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21화

3부 「TRICK OR TRIP」 ①

by 윤아무개

아직도 가끔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현실감을 잃는다.


이영민은 펍 <올 나이트> 사장이다. 강민열은 이혼전문 변호사다. 김성우는 종합병원 외과의고, 박주경은 은행원이고, 정승주는 헤어디자이너고, 박재승은 외제차 딜러다. 안현근은 포토그래퍼, 이성훈은 앱 디자이너, 이하영은 전략 컨설턴트, 윤재민은 호텔리어, 양지섭은 플로리스트, 이세현은 보험설계사, 서동준은 소설가다. 아니다, 이건 뺐다. 최창연은 출판사 마케터다. 서동준은 미술관 큐레이터다.

이들 중 절반은 N의 이름이고 나머지는 나의 이름이다.

초고층 호텔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다. 강변 위로 굽이도는 고가도로의 가로등이 야경의 부속품들을 비춘다. 검은 강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오히려 두껍게만 보였고, 꼭 이 호텔을 경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성급들 중에도 최고라 꼽힌다는 호텔 VIP 룸이라며 뻐기던 남자가 자못 이해된다. 환히 빛나는 도시의 불빛 위로 손을 뻗어 한줌에 쥐어 본다. 사업이 망하고 폐인으로 살던 일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 지나온 나날들이 어둠을 머금은 강물처럼 새카맣게 느껴진다. 등 뒤에서 N이 남자의 질문공세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이 들린다. 아니다. 그는 N이 아니라 심리학과 대학교수인 이서진이다. 지금은 그렇다. 나도 돌아서서 그들의 대화를 경청한다.

“그래서, 총장인 아버지 힘으로 교수직을 따냈다?” 남자가 얼음을 채운 온더록스 잔 셋에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망나니 아들이라도 번듯한 자리 하난 꿰차고 있어야 당신 체면이 서니까.”

“에이, 요즘 세상에 그러면 되나?”

“대단한 대학이라면 또 몰라. 반도 한구석에 짜부라진 교수직 하나 슬쩍했다고 누가 신경이나 씁니까? 애들도 지들 인생 좆망한 거 알고 들어오는 덴데.”

“요즘 애들 만만찮잖아.”

서진이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고 술잔을 들었다. “몇 살 차이 안 나니까 술 사주고 형 동생하면 만사 오케이죠.”

“그래도 한번 문제 삼으면 골치 아플 텐데. 막, 그런 거 있잖아, 인사비리 척결! 그런 문구 박힌 피켓 들고 시위하고.”

“나사 빠진 엘리트들이나 그러는 거지, 여긴 죄다 빡대가리들이라니까. 다들 대학 간다니까 덩달아 어영부영 기어들어온 놈들한테 생각이란 게 있겠어요?”

“멘트에 빠꾸가 없네.” 남자가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형철 씨도 와서 한잔해요. 친구 입이 시한폭탄이야.”

미술품 경매사 오형철. 그게 오늘 나의 이름이다. 나는 소파를 빙 둘러가서 테이블 위 술잔을 들었다. “그래서 늘 곁에 두고 감시하죠.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다짐도 하고.” 술을 몇 모금 마시고 얼음 한 조각을 요란하게 씹어댔다.

“왜 또 까칠하실까?” 서진이 위스키를 원샷했다.

“말조심해. 그놈의 세치 혀 경매에 내다 팔리지 말고.”

“그럼 최고가 경신하려나?”

“내정가에도 못 미칠걸.”

“자자, 그만들하고.” 남자가 보랏빛 넥타이핀을 뽑아 테이블에 툭 놓았다. 그는 질감이 좋아 보이는 넥타이를 쓸어내면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형철 씨, 매물 좋은 거 들어오면 좀 알려줘요. 아버지가 그런 거에 환장하거든. 고흐, 뭉크 그런 거. 난 별로던데.”

“그런 대가들의 작품은 잘 안 들어오죠. 근데 그런 그림들 안 좋아하세요?”

“좀 이상하잖아. 기분 우울해지고.”

“그렇죠.”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특히 고흐 그림은 보면 괜히 정신없고 불안해진다랄까. 안 그래요?”

“근데 그 사람 그림이 제일 비싸다면서요?”

“1990년 당시 경매 최고가를 달성했죠. 피카소가 그걸 깼지만.”

“피카소 그 양반도 작품이 이상하던데.”

