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파이와 스파게티. 나의 세상에 이 두 단어를 전해준 사람은 아빠였다.
‘파이’라고는 오리온 초코파이밖에 몰랐던 시절,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빵집이었던 ‘오란다 제과’에서도 팔지 않았던 ‘사과파이’와 특별한 날이면 가족 나들이 겸 들르던 돈가스집 ‘가람 경양식’에서도 먹어보지 못했던 ‘스파게티’였다. 그렇게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었던 ‘미지’의 이 음식들을 나는 아빠를 통해서 맛보았다.
식품을 전공하신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때 미국에 머물면서 제빵 과정을 수료하셨다. 워낙에 음식을 드시는 것도 또 직접 만드시는 것도 좋아하셨던 터라 종종 손이 많이 가는 냉면이며, 갈비를 맛깔스럽게 해주긴 하셨으나 바다 건너 다녀오신 후, 자연스레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의 스펙트럼이 확장되었다. 그중 아빠의 시그니처 요리를 꼽자면 사과파이와 스파게티였다. 손님을 청하거나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이면 상에 올라 그 자태를 과시하던 스파게티가 아빠의 대표 요리였다면, 나와 내 동생의 눈을 반짝이게 만든 건 사과파이였다. 노릇노릇 구워진 바삭한 파이 반죽 속에 설탕과 계피가루가 달콤하게 조려진 사과가 씹히는 맛이란!
“어머, 집에서 이런 음식을 직접 하세요?”
“아빠가 사과파이도 해주시고 좋겠네!”
지금이야 재료나 레시피도 쉽게 구할 수 있고 홈베이킹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음식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집에서 사과파이며 스파게티를 직접, 그것도 아빠가 요리하는 일이 흔치 않았기에 번번이 감탄사가 섞인 반응이 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소설 동백꽃에 등장하는 점순이처럼 ‘느 집엔 이거 없지?’의 기분으로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곤 했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칭찬에 약한 우리 아빠도 그 덕분에 더 많은 사과를 깎고, 스파게티 면을 삶으신 것은 아닐까?
그런 아빠표 사과파이의 달달한 기억에 살짝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더해진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여느 때와 같이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현관에 처음 보는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누가 왔나?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스멀스멀 피어나는 까닭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들어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곳에는 같은 반인 Y와 그녀의 친한 친구 몇몇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과 깎기와 밀가루 반죽에 열중한 모습으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10대 소녀들의 우정은 의외로 까다롭고 예민한데, 일단 늑대처럼 무리 지어 생활하는 습성이 있는지라 내가 속한 그룹이 아닌 상대에게는 배타적이 되곤 한다. 나와 Y가 그러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무리에 속해있었고, 딱히 나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하호호 즐거운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 집에 몰려와 있는 타 조직(!)의 수장 격인 Y와 친구들은 나와는 살짝 데면데면한 사이였달까?
왜 온 거지? 아니, 내 영역(우리는 전문용어로 이를 ‘나와바리’라고 부른다)에, 그것도 어떤 언질도 없이 나보다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싸우자는 건가?
내가 초등학생이었다면 ‘우리 집에서 나가’라고 했을지 모르나, 당시의 나는 나름 사회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중학생이었다. 게다가 이들을 진두지휘하며 사과파이를 만들고 계신 아빠 앞에서 딸의 매끄럽지 못한 학교생활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하긴 Y와 친구들 역시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는데, 자신들이 우리 집 부엌에서 생각보다 많은 양의 사과를 깎고 얼굴에 하얗게 밀가루를 묻혀가면서 반죽을 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대체 우리 집에 왜 온 건지 누구도 묻거나 답하지 않았던 그날, 함께 만든 사과파이를 맛있게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은 학습된 앙큼함인지 아니면 사과파이의 달달함이 만들어낸 찰나의 화해무드였는지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후 Y와 나는 그간의 어색함이 무색하리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지금까지도 맛있는 사과파이를 만든다는 빵집을 찾아 순례하는 절친이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법이다. 다만, 중학교 졸업 전까지 Y는 나와 마주칠 때면 “그때 사과파이 맛있었어!”라고 말하며 마치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단어는 ‘사과파이’밖에 없다는 듯 인사를 건네곤 했다.
아빠와 함께한 미지와의 조우가 사과파이처럼 항상 달콤하고 즐거웠던 것만은 아닌데 그중 하나가 ‘피자’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여의도의 삼촌 댁에 놀러 간 어느 날, 숙모가 당시 서울에서 핫하다는 ‘피자’를 시켜주셨다. 제법 두툼한 피자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시카고식 피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거나 노르스름하고 걸쭉한 껍질(그것이 치즈라는 것은 이후에야 알았다)에 덮힌 처음 보는 비주얼에 망설이고 있으려니, 음식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용감해지는 남동생이 먼저 한 입 덥석 입에 물었다.
