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이름은 민식, 민혁, 민하다. 돌림자가 '식' 이였던 아이들 이름에 그 '식'자가 너무 올드하고, 21세기에 걸맞지 않은 느낌이라 예의상 첫째는 민식이라고 돌림자를 따라 짓고, 남매간에 동질감 혹은 유대감을 얹어주고파 이름을 '민'자로 돌렸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민식이 하나로 집안의 규칙을 따랐으면 됐고, 촌스런 '식'자 들어간 이름은 하나면 됐으니, 형제간 끈처럼 이어질 그 유대감은 민자에서 찾자고 의견을 냈다. 울택상이 날 어이없게 쳐다보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고, 이름이 장난이냐고, 너같이 엉뚱한 애는 처음이라며, 그런 생각하는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었다. 난 충분히 진지했는데?? 그래 놓고 생각해보고 내 의견이 꽤 괜찮았던지 오랜 고민 끝에 울택상이 지은 이름이 민혁이었다. 느낌 좋잖아? 민트리오!
안 그랬음 울 둘째는 준식이나 은식이나 우식이나, 영식이나.... 그나마 느낌 괜찮았던 윤식이는 큰집 차지였다. 어쨌거나 그렇고 그런 아버지 느낌 나는 친숙한 이름을 얻고, 울 막내 꼬맹이는 개밥에 도토리 마냥 오빠들과는 동떨어진 어떤 이름으로 불렸겠지! 오리온이나 오로라 같은. ㅎㅎ
딸내미 이름을 O식이라 지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름하니까 또 에피소드가 뽕뽕 솟아오른다. 울 첫째 민돌이 때 말이다. 우리 어머님은 둘째 아들의 첫 손주가 태어나자 기쁜 마음에 우리와 상의도 없이 이름 잘 짓는다는 작명소에 달려가셔서 사주팔자에 부족한 기운을 채워 떡하니 현식이란 이름과 태호란 이름을 받아오셨다. 그녀의 까칠한 아들은 애기 이름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친한 친구 중에 현식이가 있어서 그렇게는 어색해서 못한다고 못을 막았다. 들인 돈이 아쉬웠던 어머님은 아쉬운대로 집에서라도 그럼 태호라고 부르자 했다. 며느리 앞에서 민망하셨던지 새근새근 잘 자고 있는 아기를 어르시며 "태호야! 태호야" 하셨다.ㅋㅋ
사촌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울 큰 아가씨의 중학생 딸이 우리 큰아들 이름을 두고 며칠 고민했던가 보다.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파서 말이다. 잔뜩 고민 끝에 성하라는 이름을 지어왔다. 오성하! 만화 주인공 이름으로도 꽤 괜찮은 그런 느낌의 이름이었다. 기대 잔뜩 하고 아기를 보러 왔는데 아기 얼굴을 보고는....
"민식이가 어울린다. 그냥 민식이로 해" 성하라는 이름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예상 밖의 얼굴 이었던게지.
둘째 이름을 민혁이라 했을 때 그 사촌누나는 "음! 잘 어울리네" 하고 인정을 해줬다. 사실 울 둘째가 태어났을 때 나도 첫눈에 "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했을 만큼 너무 예뻤다. 오목조목 정말 예뻤다.
첫째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고 뭣 하나 부족함 (외모만 빼고)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모든 과정이 교과서처럼 착착 시기에 맞춰 잘 따라가 육아 교과서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 둘째 녀석은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와서부터 뭔가 달랐다. 도대체 바닥에 아이를 눕힐 수가 없었다.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잘 자다가도 요위에 눕힐라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울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을 엄마와 한 몸이 되어야 했다. 급기야 가슴 위에 아이를 올려놓고 폭 껴안고 같이 잠들지 않고서는 거의 혼자 자는 것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바르르 깜짝 놀라던 녀석인데 겨우 세살 된 형이 엄마 옷자락 잡고 주위를 맴을 도니, 그 녀석도 괴롭긴 마찬가지였을 터. 혹시나 싶어 품 안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녀석을 겁 없이 요위에 엎어서 눕혔다. 큰 아이 때라면 무서워서 상상도 못 할 일이었겠지만. 그랬더니 요 녀석이 요 위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것도 편안하게. 엎드려서 고개만 옆으로 돌려놓은 모습은 보기에 너무 불편해 보여 딱하고 안쓰러운데, 요 녀석은 그 자세가 가슴을 누르면서 안정감을 찾게 해 준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 갔다. 그렇게 우리 집 둘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때의 그 남다름의 시작이 극강의 예민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태생적으로 예민한 아빠를 닮은 그를, 아니 능가하는 초 예민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그 녀석을 이 어리석은 엄마가 못 알아본 것이다.
