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신의 장난감」
장대비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우산도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검은 양복 차림으로 좁은 차양 아래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가 말썽을 부려 담뱃불 붙이기가 더뎠다.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는 텅텅비어의 저주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망원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그곳으로 부른 게 아닐까.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매몰될 만큼 나는 유치하게 원망의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사무실 이전과 무리한 대출로 리스크가 커진 것도, 빌어먹을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거센 비바람에 담배가 점점이 젖었다. 담배를 손안에서 으스러뜨리고 라이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N도 포니테일도 모두 나를 떠났다. 여름 끝물의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천천히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일이 터진 것은 사무실을 이전하고 서너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는 평소처럼 성실히 일했다. N은 잦은 외근에 걸맞은 커다란 성과들을 냈고 후배들도 자기 몫을 해냈다. 어느 정도 손발이 잘 맞게 돌아가는 사무실을 보자 슬슬 채용공고를 올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일의 성취로 나의 삶을 규정할 때였다. 조금씩 사업의 규모를 키우며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 자아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채용공고를 올린 지 얼마 안 된 월요일이었다. N은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웠고 후배들은 학교에 가 있었다. 나는 혼자 사무실에서 입사지원자들의 서류를 검토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N이 다급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포니테일도 함께였다.
“뭐야? 출장은 어쩌고?”
“투자자들, 죄다 빠져나가고 있어.”
“뭐?”
“우리 다 손절 당했다고.”
N이 심각한 얼굴로 휴대폰을 건넸다. 기사에는 우리가 사업 자체로 내세운 아이템과 비슷한 아이디어를 대기업에서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냈다고 적혀 있었다. 포니테일도 입술을 깨물었다.
“다들 그쪽에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 같아. 알아보니까 빠진 투자자들 중 대부분이 그쪽이랑 손잡았더라.”
“이런 씨발.” 나는 휴대폰을 다시 건네줬다. “남은 투자자들은? 얼마나 되는데?”
“손에 꼽아. 그마저도 계속 남아있을지 장담 못 해. 리드 투자자였던 홀딩스가 빠지면서 줄줄이 다 나가고 있어.”
나는 소파에 앉아 머리를 감쌌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모두가 빠져나갈 수 있지?
“이 프로젝트 기획자가 누군지 알아?”
포니테일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름을 듣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빌어먹을 포마드 새끼였다.
“기획시점을 보면 행사 깽판 났을 때랑 거의 들어맞아.” 포니테일이 덧붙였다.
“아니, 아니.” 나는 진정하려 숨을 몰아쉬고 N을 쳐다봤다. 이를 악물었다. 나도 모르는 새 언성이 높아졌다. “괜찮을 거라며?”
N의 눈길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도 할 말을 애써 참는 눈치였다. 녀석이 담배를 꺼내 물었고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개새끼,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하지.” 내가 중얼거렸다.
포니테일이 이마를 짚고서 입을 열었다.
“둘 다 진정해. 그 인간이 앙심 품고 달려들었다고 해도 투자자들까지 동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그래.” N이 담뱃불을 붙였다. “애초에 계산이 빠른 바닥이야. 수익 창출할 가능성이 떨어지면 그대로 아웃이라고.”
“그래도 삼 년째 우리랑 일하는데 하루아침에 등 돌리는 게 말이 돼?”
“상대가 거물이잖아. 대기업. 그리고 삼 년? 아마 그쪽이랑은 이십 년도 더됐을걸. 이대로 가면 진행하던 건들도 올 스톱이야.”
나는 창가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다가 주먹을 쥐고 내리쳤다. 그리고 N을 향해 섰다.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지. 애들이랑 얘기해 봤어?”
“아직.”
“일단 애들한테 남은 투자자들이랑 연락하라 하고, 정부지원이든 뭐든 당장 지원받을 수 있는 루트 알아보라고 하자.”
“그래. 나는 손절한 투자자들 만나서 직접 설득해볼게.” N이 말했다.
나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 예산을 다시 책정해보고 새로운 스폰서십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N이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다 송화구를 막고 말했다. “일단 채용공고부터 내려야 해.”
“나도 도울 방법을 찾아볼게. 재단에서 힘을 쓸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말없이 포니테일을 보았다. 그럴 필요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책상으로 돌아가 입사지원서들을 문서 세단기에 넣고 갈았다. 더 까불어 보라니. 개자식 머리통에 접시나 처박는 게 무슨 통쾌한 일이라고. 손이 떨렸다.
그날부터 사무실은 불길이 꺼지지 않는 수십 일 간의 화재현장처럼 변했다. 모두가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포니테일까지 발 벗고 나섰지만 도무지 방도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화마가 시간을 집어삼킬수록 분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졌다. 열심과 최선의 결과가 황망히 타들어가는 것을 두 눈 뜨고 바라만 봐야 했다.