남자가 시가 박스를 꺼내며 내게 한 대 피워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남자는 시가를 커팅한 뒤 서진에게도 한 대 권했다. 이런 사람을 만날 줄 알았더라면 형철을 비흡연자로 설정하지 않았을 텐데. 남자가 시가 연기를 풍성하게 뿜어냈다.

“그래도 고흐까지는 이해할 만하지. 인상주의 이후로는 다 미친놈들이잖아. 피카소 보면서 손뼉 치는 게 어디 정상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뜸을 들이며 발뒤꿈치를 살짝 들었다가 놓았다. “사실 현대미술의 물꼬를 튼 게 인상주의입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스타일 탓에 멸시받기 일쑤였죠. 어떤 비평가가 이 그림에서는 빛의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비꼬아 말한 게 인상주의라는 사조의 이름을 남겼죠. 당시 사람들은 인상주의에서 지금 우리가 동시대 미술을 보고 얻는 충격 이상의 충격을 받았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현대 미술사를 다룬 책에서 공부한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읊은 것이었다.

“인상주의가 현대 미술의 시작이다?” 남자가 능글맞게 서진을 돌아봤다. “역시 뭐든 공부를 해야 해. 나같이 무식한 놈들은 소외된다니까.”

“미술관은 외로움이 집약된 공간이죠. 예전에 도슨트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나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대꾸했다. 예정에 없던 대사. 나를 유심히 주시하는 서진의 눈길이 느껴진다. 약간의 흥분과 호기심, 그리고 번뜩이는 냉정함이 서린 눈길.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소외감을 느낀다는 걸 알았어요. 작품과의 교감 혹은 작가와의 유대감과는 상관없이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비주류에 속한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시대가 변하면서 아무리 경계라는 게 모호해진대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죠. 대중예술에 익숙한 사람들은 순수예술이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주류라고들 하고, 순수예술 애호가들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대중예술이 시대의 주류라고 느끼죠. 어쩌면 그렇게나 서로 비아냥대는 이유도 주류에 맞서는 방어기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나 부정적인 견해가 긍정적인 견해보다 힘이 강하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소외되거나 천대받을 때, 자신의 안목 또한 똑같은 평가를 받는다고 느끼는 거지.” 서진이 말을 보탰다. “안목은 대상을 규정하는 동시에 자신을 규정하니까.”

“오, 그래도 공부를 하긴 했나 봐요?” 남자가 서진의 어깨를 툭 쳤다.

“공부했죠, 그럴싸하게 말하는 법을. 월급 받아가면서 수업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되니까.”

“양아치도 노력해야 먹고사는구나.” 남자가 감탄했다. “그래서 형철 씨가 보기엔 어디가 주류인가요?”

“저요?”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돈이요.”

“돈?”

“돈과 시장이요.” 나는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지는 몰라도, 무엇이 비싼 예술이 될지는 대략 알죠. 그건 옥션이 만드는 거니까.”

“경매잖아요. 가격은 고객들의 기호로 정해지는 거 아닌가?”

“맞죠. 그런데 경매 대상 물품을 선정하는 건 누구일까요?”

“오호라.” 남자가 새 위스키 병을 땄다.

“고흐 같은 위인이야 손쓸 도리가 없지만,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 작품은 저희가 보여드리는 게 주류가 되죠.”

“확실히 형철 씨는 그림보다 숫자랑 더 친하신 것 같네.”

남자가 다시 건배를 청했다. 그때 천장에서 실링팬이 와다다닥거리며 한 뼘 정도 주저앉았다.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술잔을 자기 옷에 엎었다. “이런 씨발.” 실링팬은 기울어진 채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다들 몇 걸음 떨어졌다. 남자가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천장에 이거 뭐야, 돌아가는 거 내려앉았으니까 빨리 사람 보내요. 방을 바꾸든가. 뭐냐고? 그 씨발, 아까 말했잖아, 천장에 돌아가는 거, 프로펠러같이 생긴 거.”

서진이 나를 보며 출입구 쪽으로 엄지를 빠르게 까딱였다. “실링팬.”

“그래, 실링팬. 씨발, 떼버리든가 해요. 손님들 왔는데 이게 무슨 민폐야.”

우리는 괜찮다고, 이제 가 봐야 한다고 했다. 남자가 수화기에서 귀를 떼며 왜 벌써 가느냐고 당황해했다. 그리고는 송화구에 대고 니들 때문에 간다지 않느냐며 쌍욕을 해댔다. 나는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콜택시를 예약하고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유리창의 근사한 야경 위로 기울어진 실링팬이 불투명하게 비쳤다. 남자가 멋쩍은지 수화기로 머리를 긁적이다 털썩 전화를 끊었다. 그는 미안하다며 진짜 갈 거냐고 물었다. 서진이 내일 아침 일찍 강의가 잡혀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휴강해요. 양아치 근성 한 번 더 발휘해 주시죠.” 남자가 졸랐다.