큰 아이는 엄마처럼 무던했고, 그래서 죽이 착착 잘도 맞았다. 그래서 큰 부딪힘 없이 교과서 같이 자라는 첫째를 기준으로 두고 둘째를 이상하다고,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한다고 자꾸만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니 그 많은 괴로움과 고단함이 아이의 성향을 잘 몰랐던 무딘 엄마로부터 시작됐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무던한 아이와 까탈스러운 아이의 성향을 무시하고, 무던한 아이를 키우던 엄마가 내가 옳다는 아집으로 그 작은 아이의 고삐를ㅉ 한없이 내쪽으로만 끌어당겼다. 그래서 서로 힘들었다. 이런 엄마 밑에서 그 어린것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엄마가 현명해서 그것을 진작 알고 깨달아야 했는데 이 어리석은 엄마는 너무 늦게서야 그걸 알고 깨달았다.
사실 두살 터울 나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나도 참 힘들었다. 잠시 잠깐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병원 갈 일도 기약 없이 미루던 시기였다. 바로 앞 동에 사셨던 시부모님들. 그분들도 막내딸의 어린 두 손녀를 일하신 딸 대신 키우시느라 내게 손 한번 내밀어줄 여유가 없으셨던 시기다. 참 그땐 시부모님이 야속했지만 그렇게 우리 아이를 봐주실 내 아버지 어머니의 여유 없음이 더 원망스러웠던 때이다.
우리 부모님도 치매에 걸려 밤낮이 바뀌어 밤만 되면 옷 보따리를 싸서 집에 간다고 나서는 할머니를 돌보시느라 꼬챙이처럼 말라가던 때라 육아로 힘든 딸을 살펴볼 여유도 없으셨다. 그렇게 힘든 시기가 있었다. 내 몸도 맘도 모두. 그 갓난아기에게 제발 좀 자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밖에 나가고 싶다고 엄마손을 이끄는 큰아들에게 자꾸만 TV를 권하던 그때.
두서없이 영상처럼 펼쳐지는 그때의 내 모습에 내가 안쓰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내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자꾸만 눈물이 차오른다. 고단하고 힘들었던, 그래서 아이들을 이쁜지도 모르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기에도 벅차고 힘들어 급기야 병이 나고 말았던 서른 중반의 내가 나를 슬프게 한다.
아기 잠재우다 나도 모르게 곯아떨어지면, 울 큰아이가 심심하다고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럴 때면 꼭 의사놀이하자고 꼬셔서 나는 바닥에 누워 여기가 아파요 저기가 아파요. 입만 살아서 무척 아프다고 꾀병을 부렸다. 모나미 볼펜을 꾹꾹 눌러대며, 주사기 대신 볼펜으로 꾹꾹 여기저기 주사는 참 잘도 놓아주었다.
그렇게 의사 놀이하며 놀다 완전히 골아떨어진 어느 날은 양팔부터 배, 저 아래 종아리까지 온통 까만 지렁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얼굴은 쏙 빼놓고. 유성 매직이 아니었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야! 엄마가 도화지야? 이거 어째! 언제 다 지워? 응?"