“뺏어먹을 게 없어서 스타트업 기획을 가로채? 아이디어 표절 같은 걸로 걸고넘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후배들 역시 분개했다.
“힘들어. 우리가 무슨 특허 출원을 한 것도 아니고.” N이 잘라 말했다.
“제기랄. 투자사들까지 저래도 되는 거예요?”
“닥치고 있는 게 나아. 괜히 심기 건드렸다가 이전에 투자한 금액들까지 반환소송 걸면 피 보는 건 우리야.”
“반환이라니 말도 안 되죠. 대출도 아니고 투잔데.”
“천운이 따라서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고 쳐. 그동안에 소송비용이랑 사업자금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소송도 걸린 마당에 다른 투자자들을 모을 수 있을 거 같아?”
사실 투자가 막힌 데는 빌어먹을 포마드의 횡포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맘때쯤 주식시장에 터진 커다란 사건들이 사업 타격에 큰 몫을 했다. 각 분야에서 견고한 입지를 갖춘 중견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사건의 진상이 파악되기 전까지 거의 모든 업계의 주식이 요동쳤다. 포니테일이 연결해 준 세무사가 주식 판도를 설명해 줬지만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다. 나는 머리 쓰는 걸 좋아하고 어느 수준까지는 남들보다 의욕적으로 머리를 굴리지만, 어떤 한계점에 다다르면 과부하가 걸려 그대로 멈춰버렸다. 안 그래도 과로와 과음으로 무리가 가던 머리는 투자자가 빠지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멈춰 버렸다.
우리를 덮친 화염은 더 이상 태울 게 없을 때까지 활활 타올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 꿈꿨던 모든 것들이 칼날처럼 가슴에 꽂혔다. 금의환향이 코앞일지 모른다고 여겼던 나날과 남몰래 꿈꿔왔던 포니테일과의 미래가 희부연 재로 부서져 내렸다. 수치심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간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과정을 포니테일이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참을 수 없이 끔찍했다. 그의 시선을 거두고 싶었고 그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방도를 찾으려 동분서주하고 분개를 쏟아내던 시기마저 지나가 버렸을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잔열과 같은 숨 막히는 적막과 시간의 재뿐이었다. 몇 달을 더 버티던 우리는 결국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당장 이윤이 안 나도 일은 계속할 수 있잖아요. 원래 사업이 그래요.” 후배들은 머리를 싸매고 말을 더듬었다. “다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굴러가는 거잖아요. 잘 아시면서.”
“상대가 대기업이야. 전망이 없어.” 내가 말했다.
“가망도 없지.” N도 거들었다.
후배 한 명이 분을 못 이겨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쓰레기통이 엎어지며 빈 일회용 커피용기들이 나뒹굴었다.
“형들 믿고 지금까지 따라왔는데 우린 어떡해요? 대표들이 책임을 져야지, 접고 내뺄 생각만 해요?”
“미안하다.” 나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숙여 깍지 낀 양손을 바라보았다.
“듣기 싫어요.” 후배가 의자에 걸쳐둔 옷을 채갔다. “사과가 아니라 대책을 내놔야지.”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남은 후배가 죄송하다며, 저 녀석도 나름대로 사업에 목숨 걸었던 놈이라 저런다고 했다. 나는 안다고, 괜찮다고 했다. 나뒹구는 일회용 커피용기처럼 투명하고 텅 빈 말이었다. N은 포마드와의 갈등에 대해 후배들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모두 나 때문에 망했음이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챈 N의 배려였다.
결국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얼마 뒤, 후배들에게 마지막 자금 전부를 나눠줬다. 서둘러 일을 접어 미안했지만, 지금 끝내야 그나마 이정도의 돈이라도 쥐여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 터였다. 후배 한 명이 사무실에 와서 자신과 친구의 짐을 정리했다. 쓰레기통을 걷어찼던 후배는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뭐할 거야, 이제?” N이 후배에게 물었다.
“일단…… 졸업해야죠.”
후배는 짐을 챙겨서 사무실을 떠났다. N과 둘만 남은 사무실에 적막만이 감돌았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이제?” N이 물었다.
“며칠 더 있어 보려고. 회생할 방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애들은 그때 다시 데려와도 되고. 너는?”
N은 창가로 가서 난초의 길쭉한 잎을 매만졌다. “나도 여기 있지 뭐.”
“서울 안 가고?”
“거길 내가 왜 가?”
제발 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튀어나와 소스라치게 놀랐다. 녀석이 부모님에게 매달리기라도 하길 바랐나. N이 손가락으로 난초의 잎을 탁 튕겼다.
N이 풀썩 웃었다. “며칠 더 생각해 보자.”
나는 그러자며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N도 몇 달 동안 집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아닌가? 몇 년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자 주변도 돌아보지 않고 일했던 결과가 더 황망하게 느껴졌다.