“벌써 한 주를 통째로 휴강해서요.”

“역시.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남자는 우리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즐거웠어요.”

우리도 그렇다고 했다. 남자가 와이셔츠 가슴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아까 저녁자리에서 우리가 건넨 명함이었다. “연락할게요.”

“그래요, 또 봅시다.”

우리는 온화한 조명이 달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백날 연락해 봐라, 나는 벽면에 달린 손잡이에 걸터앉으며 생각했다. N이 나를 힐끗 보더니 길게 하품했다. 엘리베이터는 오래 내려갔다.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정돈했다. 멀끔한 얼굴이 아직 간혹 생경하게 느껴졌다.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들, 사무실을 빼던 날의 좌절감과 장례식장 앞에서의 망설임, 그 이후의 지독한 나날들. 그때의 기억도 지금의 생활도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N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로 연락이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할 엄두는 못 냈다. 불 꺼진 자취방에 혼자 남은 나는 드디어 미쳤다. 드디어였다. N과의 사업 재개는 튼튼한 활주로를 깐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이후의 나날들은 난기류를 만난 것 마냥 불안정했다. 수년간 쓸모와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지속했던 폭주는 나에게도 부담이었다. 성공과 영광을 향해 질주하면서도 내심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나자빠지길 바라는 아이러니한 마음이 들었다. 양극으로 치닫는 바람은 한쪽으로는 간절하게, 다른 한쪽으로는 처절하게 깊어졌다. 술과 불면, 과로로 뒤섞인 나날 속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겨우 참고 참으며 버텨온 과정이 무색하게 사업은 망했다. 후련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렇다고 황폐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이다.

기억은 영화처럼 재생된다.

줄곧 무너져 있던 나날을 촬영이라도 한 듯, 기억을 재생할 때마다 내가 나를 본다.

모로 누운 채 잠에서 깨고는 했다. 벽을 향한 채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온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않고서 자고, 자고, 또 잤다. 행복한 꿈에서 깨면 처량한 나를 저주하며 다시 잠들었고, 악몽을 꾸고 나면 악몽보다 위험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다시 잠들었다. 일에 몰두하던 시기의 반동처럼 빠져든 수면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질릴 만큼 무기력했다. 그러나 책임질 게 없는 꿈속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다. 자다 자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할 때면 벽과 천장의 무늬를 오래 쳐다봤다. 패턴이 주는 안정감과 지루함을 곱씹다보면 어느새 또 잠들었다. 잠들지 못하면 술을 마셨다. 공복에 맥주 두 캔이면 배앓이도 없이 속이 든든하다는 기막힌 깨달음에 술이 더 늘었다. 처음 며칠만 괜찮았다. 갉아내는 뱃속에 힘들어하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생활은 가벼워지고 삶은 더없이 우스워졌다. 돈이 떨어져 가는데 아르바이트도 취업도 나 몰라라 했다.

이따위가 세상이라고? 이게 인생이라고? 나의 삶도 나라는 존재 자체도 죄다 가짜 같았다. 현실이 이따위일 리 없다. 조악하게 조립된 세트장 같았다.

고립된 시간은 포일처럼 힘없이 구겨졌다. 불편한 연락들이 부재중으로 쌓였고, 방전된 휴대폰을 방치한 날도 많았다. 저걸 다 어쩌지. 그런 와중에도 빌어먹을 낙관의 잎은 나를 새파랗게 농락하고 모욕했다. 뭐 어찌저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속삭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여전히 나는 아주 잘살 거라고, 아직 세상이 가치를 몰라주는 거라고, 몹시 유능하고 유명하며 탁월한 사람이 될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올이 뜯어지도록 셔츠를 잡아 뜯고 가슴팍에 선명한 생채기가 날 때까지 할퀴어댔다. 낙관의 잎을 쥐어뜯고 갈가리 찢어버려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잎은 여전히 살아남아 환히 빛났고, 나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대여섯 달이 지났다. 허기를 견디지 못할 때만 먹던 음식들도 다 떨어졌다. 월세는 보증금에서 깎여나갔고 집주인과 관리인의 눈을 피해 새벽에나 하던 장보기도 돈이 떨어져 관뒀다. 한날은 종일 책장을 노려보다가 꽂혀 있던 책들 전부를 꺼냈다. 도스토예프스키, 세르반테스, 피츠제럴드, 푸코, 헤밍웨이, 카뮈, 손택, 울프, 아렌트, 치버, 카버, 챈들러 등등. 책들을 작은 상자들에 소분해 담았다. 『재능있는 리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책은 N의 칸에 다시 꽂아두었다. 책들을 몽땅 팔아치웠지만 사나흘 먹을 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굶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나는 방바닥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집주인의 목소리. 며칠 전 새벽에 장을 보러 나가다 문 앞에 세금고지서가 흩뿌려져 있던 걸 기억한다. 소리 없이 웃으며 눈을 감는다.

