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의 나이는 쉰둘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늦게 얻은 딸이 국민학교 들어가는 건 보고 죽을 수 있으려나 늘 걱정을 했다고 했다. 내가 국민학교 입학하던 날 아버지는 당신의 걱정과 달리 나를 데리고 학교 운동장에 서 계셨었다.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되던 해 환갑을 맞이하셨다. 내 나이 열 살이었고, 친구들의 아버지들은 막 40대에 들어섰던 때였다. 오빠들은 양복을, 언니들은 한복을 맞춰 입고 아버지 앞에 차려진 환갑상에 절을 하고 술을 따랐다. 나는 빨간색 슈트에 회색 바지를 입고 절을 올리며 술을 따랐다. 사람들이 막둥이가 따르는 술이라면서 손뼉을 쳐주었다.
아버지의 나이는 탁상시계의 초침처럼 쉼 없이 나이를 향해 움직였고 나 역시 내 나름의 시간에 맞춰 스물, 서른, 마흔을 향해 내달렸다. 국민학교 입학하는 거나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그 막내딸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아버지는 고된 노동과 궁핍한 살림, 그리고 8남매의 자식들이 경쟁하듯 쏟아내는 소설 같은 인생들을 읽어가며 칠순, 팔순, 구순을 넘기고 있었다.
아버지 나이 아흔여섯 되던 해 자식들은 평생 벌어 마련한 아버지의 시골집을 귀농을 준비하는 도시의 한 부부에게 팔았다. 요양원에 가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계약이 이루어지던 날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부동산에 나와 계약서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본 후 안주머니에서 인감도장을 꺼냈다. 평생을 갖고 있었던 집 한 채가 요양원 비용과 맞바꿔지던 날이었다. 두 달 후 아버지는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요양원은 아버지 인생에 있어 세 번째 거처인 셈이었고, 마지막 거처였다.
요양원으로 향하던 그날을 난 기억 한다.
배꽃이 하얗게 피던 봄이었다.
배나무가 늘어선 농장을 지나 요양원에 가시던 아버지는 차 안에서 계속 멀미를 하셨고, 나는 조금 있으면 도착할 테니 참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요양원 생활이 마땅찮았는지 면회를 갈 때마다 "집에 그냥 살았어도 됐었는데…."라며 중얼거리셨다. 그럴 때마다 난 "아버지 밥은 누가 해주게요"라며 통박을 해주었다. 그랬다. 자식이 여덟이어도 밥 해줄 자식 하나 없었다. 밥이라도 따습게 해 줄 테니 우리 집에 오시라는 자식은 더더욱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자식들을 위해 새벽마다 일어나 기도를 했고 특히 냉담한 막내딸인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점점 요양원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듯했다. 손목시계가 고장 났으니 시계를 좀 고쳐다 달라고도 하셨고, 가려움증이 심하니 약을 지어 보내라고도 하셨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놈의 무릎이 아픈 게 큰일이라고. 당신 건강엔 오직 무릎 관절 불편한 거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의 나이가 아흔아홉 되던 해 아버지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병원에 한 번만 가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못해 병원에 모시고 갔었는데 의사가 폐암이라고 했다. 대개는 암 진단을 받으면 의사에게 진짜냐고 묻고, 따지고, 슬퍼하던데 나는 이 나이에도 암이 생길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 사람이 아흔아홉 살까지 사는 게 예사도 아니거니와 설령 예사라 한다 해도 암이 발견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가 놀라울 뿐이었다. 사람의 수명이 일정 기간을 넘기면서까지 연장이 되면 마치 나무에 옹이가 생기는 것처럼 그 몸에 굳은살이 박이고 그것이 암이 되는 건가 혼자서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이제 와서 암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제 역할이나 하겠나 싶었다. 노쇠한 몸에 붙은 노쇠한 암 덩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소멸할. 그런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두 시간 전까지 그 암 덩이와 싸웠다. 뜨지 못하는 눈에 계속 눈물이 고였고, 다리엔 경련이 일었다. 그럴 때마다 의사는 모르핀을 놓았고, 또 모르핀을 놓았고, 또 모르핀을 놓았다. 3.1 운동 백 주년, 대한민국 건국 백 주년이라고 세상이 시끌벅적 떠들던 그해 1919년 생이신 나의 아버지 베네딕도는 마지막 모르핀을 맞은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모든 의식이 멎었고, 그와 함께 암 덩이도 더 이상의 패악질을 하지 않았다. 백 년의 세월이, 백번의 사계가 흐른 뒤였다.
"베네딕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기도 소리는 그를 떠난 보낸 축하 메시지 같았다. 날도 맑고 바람도 좋은 날 정말 좋은 날 골라서 잘 가셨다고 다들 그렇게 덕담 같은 인사를 나누었다. 이승의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치른 2박 3일간의 의식이 끝나고 아버지는 당신이 처음 오던 그 길로 다시 돌아갔다. 요양원에 처음 들어가던 그날처럼 배꽃이 하얗게 피던 봄날이었다. 꽃잎이 한 장이라도 날리면 눈물이 후드득 쏟아질지도 몰라 애써 외면했다. 해마다 배꽃이 피면 오늘이 생각날 거 같기도 했다. 장하게 살다 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배웅 길을 눈물로 보낼 수 없었다. 좋은 날 떠나는 소풍 길을 웃으며 보내드리고 싶었다.
"베네딕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버지가 떠나고 그 봄이 떠나고,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했다. 다시 봄. 배꽃이 피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가던 그 길의 배꽃이 생각날까, 혹시라도 그 길이 생각나면 어쩌나 싶었는데 막상 쳐다본 배꽃은 아버지가 떠나던 그 길의 배꽃이 아닌 아버지가 요양원에 처음으로 들어가시던 그 길의 배꽃이었다. 운구차에서도 울지 않았던 눈물이 수만 장의 꽃잎처럼 얼굴위로 흐드러졌다. 나는 왜 아버지를 모시고 그 길을 따라 요양원으로 향했을까. 그날 아버지의 멀미처럼 배꽃 멀미가 일기 시작한다. 나는 왜 아버지를 모시고 그 길을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