또 의사 놀이하다 참다 참다 내려앉은 엄마의 무거운 눈꺼풀을 두 손으로 헤집으며, 영화 대사처럼 내던졌던 한마디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콕 박혀있다. "어? 엄마 눈 속에 민식이가 있네?""엄마~ 엄마 눈 속에 민식이가 있어요!" 그 환희에 찬 목소리, 세상 신기한 걸 발견해 놀라움과 기쁨에 찼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아아~! 엄마, 아파, 아파! 눈 좀 그만 쑤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엄마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종종 그때 일을 얘기하며, 우리 큰아들에게 한마디 한다.
" 그때 우리 민식이 정말 똑똑하고, 하는 말마다 시인 같았는데....."
그때 지금과 같은 반응을 때마다 기운 나게 해 줬더라면 우리 아들의 마음속에 시인의 감성이 살아있지 않았을까? 되돌아가도 그때 그 시기의 나는 그렇게..... 되돌아갈 수도 없지만 되돌아간다 해도 그 시절의 나는 또 그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다고 해서 세상일이 다 맘같이 되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울택상도 고향에 돌아와 터를 잡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또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없기는 서로 매한가지였던 시기건만 아는 사람이 시댁 식구들밖에 없었던 내게 그 시절 울택상은 지은 죄가 참 많구나...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싶다.
큰 아이는 동생 없이 오로시 혼자서 온 정성으로 행복했던 시기가 분명 있다. 막내 또한 오빠들과 터울이 많이 져 외동이처럼 온 사랑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울어도, 우는 모습도 예쁘다고 나이 든 엄마는 늦둥이 막내딸을 끌어안으며 행복했던 때가 있다. 시간이 준 여유 때문이리라.
그러나 울 둘째는
태어나 보니 위로 형이 있었다. 엄마는 불편해서 잠 못 들고, 꼼지락거리는 내게 자꾸 이상하다고만 한다. 왜 안 자냐고만 한다. 지금은 먹고, 자고, 싸다가 배고프고, 기저귀가 차가워지면 그때 잠깐 우는 게 정상인 신생아기 시절이란다. 나는 그게 잘 안된다. 9일 동안 똥을 안 쌌더니, 매일 내 배를 문지르며 애태우던 엄마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관장을 하고 왔다. 의사 선생님은 분명 모유를 먹고 소화가 잘 되는 애기들이 간혹 그런다고 괜찮다는데, 엄마는 또 나보고 이상한 놈이란다. 세 살 된 형은 엄마 옆에서는 세상 사랑스럽게 웃으며 나보고 이쁜단다. 귀엽단다. 이쁘다 이쁘다면서 엄마가 자리만 비우면 자꾸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씌운다. 귀엽다 귀엽다며 내 발을 매만지다가 엄지발가락을 꽉 물어재낀다. 나쁜 놈. 가끔은 날 밟고 넘어선다. 엄마는 나의 이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 좋게 하지 말란 말만 반복한다. 따끔하게 다시는 못하게 해야 나의 이 불안이 사라질 텐데 말이다. 초자 엄마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제 살만하다. 형이 유치원 가고 나면 나는 엄마랑 둘이다. 엄마가 책도 읽어 주고, 블록놀이도 해주고, 그림도 그리자고 나보고 자꾸 뭘 같이 하자는데, 귀찮아도 기분은 좋다. 오로시 엄마가 나만 보고 있으니, 살맛 난다. 어라 이 시기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엄마가 나를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한다.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대머리 여자아기를 데리고 왔다. 내 동생이란다. 아~ 나의 좋은 시절은 여기서 끝인가?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자 지금부터 준비하자.
그래 그랬는지 여동생에게 유독 못되게 굴었다. 지금도 여전히 울 꼬맹이에게 둘째 오빠는 못된 오빠다.
첫째와 둘째가 순번을 달리해 태어났더라면 나았을까? 그런 생각 참 많이도 했다. 예민하고, 카탈스럽고, 가리는 것 많고, 매사에 짜증부터 내는 둘째가 첫째였더라면 모든 애기들은 다 그런가 보다 하며, 처음이라 서투른 나를 반성하며 '애들이 다 그렇지' 하며 키웠을 것 같다. 그럼 좋았을 텐데...