결국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알았다. 그러지 않으려 버텼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휴대폰을 충전하고 필요한 짐들만 간단히 보스턴백에 챙겨 건물을 나섰다. 모두의 눈을 피한 새벽 세 시의 야반도주였다.

N이 다니던 대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십사 시간 운영하는 도서관 로비에는 커다란 원목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학생증을 잃어버린 학생들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졸업생들이 공부하는 곳이었고, 나 같은 인근 주민들도 드나들 수 있었다. 도서관 일층 회전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명의 젊은 학생과 나이가 지긋한 여자 한 명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흘긋 보고는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나는 구석에 앉아 헌책방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눈에 힘을 주었지만 한두 문장도 제대로 읽기 힘들었다. 글자가 눈과 뇌 사이에서 빙빙 돌다 튕겨나가는 기분이었다. 히터는 약했고 회전문에서 새어드는 찬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기진 배를 진정시키는 데 모든 집중력을 빼앗겼다. 도서관에 얼마 없는 인원 모두가 내 위장을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결국 한 시간도 못 있고 줄행랑쳤다.

도서관 앞 벤치에 보스턴백을 던져두고 주린 배를 주먹으로 쳤다. 화단 너머로 사무실이 있던 산학협력관이 보였다. 코를 훌쩍이며 N과 후배들, 포니테일을 생각했다. 모두들 보고 싶었다. 우리가 쓰던 사무실이 아직 비어 있을지 궁금했다. 감상적으로 떠올린 생각은 혹시 비어 있다면 잠깐 추위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사한 마음으로 번졌다. 그러다 산학협력관 주차장에서 손전등을 든 경비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이유 없이 도망쳤다.

학교 밖으로 무작정 걸었다. 심야의 왕복 팔차로로 몇 없는 차들이 과속을 하며 지나갔다. 어둠도 추위도 제 본분을 다하는 겨울밤이었다. 나는 언젠가처럼 파티장 한가운데 떨어진 새파란 무가 된 기분이었다. 나의 병명이자 죄목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목을 내리쳤다. 사회 부적응이 아니라 사회 부적격. 사회 부적격. 안다. 일어서야 한다는 걸. 늦은 나이가 아니고, 설사 좀 늦었을지라도 세상에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맨살로 세상에 부딪치지 못하는 새끼. 어깨에 멘 보스턴백이 자꾸 무거워지는 듯했고 다리는 옥죄듯 아파왔다. 점점이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 꼭 눈물에 담겨 있는 것처럼 영롱했다. 칼바람이 얼굴에 생채기를 낼 듯 불어왔다. 입김을 앞세워 한참을 걷던 나는 불현듯 멈춰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입김이 손바닥과 얼굴 사이를 메웠다. 잠시간 그러고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숨을 거세게 몰아쉬며, 발을 쾅쾅 내딛으며 한참을 걸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현관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들어서서 방바닥에 짐을 팽개쳤다. 그리고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노숙을 결심한 지 서너 시간 만에 돌아온 것도 쪽팔렸고, 길바닥에 나앉지도 못하는 빌어먹을 몸뚱어리도 원망스러웠다. 살다 살다 노숙자들을 동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면 알수록 나약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진절머리 났다.

맨바닥에서 눈을 뜬 건 휴대폰 벨소리를 듣고서였다. 집주인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 쌓이도록 받지 않았다. 평소라면 문자 메시지를 남길 텐데 집주인은 계속 전화를 걸었다. 잇따라 걸려온 네 번째 전화에는 왠지 받을 마음이 생겼다. 왜 이제야 받느냐고 욕이나 한 바가지 먹을 각오였는데 웬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같이 살던 청년이 밀린 월세들 다 채워 넣었어. 방 빼고 보증금은 학생 통장에 넣어주라고 하니까 계좌번호 보내. 일주일이면 짐 뺄 수 있겠지?”

나는 엉겁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상황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다가 N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응, 하고 여느 때처럼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나, 어디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