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집에도 이름이 필요해!
집에도 이름이 필요했다. 처음 신혼집으로 이사 와 커피를 마시며 창밖 풍경을 내다보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망원카페’ 어때?” 그 이름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름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페’라 부르면서 우리는 그곳에서 매일 맥주만 마시고 있었으니까.
<하루의 취향> p.23
집에도 이름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에 이제껏 내가 살았던 무수히 많은 집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매탄동 집 그다음에는 영화동 집 다음에는 화서동 집, 매교동 집, 원천동 집 그리고 진양아파트, 성원아파트, 동아아파트 하나 같이 집이 위치했던 동네 이름과 아파트 이름이 전부라 밋밋하기 그지없다. 아니, 그전에 이 이름들은 내가 혹은 우리 가족이 명명한 것이 아닌 많은 집들 중 하나이니 내가 살았던 집들은 이름을 갖지 못했다. 하다못해 파란 대문 집이라든가 초록 지붕 집 또는 감나무 집 같은 특징 있는 기억도 없어 아쉽다. 애써 떠올린 것이 영화동 집의 찌그러진 대문 탓에 부모님과 예전 이야기를 할 때면 “왜, 그 대문 찌그러진 집 있잖아”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별명이라도 갖고 있는 유일한 집 아닐까?
그래, 이름을 짓자. 이제부터라도 이름을 짓자. 나와 내 가족을 안온히 지켜주는 공간에 이름 하나는 지어주는 것이 집주인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첫 번째 시도가 바로 제주이다.
제주, 조천, 와산, 대흘
일단 작가가 그러했듯이 이곳이 속한 지역명을 펼쳐보았다. 제주는 너무 넓고(이 넓은 지역에 얼마나 많은 집이 있겠는가), 조천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면 와산과 대흘이 남는다. 다음으로 그 뒤에 붙을 단어를 고른다. 와산 집, 대흘 집은 적어놓고 보니 매탄동 집과 다를 것이 없는 모양새여서, 모든 창조의 시작은 모방이니 나도 김민철 작가의 망원카페처럼 카페를 붙여본다. 와산카페, 대흘카페, 뭔가 아쉽다. 아무래도 카페가 많은 곳이다 보니 왠지 나만의 공간이라는 느낌보다 네이버 지도에 떡하니 그 이름이 있을 것만 같다. 호프라 하기엔 나와 남편이 술을 즐겨하지 않고, 아 ‘살롱’ 어떤가? 독특하지 않나? 괜찮은데,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집 근처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이미 와산살롱이라는 카페가 있다. 나중에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 집 이야기를 하는건지, 그 카페에 갔던 이야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수 있으니 제외한다.
카페, 살롱, 놀이터, 랜드(무슨 놀이동산도 아니고!), 월드
이런저런 공간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또 하나씩 지워나가며 빈약한 나의 어휘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내 머릿속을 스쳐 간 단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지트’
아지트 [러시아어]←agitpunkt
1. 어떤 사람들이 자주 어울려 모이는 장소.
2. 비합법 운동가나 조직적 범죄자의 은신처.
3.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활동을 비밀리에 지도하는 본부. 원래는 공산당의 용어였으나 지금은 주로 노동 쟁의와 같은 급진적인 활동에서 쓴다.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아지트라는 단어가 러시아어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범죄자라든가 공산당 용어라든가 하는 살짝 부정적인 의미가 끼어있기는 하나 그 이전에 은신처, 비밀이라는 낱말에서 느껴지는 뭔가 비밀스러운, 나만의 장소라는 뉘앙스가 마음에 든다. 나만의 은신처, 우리들의 비밀장소 이런 느낌이랄까.
그렇게 우리 집은 ‘대흘 아지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와산과 대흘 두 가지 지명에서 살짝 고민을 하고, 대흘의 뜻을 풀어 ‘큰 숲’이라는 이름도 고민했으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흘’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는 것으로 정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남편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이런 부분에서는 다소 시큰둥한, 아니 무심한 성격이지만 대흘 카페나 대흘 살롱 또는 와산 카페 등의 이름보다는 마음에 든다고 해준 것으로 동의를 얻은 셈 치기로 했다.
이름을 정했다 해서 방방곡곡 알리거나 택배를 받을 주소란에 꼭꼭 눌러 적을 수는 없지만 내비게이션 등록 지점에 ‘대흘 아지트’라 저장해 두고 나름 흐뭇해하고 있다. 1년의 시간, 우리의 아지트에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다시 육지로 돌아간 후에도 보물을 찾듯 하나씩 야금야금 꺼내서 읽어보고 싶다.
*제목은 김민철 작가님의 <하루의 취향> 문장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