무딘 엄마에게 예민한 우리 집 둘째는 평생의 숙제 같은 아들이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좀 미리 알았더라면 그 시절, 우리 둘째를 그렇게 외롭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기억 시계를 되돌리니 그 어린아이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오랫동안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래 그런지 항상 방실방실 웃는 형의 얼굴과 달리 사진 속 둘째는 매번 울거나 찡그리거나 우울한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사춘기를 호되게 앓았다. 그리고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철이 든 모습이다. 모든 것을 웬만하면 스스로 해결한다. 중학입학 후론 아침에 깨워본 기억이 없다. 어려서부터 양치질 하란 잔소리 없이도 기계처럼 이를 잘 닦아 지금껏 충치로 고생해 본 적이 없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뭔가가 있긴 하다.
고교 입학 선물로 제가 갖고 싶다던 제법 비싼 고급 시계를 사줬더니, 이런 걸 부모님께서 사주시면 왠지 자기는 죄송한 맘이 든다면서 정말 고맙다고 진심에 찬 마음을 전해주었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아들의 마음. 그게 뭘까? 항상 불안을 껴안고 걱정 속에 살고 있다. 자기에 대한 기대감도 낮고 자신감도 별로 없다. 그러면서 간간히 형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부러워한다. 자기가 봐도 걱정되는 형이 무한 긍정으로 큰소리치는 게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철이 드니, 전에 고등 대비해서 중등 마지막 방학 때라도 공부 좀 해둘걸 그랬다고 아쉬워한다. 그때는 귓등으로 듣던 녀석이 이제 와서 강제로라도 시키지 그랬냐고 한다. 그러나 옛날에로 시작해서 설을 풀라치면 할 말이 없어지는 울 둘째다. 지금은 너무 오랫동안 공부에 소홀해서 막상 해보려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은 안 간단다. 학교 수업 듣고, 방과 후 수업 들어가면서 알아서 해보겠단다. 그게 될지 지켜보는 엄마는 불안하다.
너무 안 써서 쇠 녹이 잔뜩 낀 톱니바퀴를 보는 것 같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을 양파껍질을 까야할 아들인 것만 같다. 너무 오랫동안 머리를 안 써서 그 낀 때 벗기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라 충고해준다. 하지만 지치지 말고 꾸준히 해 가면 언젠가 탁 트이는 시기가 있으니, 제발 포기 말고 꾸준히 하라고 응원한다. 아빠를 똑 빼닮았으니, 머릿속도 아빠처럼 빛나는 뭔가가 하나 있을 거라며 노력으로 그 빛을 찾으라 격려한다. 백세시대니까 세상 길게 계획하고 늦었다고 생각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갈고 닦자고 말이다.
언젠가부턴지는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 모든 게 엄마 탓인 것만 같아 우리 둘째에겐 유난히 부드러운 엄마가 되려고 노력한다. 최대한 의견을 묻고, 원하는 것만 해준다. 욕심도 내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게 배려해 주고, 행동으로 하되 말은 아낀다. 여전히 짜증 많고, 화내고, 툴툴거리는 일이 많은 녀석이다. 그 예민함은 어디 안 갔다.
다 엄마가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하며, 그 쌓여있을 억울함 혹은 원망스러움을 내 품 안에 있을 때 지금이라도 다 풀어주고픈 엄마의 맘이다.
