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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똥기저귀

by JIPPIL HAN

1997년 겨울.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가족 모두가 지쳐 집에 돌아왔던 그때.

갑자기 멀쩡하시던 할머니가 정신줄을 놓으시더니 선채로 바지에 소변을 보셨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대소변을 못 가리셨고, 기저귀를 시시때때로 갈아드리고 씻겨야 했다.

그 일은 온전히 며느리인 엄마의 몫이었다.


할머니의 딸들.. 그러니까 고모들은 '출가외인'이라는 이름으로, 집에 가끔씩 들러 할머니에게 다 차려진 식사를 떠 먹여 넣어드리는 일이나 하면서 엄마에게 "올캐언니가 고생이 많아요" 하는 인사치레가 전부였다.



"택수한테 다녀와야겠어"

1998년 어느 날 엄마가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하셨다.

맞다. 그건 '선전포고'였다.


'택수'는 나의 오빠다.

오빠는 당시 미국 뉴욕에 있는 고모부 회사에 가서 일을 배우고 있던 중이었다.

미국에 간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엄마의 상태는 요즘말로 완전히 '번아웃'상태였다.

몇 십 년간 시어른들 시집살이와 병간호로 몸과 마음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 하나뿐인 아들까지 미국에 보내놓고 매일 밤 그리워하며 훌쩍거리곤 하셨다.


엄마가 얼마나 오빠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는 언니도 결혼해 출가해 있어 집에 있는 자식이라곤 나 하나인데,

나도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 근무하고 있던 때라 엄마의 '선전포고'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엄마는 우선 세 고모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고모 세 명 중 한 명은 할머니를 돌보겠다고 나서겠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다 한결같았다.

" 언니 미안해요.. 저는 애가 수험생이라 집을 비울 수가 없어요"

" 아니 언니 갑자기 그러시면 당황스럽죠.. 저도 일정이 있는데.."

" 언니 미안해요. 나도 아파서 병원 다녀요 지금."


아니 지금 남의 엄마를 돌봐달라고 했나? 자기네들 엄마잖아!!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안쓰럽게도 엄마는 슬슬 체념하기 시작하더니 미국에 있는 오빠에게 힘없이 전화를 걸었다.


"택수야.. 미안하다. 이번에 엄마가 못 갈 것 같아. 할머니 봐줄 사람이 없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갔다.


"엄마! 내가 볼게. 내가 볼게 할머니!. 오늘 회사에 휴가 낸다고 미리 말씀드렸어."


사실은 회사에 말도 안 한 상태였고 보름이나 되는 긴 휴가를 받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정말 네가 할머니 볼 수 있겠어? 회사에서 그렇게 긴 휴가를 주신대?"


침울하던 엄마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걱정 마. 몸이 아프다고 치료를 좀 길게 받아야 한다고 하고 장기휴가 받기로 했어."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 아~ 뭐라는 거냐.. 내가 할머니를 어떻게 봐.. 회사엔 뭐라고 말할 거냐? 생각이 있는 거냐?'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나는 회사 팀장님께 사정해서 보름간의 병가를 받아냈다.


엄마는 콧노래를 부르시며 반찬을 잔뜩 만들어 놓았고, 곰탕과 국 서너 가지를 냉동실에 넣어놓고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얘기했다.


"고맙다 막내야!! 엄마가 너 안 낳았으면 어떡할 뻔했니? "


'그니까요.. 이렇게 무모한 딸 안 낳았음 어떡할 뻔했어 엄마'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걱정 마시고 오빠랑 회포 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와 엄마! "라고 말했다.


엄마가 없는 15일. 그 15일이 나에게는 15년.. 아니 150년처럼 느껴졌다.


할머니의 식사시중이나 말벗해 드리는 것,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시는 것에 대한 대응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되고 미치겠는 게 할머니의 똥기저귀를 갈아드리는 일이었다.

당시 미혼이던 나는 아기 기저귀도 갈아본 적이 없는데, 할머니의 똥기저귀는 그야말로 난이도 극상의 일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엄마는 전화로 '할머니 괜찮으시니"부터 물어보셨다.


'엄마.. 할머니는 괜찮으시지.. 내가 전혀 괜찮치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걱정도 마시라니까!! 이제 괜히 전화하지 말고. 오빠랑 좋은 시간이나 보내! " 하고 끊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못 견디게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엄마가 그동안 짊어지고 살아온 무게에 대한 안쓰러움과 연민이었다.


엄마는 1960년대 숙명여대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한국은행에 근무했던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그런 엄마가 어쩌다 아빠를 만나 이 가난한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와 수십 년간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 수 있었는지, 도대체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면 그게 가능한지, 그 사랑의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기에 어느 집이나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래서 엄마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왔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보름 만에 엄마가 귀국하던 날, 나는 집에 들어서는 엄마를 꼭 안아드리며 말했다.


“엄마, 오빠 보고 싶으면 언제든 또 말해. 할머니는 내가 볼게.”


다시 또 후회할지도 모를 약속이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엄마는 오빠를 만나고 재충전이 되었는지 한결 활기가 느껴졌고,

웃음을 되찾은 엄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 후로 할머니 돌봄은 엄마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내가 엄마를 도왔고,

고모들이 집에 오면 엄마를 대신해 내가 고모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기기 시작했다.


“큰 고모, 할머니 기저귀 갈아드려야 해요. 엄마잖아.”

"막내고모는 할머니 좀 씻겨주세요."


할머니는 2년 반 만에 할아버지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누구보다 서럽게 울던 이는 할머니의 아들인 아빠도, 딸인 고모들도 아니었다.

며느리인 엄마였다.


장례식 후 후유증으로 엄마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뒤에도, 할머니가 쓰다 남기고 간 기저귀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에게 할머니의 기저귀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시부모님과 함께한 세월의 무게이자, 그리움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ChatGPT Image 2025년 9월 4일 오전 11_29_12.png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 되어버린 기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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