잠시 후 우물우물 피자를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이 간절한 눈빛을 담아 나를 바라봤다.
‘누나, 이거 먹어야 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동생이 하고 싶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누나가 아빠한테 먹기 싫다고 말해주면 안 돼?’
지금이야 철딱서니 없는 누나를 걱정하는 동생이지만 단언컨대 중2병을 앓기 전의, 특히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남동생에게 나는 말 그대로 작은 세상의 기준이자 독재자였다. 하지만 이런 누나 바라기 남동생과 달리 그 당시 나는 껌딱지처럼 내게 찰싹 붙어 있는 동생을 어떻게 하면 따돌리고 친구들과 놀 수 있을까에 골몰하곤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동생의 간절함에 공감하는 대신 우리 사이에 놓인 다섯 살이라는 격차를 보여 주기로 결심했다.
‘넌 아직 어려서 이 맛을 모르는 거야.’
나는 다소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한껏 거만한 동작으로 피자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미지와의 조우는 언제나 쉽지 않은 법, 한 입 크게 베어 문 순간 적지 않은 충격이 나의 혀와 코 그리고 뇌를 차례로 스쳤다. 아니 이건 무슨 맛이지? 게다가 이 냄새는 또 뭐고? 학교에서 급식으로 받은 우유를 먹기 싫어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깜빡 잊고 며칠이 지난 후 버릴 때 나는 그 묘한 냄새와 닮았다. 어떻게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니 심지어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자를 꿀꺽 삼키는 것으로 동생보다 ‘어른’임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표정 관리에 실패한 나는 결국 한 입 베어문 피자를 내려놓고야 말았다. 덕분에 그날 나와 남동생은 나란히 아빠에게 촌놈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기억 속 장면들에는 많은 순간 아빠가 옆에 있었다. 그래서인가 때때로 아빠를 닮아있는 내 입맛을 발견할 때면 피식 웃음이 나곤 한다. 입맛까지 닮다니, 어릴 적에는 아빠랑 닮았다는 말을 그렇게나 싫어했었는데 말이다.
“아유, 아빠랑 똑 닮았네. 저 코 봐!”
어릴 적 나를 처음 보는 어른들의 단골 멘트였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는데, 특히나 나의 콤플렉스였던 코를 가리키며 ‘복코’라고 할 때는 정말이지 엉엉 울고 싶었다. 남녀의 신체 조건이 다르고 미의 기준이 상이하다 한들 어린 내 눈에는 아빠보다 엄마가 더 예뻐 보였다. 엄마의 하얀 피부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비해 노란빛을 띠는 아빠의 피부와 쌍꺼풀 없이 가늘게 찢어진, 덕분에 무서운 인상을 자아내는 눈은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은 아빠 닮으면 잘 산다던데, ○○이는 앞으로 잘 살겠다.”
하지만 이미 상처받은 어린 나에게는 와 닿지 않는 말이었으니, 그럴 때마다 의심 가득한 마음으로 투덜거리곤 했다. 아아, 정말 그럴까요? 아빠랑 닮게 태어난 순간, 이미 잘 살고 있지 못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외모 외에 아빠의 손맛도 조금은 닮았다는 것이다. 요리를 그리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만들어 보겠다 시도하면 어찌어찌 내 예상과 비스름한 모양과 맛을 내는 음식을 해내곤 했다. 결혼 후 아빠의 레시피를 떠올리며 제법 그럴싸하게 사과파이를 구워냈을 때 “사과파이 맛이 난다”며 좋아하던 옆자리 분의 환호에 살짝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새로운 음식과의 만남이 점점 뜸해지고 있다. 지구마을 한 가족이 되어 가까운 일본, 중국을 넘어 미국, 유럽 어느 나라의 음식도 편히 맛볼 수 있게 된 환경이 한몫하겠지만, 어느새 고집스레 길들여진 입맛이 새로움을 그리 반기지 않는 탓도 있겠다. 그래도 가끔은 미지와 조우하듯 세상 처음 맛보는 음식을 마주하던 때가 그리워지곤 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촌스럽다는 듯 놀리면서 바라보던 아빠의 표정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어쩌면 가부장적인 B형 남자의 전형이었던 아빠가 가깝게 느껴지던 흔치 않은 순간이어서 더욱 마음에 남은 듯 하다. 아, 아직 시도해 보지 않은 아프리카 음식점이라도 찾아서 아빠랑 같이 가봐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