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우리 집에는 통금 시간이 있었다.
밤 10시.
친구들이 한창 모여 놀 시간에도 나는 늘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친구들은 ‘10시 신데렐라’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연애를 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연애를 하는 기미만 보여도 더 철저히 단속하셨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외박은 당연히 금지였다. 나는 그 규칙을 지켰다.
“혼전순결!”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었다.
나는 남편과 5년간의 연애 시절에도 끝까지 혼전순결을 지키고 결혼했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대체로 엄격하긴 했지만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단속이 심했던 것 같다.
엄마는 특히 여자의 혼전순결을 강조하셨고 나는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면서도, 딱히 큰 반항 없이 그 규칙 안에서 자랐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고 엄마와 아빠, 나 이렇게 셋이서 등산을 할 기회가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손두부집에서 우리는 '두부전골과 막걸리'를 시켰다.
술을 전혀 못하시던 엄마가 목이 말랐는지 “막걸리 한 잔만 따라 봐” 하시며 잔을 비웠다.
나는 놀랐고, 엄마는 조금 취한 듯했지만 기분은 좋아 보이셨다.
그런데 잠시 후 엄마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툭 튀어나왔다.
“에휴, 그때 내가 뱃속에 미연이만 없었으면…”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미연’은 우리 삼 남매 중 첫째였다.
아빠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셨고 엄마는 그제야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신 건지 이야기를 중단했다.
사실 부모님이 속도위반을 숨기신 적은 없었다.
다만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들을 기회도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자식들에게 그토록 혼전순결을 강조하시던 엄마가 사실은 ‘속도위반’이었다니.
실망스럽다고 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다시는 꺼낸 적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조금씩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마 그 시절 엄마는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인해 서둘러 시집을 가야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젊은 나이부터 고된 시집살이를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 힘든 시간을 지나오면서 엄마는 마음속으로 다짐하셨을 것이다.
‘내 아이들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
엄마가 그토록 혼전순결을 강조하신 건 단순한 고지식함이 아니라 자식들을 지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엄마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나는 생각한다.
그때 엄마가 '혼전순결'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세상을 가르쳐 주셨더라면
내 젊은 날도 조금은 더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