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너무나 예쁜 반려견 한 마리가 있다.
이름은 ‘보리’. 미니비숑이며 어느새 여덟 살이 되었다.
처음 보리를 입양한 건 탈모로 힘들어하던 둘째 아이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리의 양육은 대부분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강아지는 한 해에 사람나이로 일곱 살씩 늘어난다고 한다.
그 계산대로라면 보리는 쉰여섯 살. 한마디로 나와 거의 동년배인 셈이다.
미니비숑은 선천적으로 슬개골이 약하다던데, 보리도 예외가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보리의 관절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산책을 나가도 예전처럼 오래 걷지도 못하고 가끔은 절뚝거리기도 한다.
‘보리야, 이리 와!’ 하고 부르면 쏜살같이 뛰어오던 녀석이 이제는 엉덩이 한번 들어 올리는 데도 한참을 고민한다.
힘겹게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아이고, 다리야…” 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잠도 많아지고, 산책을 귀찮아하는 날도 부쩍 늘었다.
한때 매일 보여주던 ‘비숑 지랄타임’도 이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갱년기인 나처럼, 어쩌면 보리도 자신만의 ‘중년’의 세계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는 한결같이 내 곁은 지킨다.
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움직이면 코를 골며 깊은 잠을 자다가도 몸을 털고 함께 일어나고,
내가 피곤해서 눕기라도 하면 잘 놀다가도 어느새 내 옆자리를 파고든다.
어깨 통증에 힘겹게 눈 뜨는 아침, 내 곁에서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자고 있는 보리를 보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위로가 스며든다.
잠들 때도, 청소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외출했다 돌아오는 순간에도 보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를 바라봐준다.
말 한마디 없는 위로가 이토록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가족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내 마음의 굴곡과 피로를 보리는 어쩐지 더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보리와 나는 늙는 속도가 다르다.
보리가 나보다 훨씬 빠르게 늙어 간다.
그래서일까, 보리가 조금만 오래 잠을 자도, 숨을 거칠게 쉬어도, 바닥에서 일어나는 속도가 느리기만 해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런 질문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어느새 내가 보리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갱년기로 몸도 마음도 휘청거리는 날, 가족들은 내 감정을 다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보리는 묻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내 옆에 와서 몸을 붙인다.
어떤 위로보다 포근한 방식으로.
가끔 보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아요. 나는 엄마 편이에요.” 그 눈빛은 어떤 말보다 깊고 따뜻하다.
내가 혼자 여행을 가면 보리는 밤마다 현관 앞에서 내 발소리를 기다린다고 한다.
앞집 문만 닫혀도 벌떡 일어나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작은 몸 안에 담긴 사랑과 충성심이 벅차올라
말문이 잠시 막힌다.
보리는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다.
내 하루를 채우고, 마음의 빈틈을 메우고, 묵묵히 나의 인생을 함께 걸어주는 존재다.
가족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해 주는 진짜 ‘반려자’인 것이다.
앞으로 나는 보리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여러 번 마음 아픈 순간들을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나를 더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말을 하지 못해도 보리가 전하는 위로는 사람의 언어보다 따뜻하고, 보리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 어떤 관계보다 순수하다.
어쩌면 보리와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갱년기를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은 나. 나보다 더 빠르게 나이의 언덕을 오르고 있는 보리.
그 변화 앞에서 우리 둘은 서로의 옆자리를 지켜주며 조용히 함께 버티고 있는 것이다.
속도는 느려져도,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온기는 그 어떤 시절보다 더 깊고 따뜻하다.
그러니 괜찮다. 앞으로의 시간도 우리는 이렇게 나란히 걸어가면 된다.
조금 느려도, 조금 아파도, 함께라면 그 또한 삶의 한 장면일 테니까.
엄마의 갱년기에 너가 함게 있어줘서 너무 다행이야.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 보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