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 제주살이를 준비하며 (part1. 내 인생의 일탈)
“선배님은 제가 입사할 때 롤 모델이셨는데, 퇴사도 롤 모델이 되셨어요!”
후배의 말에 살짝 갸우뚱해진다. 나와는 거의 10년 차가 나는 후배가 나를 롤 모델로 삼았다는 말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건네는 덕담이라 생각하면 될 테지만, 퇴사마저 롤 모델이라하니 갸웃할 수밖에. 하긴 23년을 다닌 회사에 퇴사 의사를 전한 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인가 접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과감히 퇴사하겠다 말한 내가 부럽다 한 사람도 있고, 그저 매일이 반복되며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그 용기가 멋있다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나의 마음과 상황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지 않고 과감히 퇴사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을, 아니 몇 달을 자다가도 깨어 뒤척일 만큼 곱씹어댔으며, 매일 꼬박꼬박 스트레스가 쌓일지언정 매달 따박따박 통장에 월급이 찍히는 이곳을 떠나기 위해 몇 번이고 엑셀 시트를 펼쳐두고 수입과 지출을 맞춰보아야 했던 이야기는 그저 내 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나의 이런 속내를 살짝 보여준 친한 이 중 몇은 그럴꺼면 그냥 조금만 더 버텨보면 어떠냐는 말도 했다. 지금 그만두면 다시 취직하기 너무 어정쩡한 나이라고 걱정해 주기도 했다(안다! 내 나이와 경력을 고려했을 때 그리 매력적인 인재는 아님을!).
“퇴사 이유가 뭐예요?”
당연할 테지만 퇴사하겠다 말했을 때 많은 이들이 물어온 질문이다. 나 역시 동료가 퇴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이, 왜? 무슨 일 있나? 였으니. 그런데 정작 나는 나의 퇴사 이유를 깔끔히 정리해 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퇴사 이유가 뭘까? 결국 나는 사직서에도 ‘일신상의 사유’라는 구태의연한 한 줄을 적었을 따름이다.
누군가는 내게 번아웃이니 잠시 쉬는 게 어떻겠냐 했고, 누군가는 작년 예상치 못했던 인사 발령이 원인이냐 조심스레 물어보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비트코인이 대박을 쳐 50억 정도 자산이 생겼냐, 반문하기도 했다(이 질문을 한 사람에게는 소심하게 50억에서 0이 한참이나 빠진 나의 잔고 50만원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하곤 했다. 딱히 어느 하나가 퇴사의 원인은 아닌 듯하다고. 그저 그간 하나, 하나 쌓여간 것들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선에 이르러 여기까지구나, 이제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다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답을 하기 싫어 애매하게 답하는 것인가 싶었을 수도 있지만 딱 내 마음이 그랬기에 더 이상 뭐라 덧붙일 말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답이 저마다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인지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나의 퇴사 이유 중 다소 황당한 것들이 있어 웃기도 했다)
이제까지 버텼으니 조금만 더 버티라 말하거나 어정쩡하니 이 나이에 나가서 어쩌려는 것이냐, 걱정과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이들과 이야기를 하며, 이 나이니까 그만둘 수 있는 마음이 든 것은 아닐까 생각도 했다. 김민철 작가의 말처럼 이 나이에도 방황을 할 수 있고, 저 나이에도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나이에도 방황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저 나이에도 자신의 감을 믿고 훌쩍 떠나올 수도 있는 거였다. 이 나이라서 정착해야 하고, 그 나이니까 이제는 가정을 꾸려야 하고, 저 나이엔 방황을 끝내야 하고 등등. 숫자에 결부된 수많은 목록들을 나는 얼마나 착실히 수행하며 살았는가. 단 한 번도 모범생이 아닌 적이 없었다. 퇴사와 파리가 인생의 일탈일 정도로. - 김민철 <무정형의 삶> p.63
퇴사를 입 밖에 낸 즈음 읽고 있던 책이 절묘하게도 김민철 작가의 <무정형의 삶>이었는데, 이 책을 선물해 준 분이 내게 건넨 멘트가 압권이었다.
“이 책이 살짝 퇴사를 부르는 책인데, Joy님은 괜찮으시겠죠?”
사실 그때 거의 퇴사를 결심했던 터라 얼마나 뜨끔했었던지.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며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을 얼마나 쌓아갔는지 모른다. 단 한 번도 모범생이 아닌 적이 없었던 작가가 ‘퇴사와 파리’가 자신의 인생 일탈이라 말했을 때 못지않게 모범생이었던 나는 내 인생의 일탈을 ‘퇴사와 제주’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2025년 1월 31일, 몇몇 사람의 아쉬움과 몇몇 사람의 후련함(아마도 속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대부분의 무관심 속에서 나는 23년간 매일매일의 시간을 쌓아온 회사에서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