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야,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 들려줘.”
“브로콜리 관련 콘텐츠입니다.”
“브로콜리 말고, 노래 틀어달라고!”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너, 바보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속상해요.”
“......”
아니, 이 무슨 환장할 대화인지 모르겠다. 내가 필요한 말은 가볍게 흘려들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따박따박 대꾸를 해대니 이쯤 되면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들 지경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나도 모르는 새 ‘깐족’ 기능을 탑재한 AI 가 발명된 것은 아닐까?
종종 남편이 TV 채널을 찾으며 명령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지니와 투닥이는 걸 볼 때면, 편하자고 사용하는 기기와 싸우다니, 힘 빼지 말고 리모컨을 이용하라 말하곤 했는데 내 모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듯 가끔 심술을 부리긴 하지만 말 한마디면 노래를 찾아 척척 들려주는, 과학기술이 진일보한 시대인 2024년, 어쩌면 그런 이유로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 듣던 아날로그 감성 물씬 느껴지는 ‘라떼’가 종종 떠오르곤 한다. CD도 아닌 테이프라니. 반가운 택배 상자에 붙어 있는 셀로판테이프나 다용도 청 테이프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라떼 테이프는 카세트테이프를 일컬었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녹음해 늘어질 때까지 듣거나 친한 친구에게 선물하곤 했던 카세트테이프. 좀 더 깨끗한 음질의 노래를 듣고 싶거나, 선물하고 싶은 노래들을 쉽게 녹음할 수 없을 때는 곡들을 고르고, 순서까지 꼼꼼히 적어주면 원하는 대로 녹음해 주던 음반 가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었다. 이럴 때는 일반 카세트테이프 보다 몇백 원 더 비싼 것을 고르고 괜스레 뿌듯해하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귀로 향상된 음질을 들었다기보다 내 마음이 그리 느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요즘이야 TV를 보다가도, 또 운전하다가도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 들려줘" 한마디만 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뭐, 가끔 청력이 좋지 않은 지니가 있기도 하지만) 음악을 틀어주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언제쯤 라디오에서 나올까? 귀를 쫑긋거릴 일도, 그 노래를 방해 없이 온전히 듣기를 바랄 필요도 없어졌다.
노래를 기다리고, 귀를 쫑긋거린다니 고개를 갸웃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밀레니엄 시대 도래 이전, 일천구백구십으로 시작하던 해에는 흔한 광경이었다. 말 그대로 지금은 으레 그러려니 여겨지는 것들이 그때는 ‘설마 그런 일이?’ 싶은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이제나저제나 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운수 좋은 어느 날 노래가 나오면 재빠르게 녹음 버튼을 누르기도 했고, 또 그렇게 만족하며 녹음을 마칠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노래 말미 광고가 끼어들면 분노(!)하기도 했더랬다. 생각해 보라,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 행복한 데다 타이밍 적절하게 녹음까지 하며 흥얼흥얼 분위기에 젖어 있는데 갑작스레 ‘만나면 좋은 친구’를 찾으며 광고가 이어지는, 만남이 반갑지 않던 그 순간을!
이렇게 한 곡, 한 곡 선곡하고 앞, 뒷면 분위기까지 고민하며 순서를 정해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는 종종 마음을 전하는 선물로 활용되기도 했다.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며, ‘이런 노래 어때?’라는 메모와 함께 건네거나 상대방이 좋아할 법한 노래들을 찾아내 그야말로 정성 가득 담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감성 충만 카세트테이프를 선물하는 것이다.
대학교 때 학과 동기 S에게 카세트테이프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노래들이라며 건네는 테이프를 받아 든 순간, 앗, 혹시?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스레 싱숭생숭해지고, 아, 미안해서 어쩌지.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S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런데 M은 어떤 노래 좋아하는지 알아?”
M? 나랑 친한 그 M? 자그마하고 야무진 모습 그리고 싹싹한 성격에 선배, 동기들 사이에 인기가 좋아 학번마다 추종자가 한둘은 있는 그 M? 여기서 M이 왜 나와? 순간 뭔가 쎄하다. 아, 나 이거 알아. 순정만화 같은 데서 예쁜 친구랑 같이 다니는 친구1에게 종종 발생하곤 하는 그 상황.
그리고 얼마 후 예상한 대로 M이 S에게서 노래 테이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걔 은근히 섬세하더라. 메모에 ‘조심스레 건네 본다’라고 적어둔 거 있지?”
아, 그래, 네게는 참으로 섬세하고 조심스러웠구나. 내 눈에는 눈치 없고 조심성 없는 애로 보이던데. 게다가 메모라고? 내게는 휘갈겨 쓴 쪽지는커녕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테이프를 주섬주섬 꺼내 주던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입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게 꾹 눌러두고 그저 “그러게. 의외네” 대꾸하며, 무슨 노래들이 있는지 물어볼 수밖에.
그런가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만방에 전하는 ‘전도’ 테이프도 있었는데 친구 J의 비틀스 사랑이 가득 담긴 테이프가 그러했다. 내게는 ‘Yesterday’와 ‘Let it be’ 등 누구나 알만한 노래들로 익숙한, 전설 같은 존재 비틀스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혀준 데는 J의 공로가 혁혁하다. 헤비메탈 젊은이 J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게, <Beatles for U>라는 예쁜 제목까지 직접 손으로 적어 건네준 카세트테이프 덕에, 나중에 이렇게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 희망하게 된 곡 ‘When I’m Sixty Four’를 만나지 않았던가.
예순네 살이 되어 머리카락이 빠져도 발렌타인과 생일을 축하하고, 날 필요로 할 꺼냐고, 함께 정원을 가꾸고 일요일에 드라이브를 하고 밥을 먹을꺼냐 묻는 귀여운 노래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테이프에는 단순히 노래만 담긴 것이 아니라 그 시절 나를 둘러싼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러기에 지금도 그때 테이프에 녹음되었던 익숙한 음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라떼’의 세계로 소환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끄적끄적 글을 적고 있으려니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던, 때로는 경쾌한 댄스곡이 어느샌가 굿거리장단의 타령이 되어버리기도 했던, 음들이 하나, 하나 나를 채워간다.
“100m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차량에 설치된 Tmap 안내 음성이 일천구백구십몇 년의 추억 속에 빠져있던 나를 2024년 5월로 불러들인다. 출장지까지는 아직 서너 곡의 노래를 들을 여유가 남아있으니 이번에는 지니 친구 팅커벨을 소환해 봐야겠다.
“팅커벨!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 들려줘.”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
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
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다행이다. 팅커벨은 지니보다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오늘은 내 기억 속에 꽉 찬 노래들을 하나씩 섭렵하며 나만의 라떼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