후배들이 떠나고부터는 부쩍 대화가 줄었다. 내심 N의 부모님의 도움을 바랐지만 터놓고 말할 수 없었다. N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온종일 화이트보드에 과녁을 그려 놓고서, 보드마카를 박스 째 쌓아놓고 다트핀마냥 던지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병째 깡소주를 마셨다.
“무슨 생각해?”
N이 침묵을 깼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미안하다. 그때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N은 말없이 보드마카를 과녁에 던졌다. 한 개. 두 개. 그러다 느닷없는 얘기를 꺼냈다.
“주식시장에 정신없이 휩쓸리다 난파되고 나니까 사회에 몸담고 있었다는 게 느껴지네. 우리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결국 사회라는 바다 위에 있는 쪽배라는 거지.”
나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N이 새 보드마카의 뚜껑을 열어 과녁에 던졌다.
“신체니 나발이니, 다 개소리였어. 어머니가 영광은 일찍 찾아먹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딱 맞네. 내가 너무 나댔어, 뭐라도 된 줄 알고.”
N의 목소리는 자조적으로 가벼웠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보드마카들을 보며 담배를 빨았다. 우리는 어른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며 미미해지고 평범해졌다. 빌어먹을. 그렇게 결국 사회에 섞여 들어가겠지.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이 사무실 앞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서둘러 재떨이에 침을 뱉고 담배를 껐다. 포니테일이었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나는 어정쩡하게 일어서며 포니테일을 맞았다. N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잘 있나 궁금해서. 정부 지원 신청한 건 어떻게 됐어?”
포니테일이 곧장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나는 담배연기를 손으로 휘저었다.
“좀 전에 공지 떴는데 물먹었어. 이젠 해 볼 수 있는 것도 없어.” 내가 대답했다.
“나가리, 나가리.” N이 보드마카 뚜껑을 열며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술병을 들었다가 다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포니테일이 후배 책상 의자를 돌려 우리를 향해 앉았다.
“얘들아.” N이 휴대폰을 응시하며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셨대.”
저릿한 통증이 순간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N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말없이 겉옷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깜짝 놀라 말을 잃은 포니테일도, 공허하게 붙박여 있던 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포니테일이 우리도 함께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가 짐을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넌 가.” 내가 말했다.
“오빠는 안 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건을 놓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불행한 일들은 겹쳐서 일어나는지, 왜 한꺼번에 삶을 덮쳐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책상을 걷어찼다.
“오빠, 진정해.”
“진정?” 나는 문을 가리켰다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감정을 억누르려고 무던히 애썼다. “아니야, 너도 빨리 가.”
포니테일은 말없이 서 있었다. 창밖에서 경적 소리가 짧게 났고 정적이 흘렀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사업도 망하고…… 그래, 며칠 전에라도” 나는 선웃음을 지었다. “사무실 정리했으면 N은 아버지 얼굴이라도 뵀을 텐데.”
“이렇게 될 줄 몰랐잖아.”
“나 때문에…… 아 아니다,” 나는 창가에 놓인 화분을 보고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저 화분 보여? 나만 부모님이랑 척진 거 아니야. N도 마찬가지였어. 애초에 이딴 사업 시작도 말았어야 했는데.”
“진정해. 다 오빠 탓으로 돌릴 필요 없어.”
“내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 나만 아니었으면 N이 아버지 이렇게 보낼 일은 없었어.”
“아니, 선배 아버님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실지 우리가 알 수 있었을 리 없잖아.”
“나도 알아, 다 우연이라는 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도 마음의 짐이 남는 걸 어떡해? 내가 무슨 낯짝으로 N의 어머닐 봬? 멀쩡한 친구를 부모랑 연 끊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뭐 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거야.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난 건 분명하지만, 적어도 선배 아버님의 부고와 오빠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나는 포니테일에게서 등을 돌렸다.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신발끈을 쳐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수년간 손아귀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이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간 사실, 빈손으로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쥐고 있는 게 N과 포니테일의 옷자락이라는 사실이 새삼 징그럽게 느껴졌다. 노력의 성과는 없고 저지른 과오에 비해 대가만 무거운 인생. 그나마 손에 남은 걸 놓치기 싫은 마음과 그마저도 힘껏 내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팽팽하게 맞섰다. 나는 잠시 후 눈물을 몰래 닦고 잠긴 목을 풀려 헛기침했다. 그리고 돌연 연극적인 몸짓으로 소형 냉장고에 다가갔다.
“그래, 그렇지. 사실관계를 아주 잘 따지네.” 나는 차가운 소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그렇게 현명하신 분이 왜 여기 계실까? 되도 않는 사업에 투자해서 그 많은 돈을 다 날려먹고서는 왜 자꾸 찾아와서 얼굴을 디밀어?”
