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6월을 기억하시나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요?
그해 6월 대한민국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2002년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붉은 악마들의 함성과 열광은 그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한 기이한 풍경이자 감동 그 자체였다.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한일 공동 개최라는 타이틀을 달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축구 경기였다. 16강도 족하다했던 우리의 기대를 얕보듯 태극전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한 경기력으로 기록에 기록을 더하는 승전보를 날렸다. 8강을 넘어 4강으로... 이러다 결승까지 가는 것 아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그 해 6월, 우리는 그 열기에 취해 서울시내 곳곳으로 거리응원을 나서며 붉은 티셔츠를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그 마지막 경기가 열리던 2002년 6월 30일.
나는 월드컵 경기의 성공적인 개최와 성과를 자축이라도 하듯 축배를 들었다. 수도권의 작은 소도시에서 파티를 열듯 일가친척들과 많은 지인들의 축복과 축하를 받으며 성혼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구태에 젖은 표현은 아니었지만 그런 맘으로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약속을 나의소중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월드컵과 함께 기억 속에 담았다. 행여 우리나라가 결승전에 진출하면 결혼식에 오지 않아도 용서하겠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행운인지 불운인지 우리 선수들의 열정은 4강을 끝으로 막을 내려주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가볍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나의 결혼식에 와주었다.
2022년 6월 30일.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오늘은 이 날을 맞이하는 맘이 남다르다. 살다보니 어느새 20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올해로 나의 결혼생활이 딱 20년을 맞이했다니, 실감도 나지 않지만 무심한 세월 앞에 그저 부끄러움이 앞설 뿐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거늘, 20년 세월이면 어마어마한 변화와 발전이 가능한 시간의 양일진데 내 눈앞에 딱 하고 펼쳐져 있는 현실은 "어라? 이게 뭐지?" 싶다. 변화는 눈에 띄게 진행됐으나 발전은 그리 없어 뵈는 현실. 그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인가?
까만 턱시도에 훤칠한 키, 풍성한 머리숱에 탱탱한 피부의 그!
하얀 드레스에 환한 미소, 앙상하게 드러난 쇄골과 잘록한 허리의 그녀!
오래된 앨범 속 모습을 보며 서로에게 묻는다. "누구시드라?"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너도 많이 늙었다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옛 어른들이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고 하더니... "자기야! 자기 머리에 서리가 엄청 내렸어!"라고 우스개 소리로 받아치는 나! 그렇게 서로에게서 나이들어가고 있음을 본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면서,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한 공간안에서 살아내는게 기적같은 일이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소소한 부딪힘이 가끔은 감정싸움으로 치달아 쓸데없는 에너지를 과하게 썼던 날들도 허다하다. 허나 달라서 부딪치는 것은 세월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세월따라 우리 몸이 노화의 과정을 겪듯 인격이라는 것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도 세월따라 저절로 그리 성숙되어가는 줄 알았는데.... 세월은 무턱대고 많은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 시간을 살아내는 내 안의 나의 노력이 부단히 필요함을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엔 노력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그 사이 폭이 좁은 사이일수록 더더욱!
2002년의 함성은 추억과 함께 내 기억속에 영원히 박제되었지만,
그날 첫발을 내딛은 우리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오늘도 계속된다.
인간적인 성숙함이 배어나는 20년후의 내 모습을 기약하며,
앞으로의 20년은 좀더 노력하고 살피는,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성숙한 인격을 갖춰가는,
나이에 걸맞는 혜안을 가진 삶을 살아가는,
노력하는 사람의 삶을 살아보자.
살다 보니 20년.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