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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민 Oct 06. 2023

해발 3982 미터, 발목을 접질리고 주저앉았다

 다친 몸과 얼룩진 마음으로 이 험한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나요? 

      

                                                                     

     트레킹 시작 2일 차. 해발 3870m 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침낭에서 나오기가 너무 힘들었다. 텐트에는 서리가 껴있었다. 10킬로가 넘는 배낭을 어깨에 둘러메는데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래허리는 돌멩이가 짓누르는 듯이 뻐근했다.  




앞에 놓인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빙하의 크레바스는 호수밑에 도사리고 있는 악어의 날카로운 이빨 같다.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호수 아래서 여행자를 집어삼키기 위해 기다리는 악어처럼, 새하얀 눈 밑에 가려진 크레바스는 날카로운 얼음 칼날과 죽음과 꼭 닮은 끝없는 공허를 품고 있다.   



로프 꼭 가져가다던 라오잔의 걱정 어린 말투가 마음속에 새겨져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위협을 이처럼 강렬히 느껴본지가 언제인지. 빙하 지대가 가까워질수록 걱정과 공포는 너무나 정당하게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공포는 현재가 아닌 어떤 상황에 대한 상상을 동반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삶이 주는 선물인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존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신이 내리는 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야크도 파시미나 염소도 보이지 않는 히말라야 언저리. 

사람은커녕 동물의 발길도 닿지 않는 이곳에는 길의 흔적조차 희미하다. 인간은 부재는 자연을 더욱 무성하게 하여 풀들은 허리춤까지 자랐다. 자신의 가능성만큼 한껏 자란 풀 사이로 가려진 땅을 보지 못했다. 발목은 허공을 딛었고 나는 나의 몸뚱이와 배낭 무게를 뒤틀린 발목으로 받아내었다. 뒤틀린 발목 부여잡고 끙끙대었다. 부러지진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구조요청을 할 장비도 없기에 부러진 발목으로 3일 동안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렇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땐 잘 보이지 않았던 꽃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 모를 꽃잎은 진한 분홍색이 가장 생생히 피어난 황금기, 절정기로 보였다. 고산에 내려쬐는 강렬한 태양에 진분홍색 꽃잎이 말라버려 정열적인 주홍색으로 땅 위에 떨어졌다. 그렇게 꽃 무더기 속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몸뚱이도 동요하여 발목이 뒤틀린 것은 아닐까. 나는 무심하게 화창한 하늘에 질문했다. 다친 몸과 얼룩진 마음으로 이 험한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이제껏 얼마나 힘들게 걸어왔는데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는 더더욱 싫었다. 앞에 놓인 길도, 지나온 길도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현재에 목 졸려있었다. 인생처럼, 산은 매정했다. 걸어야 할 길은 걸어야 했다. 


마음이 제시하는, 너무나 정당하게 느껴지는 부정적 감정을 배제하고 상황을 바라보면 해결책은 간단했다.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거나 뒤로 다시 되돌아가거나. 나는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두려움을 짊어매고 나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워도 숭고한 데가 있다. 드넓은 평야와 위엄 넘치는 산의 굴곡으로 나의 시야가 다시 향했다. 나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끔찍한 미래가 아닌, 지금 나의 살결을 스치는 이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기로 선택했다.   


그래, 두려움과 함께 걷자. 천천히 한 발 한 발, 목표를 향해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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