포니테일은 잠시 얼떨떨하게 나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미친놈처럼 지껄였다.
“우리가 미안해하기라도 바라는 거야? 아니면 투자금 다시 토해내라고? 은행에라도 갈까? 이젠 씨발, 대출도 안 해줄 텐데.” 나는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입가를 닦은 뒤 술병으로 그를 가리켰다. “넌 내가 불쌍하지? 너 같은 애가 졸졸 따라다니면 내가 침 질질 흘리면서 좋아할 줄 알았어? 가난한 바보새끼 한 놈 데려다 평강공주 놀이라도 하고 싶었냐?”
“미쳤어?” 포니테일이 눈을 부릅뜨고 날 쳐다봤다.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아, 그렇지. 미안하다야. 받아먹을 건 다 받아 처먹고서 이러면 너도 억울하겠다.” 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적선은 감사한데, 위선은 그만 떨지?”
“오빠야말로 위악 그만 떨어. 나도 더는 못 참아주니까.”
“위악?” 나는 선웃음을 쳤다. “도대체 여긴 왜 왔어? 자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보여 주려고? 너도 난감하겠다. 좋은 사람이고 싶긴 한데 거머리 달고 살 엄두는 안 나고, 응? 그냥 날 탓해. 되먹지도 않은 새끼가 괜한 일 벌였다가 여러 사람 피 봤다고 욕하라고. 자꾸 착한 척, 사람 위하는 척 하지 말고, 역겹게.”
“좆같은 새끼.”
포니테일은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악에 받쳐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일이었다. 포니테일과는 처음부터 글러먹은 사이였다. 살아온 세계는 물론 살아갈 세계마저 판이하게 달랐다. 그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그가 개인적으로 연락해온 순간부터 나는 기쁘고 설렜던 동시에 그가 나를 밟아주길 바랐다. 잔인하리만치 자근자근 짓밟아서 그와의 터무니없는 미래를 꿈꾸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일에 전부를 쏟아야 했으므로 포니테일에게 나눠줄 내가 없었고, 동시에 포니테일에게 어울리지 않는 스스로를 알았기에 일에 전부를 쏟았다. 하지만 포니테일은 나를 밟지 않았다. 치켜세우고 북돋워 주고 응원했다. 그의 선량함은 내가 덮어쓴 불량한 선량함과는 질이 달랐다. 그래서, 아니, 그렇지만 되먹지 못한 나는 포니테일이 챙겨줄수록 더욱 초라해지고 비열해졌다. 과로와 실패를 거듭할수록 나는 비겁해졌고 끝내 관계의 싹을 짓밟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짓밟은 것은 관계의 싹이 아니라 그 싹을 키우던 무고한 손이었다. 빌어먹을 나란 새끼가 또 누군가를 피 흘리게 한 것이다. 관계를 정리하는 방법으로 도망치는 것과 깽판 치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 그게 나다. 쓰레기고, 쓰레기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가 치르는 대가가 억지로나마 납득이 되니까.
“씨발, 나를 잘 아는 게 뭔 소용이야.” 내가 중얼거렸다.
사람과 사안을 파악하는 정확한 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옳은 판단을 하는 머리와 그 판단을 실천하는 몸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확한 눈은 그저 자괴감의 족쇄일 뿐이다. 나는 깡소주를 더 마시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펜 트레이에 놓인 플래티넘 프레지던트를 집어 들었다. 만년필의 뚜껑을 돌려 열고, 그대로 닙을 책상에 힘껏 내리꽂았다.
서울까지 가기는 했다. 터미널 근처에서 산 검은 넥타이를 손에 쥐고 장례식장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돌아섰다.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N도 그의 어머니도 뵐 면목이 없었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걸까. 불행이 삶을 덧칠하고 덧칠하고 또 덧칠하여 본래의 색을 아예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터미널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늘에 비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죄의식과 책임감이 검은 넥타이로 현신해 내 손에 쥐여있는 것 같았다. 넥타이를 안주머니 깊이 찔러 넣고 눈을 감았다. 뜨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윤탐입니다 :)
우선 제 장편소설 『TRICK OR TRIP』을 봐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연재한 20화를 마무리로 『TRICK OR TRIP』 2부도 막을 내렸습니다.
한 가지 말씀 드리자면 2부까지 연재했지만 전체 분량의 반 정도 진행되었다는 사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마지막 3부 역시 기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사실 공지사항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3부 연재에 앞서 보름 간 휴재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휴재 기간 동안 3부 내용을 좀 더 가다듬고 알차게 준비해서
내년 1월 2일에 연재를 다시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작품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이려는 방향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내년 1월, 더 재밌는 3부로 돌아오겠습니다!
많은 기대와 사랑 부탁드리며, 제 작품 읽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평온한 연말 보내시고,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