첫째는 엄마 OO 좀 해주세요! 하고 당당하게 부탁하고,
둘째는 엄마 OO 좀 해주시면 안돼요? 해주실 수 있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운동화도 손수 빤다. 그런 둘째가 안쓰러워 이 엄마가 알아서 빨아주고, 뺀질거리는 첫째에겐 "야! 뭐 대단한 공부 한다고 엄마 보고 운동화를 빨아달래? 네가 빨아! 게임할 시간에 운동화나 빨아! 임마 일았어?" 한다. 항상 그런 거 아니고. ㅎㅎ 운동화야 맡기면 몇 천 원이면 되지만, 엄마랑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동안이라도 손수 제 운동화쯤은 한두 번 빨아 신으라 권한다. 교복도 가끔 직접 빨라 두는데, 큰 놈은 물에다 담갔다가 섬유린스만 잔뜩 넣고 냄새만 폴폴 풍기게 마무리한다. 둘째는 제법 엄마 흉내를 낸다. 참 신기하다. 생산자는 동일인인데, 생산품은 전혀 다른 두 종이다.
새벽 세시에 울 둘째가 먹고 싶다는 식혜를 손수 만들다가 이래 저래 많은 생각이 오갔다. 새벽 세시에 밥솥에 넣어둔 식혜가 잘 숙성돼서 밥알이 동동 뜨기를 기다리며, 이 수고로움을 감내하게 하는 울 둘째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싶어 그 마음을 구구절절이 적다 보니, 산으로 갔다 바다로 갔다 하며 산만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축구장에서 운동하고 오다가 떡집에 팻트병에 들어있는 식혜가 너무 먹고 싶었단다. 하나 살까 했는데 돈이 없어서 그냥 왔다길래, 근처 그 떡집에 갔더니 벌써 식혜는 동이 나고 없다.
시장까지 가서 한통 사다 줬더니, 역시 캔보다 맛있다며 순식간에 다 마시고 아쉬워했다.
"엄마가 만들어 줄게!" "엄마 가요?" 그거 쉽다고, 너희들 어렸을 때 엄마가 만들어줬던 거 생각 안나냐고 그렇게 식혜 만들기에 돌입해서 동동 떠오른 밥알 식혜 팔팔 끓여 마무리한 게 새벽 3시쯤이었다.
울 첫째가 그랬다면?
"집 앞 GS가! 비락식혜 맛나! 사 먹는 게 더 맛있어!" 그랬을 터이다. 그래도 되는 녀석으로 엄마랑 막역한 사이다. 성향이 나랑 비슷해서 편하고 친구 같다. 그런데 둘째는 철이 드니 좀 조심스럽다. 행여 내 한마디, 무심결에 한 행동 하나하나가 혹여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서 말이다.
엄마가 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더구나 좋은 엄마가 된다는 건 더더욱...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연습이란 없다.
그래서 수도 없이 좌절하고, 스스로 나쁜 엄마, 자격이 없는 엄마라 자책하며 눈물 지었던 날들도 많다. 여전히 엄마로서 나의 고민은 진행 중이고, 이 부족한 엄마 밑에서, 엄마를 의지하며 건강하고 바르게 커가는 아이들이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끝이 없는길을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9년 전 이 사진을 보며 다짐했던 엄마의 그 옛날 바람!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우리 아이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감동으로 다가왔던 그때 되뇌었던 다짐!
보기만 해도 흐뭇했던 우리 집 삼 남매.. 민식 민혁 민하
저 넓고 푸른 바다처럼
저 높고 푸른 하늘처럼
그렇게 큰 뜻! 큰 생각! 큰 마음으로
세상일! 세상 사람들! 에게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다.고
지혜롭고 현명한 어른될 때까지 엄마 아빠가 좋은 친구가 되어 보살펴주마!고
애들아! 지금 우리 거기를 향해 잘 가고 있는 거지?
그렇지?
다시 한번 또 다른 주문을 건다.
아이들이 훌쩍 컸다.
엄마의 뜰안에 있는 동안만큼은 세상 편안하고, 행복하고, 여유로운 너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이 엄마는 그 뜰을 열심히 가꾸고 노력하마!
너희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마. ㅎㅎ
사랑한다. 나의 영원한 꼬맹이들아~~
어제 새벽 둘째를 위해 식혜를 만들다 오만가지 생각에 빠졌던 내가, 두서없이 옛날 생각에 빠져 끝도 없는 넋두리를 했구나. 2022. 09. 13 화요일! 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