 아마도 저렇게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음주가무에 환락을 좇아 이리저리 다니느라 가정을 도외시하는 남편. 아내를 처절하게 외롭게 하는 남편. 그저 남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껍데기조차 옆에 남겨두지 않은 사내. 그런 사내를 결혼이라는 제도적 속박 속에서 평생의 업으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여인.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란 말입니까?


차라리 확실하게 남이 되어주기라도 했으면, 새로운 인연을 만나 남은 생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으련만, 이도저도 아니면서 아내의 자리에 멍에를 씌우고, 도리만 강요하는 '그'를 차라리 죄인이라 불러야 옳았을 것입니다.


설령, 처용의 아내가 간음이라는 죄를 범했다 해도 처용은 그녀를 단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녀를 그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처용의 방치에 있는 것이기에 처용에게 원죄가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죠.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것이 지나간 전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현대의 처용이 거리에서 깊은 환락을 좇으며 끊임없이 가여운 처용의 처를 만들고 있습니다. 처용의 처가 원래부터 소위 말하는 '섹스중독증'이거나 혹은 문란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외도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깊고 깊은 절망의 수렁에서 신음하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그냥 던진 것일 겁니다. 나는 그래서 처용의 처에게 돌을 던지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그렇게 만든 처용에게 죄를 묻고 싶습니다. (물론 혹자는 그래도, 정절을 지켰어야만 옳았다라고 말하겠지만)


그런데, 학교에는 처용을 인간으로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용서와 관용의 상징으로 추앙하여 월계관을 씌우고 그의 처는 음란한 여인의 상징이 되었지요. (물론 처용 설화의 주된 이야기 구조는 이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한 번쯤 뒤집어 생각해 볼 일인 듯합니다.


훗날 언젠가 내 글쓰기에 구력이 붙고 탄력이 생기면 처용의 처 입장에서 기술한 '신처용가'를 한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날이 좋습니다.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온 듯합니다. 거리엔 온통 신록의 푸르름이 그림자마저 녹색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에 만날 사무실에 붙잡혀 있다 보니, 난 혹시 누군가를 나로 인해 처절하게 외롭게 만들지는 않았나 되짚어 봅니다. 혹여, 나도 나 모르는 사이에 처용이 되어있는 것은 아닐지... 곰곰이 되짚어 봅니다.

2025. 5. 14 / 외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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