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카드나 주민증 없는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때 내가 남영역에서 일은 건 지갑도, 길도 아니라, 명함만 한 주민증이나 카드에 불과한 나 자신이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115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나는 항상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학원까지 마쳤으니 한참을 학교라는 틀 안에 놓여 있었고 이후에는 또 오랜 시간 회사에 속해 있어 나를 소개할 때면 ㅇㅇ중학교, ㅇㅇ대학원 또는 ㅇㅇ회사에 다니고 있는 아무개라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게 가닿곤 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일이 생겼을 때, 순간 뭐라 해야 하나 멈칫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내가 속한 곳이 곧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어주었었는데, 지난 1월 퇴사를 했으니 그곳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ㅇㅇ회사에 다녔던 ㅇㅇㅇ입니다” 소개할 수도 없지 않은가. 퇴사(은퇴) 후 자신의 정체성이나 사회적 효용성의 상실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막상 나에 대한 소개에서 머뭇거리게 되니 막연했던 느낌이 현실로 다가왔다.
서울 한복판에서 주민증과 카드가 없으니(게다가 동전 하나 없어 공중전화도 쓰지 못했다는)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며 문득 일주일 전의 내 모습이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이를 만나면 뭐라할지에 대한 생각이 겹쳐졌다.
사회적 소속이나 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오롯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들 하는데, 참 녹록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