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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Dec 09.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18화

2부 「비상구」 ③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포마드가 포니테일에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포니테일도 그에게 예의바른 미소를 보였고, N은 그에게 백포도주를 따라주었다. 그들이 몇 잔 기울이는 동안 나는 조용히 식사만 했다. 포마드가 인공지능과 사차산업, 엔에프티가 어쩌고저쩌고 지껄여댔다. 이따금 그는 느끼한 표정으로 포니테일을 몇 초간 응시했는데 그럴 때마다 백포도주를 퍼마실지 병째 대가리에 내리칠지 고민했다.

   “거, 얌전히 좀 드시죠. 옆에서 대화 중인데.”

   포마드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처음엔 나한테 한 말인 줄 몰랐다.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를 원시인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왜 시비지?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공기만 먹는 인간이 아니라면 여기에 나보다 조용히 먹는 사람은 없을 텐데. 냅다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말없이 다시금 식사를 이어나갔다. 포마드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꼬워했다.

   “누구야?” 그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N에게 물었다.

   “저랑 공동대표로 있는 친구예요.”

   “그래?” 포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건넸다. “몰라 뵀네.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얼굴이 많습니다. 대표님은 이런 자리에 잘 안 오신다고 들었는데.”

   그의 기름칠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조소가 배어 있었다. 나는 포크를 거두다 의도치 않게 접시를 긁었다. 기분 나쁜 소리가 짧게 났다. 혀로 마른입술을 축이고 일어나 악수했다.

   “얼굴 없는 대표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그가 말했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되죠. 여기 번듯이 있는데.”

   “자주 보여 주셔야지. N의 친구라면 제 동생이나 다름없죠.”

   나는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 남은 함박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찍어 먹었다. 포마드는 형식적인 친절을 보였지만 동시에 깔보는 태도를 숨길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뷔페 쪽을 건너다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사업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요?” 포마드가 내게 물었다.

   “글쎄요, 뭐. 어렵지 않은 일이 있나요.”

   “그래도 걱정은 없으시겠네. 뒷배들이 워낙 든든해서.” 포마드가 N과 포니테일을 번갈아 눈짓하며 말했다. “이런 백그라운드면 다섯 살짜리 꼬마애가 사업을 한대도 실패하기가 더 어렵지.”

   당장 일어나서 음식을 가지러 가면 된다. 나는 조용히 숨을 길게 내뱉으며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일어나지 않고 있을까. 왜 일어나고 싶지 않을까.

   “만년필 좋아해요?” 포마드가 턱짓으로 내 가슴주머니를 가리켰다. “좀 봐도 될까요?”

   나는 만년필을 꺼내 건넸다. “돌려서 여는 겁니다.”

   “압니다. 플래티넘 프레지던트. 가성비는 좋죠. 그런데 이런 자리에 어울리나?”

   포마드의 얼굴에 비웃음이 비쳤다. 포니테일과 N이 나의 눈치를 살폈다. 서로 다른 표정으로.

   “그럼 뭐가 어울리죠? 몽블랑? 파카?” 내가 물었다.

   그는 만년필을 신중히 살피는 척 뜸을 들이다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안 가져오는 게 어울리죠.” 포마드는 입가를 닦고 구겨둔 냅킨을 집더니 그것으로 만년필을 정성스럽게 감싸서 내 앞에 두었다. “우습잖아요. 과시하는 것도 아니고. 안주머니에 넣어오던가.”

   나는 냅킨에 싸인 만년필을 빤히 보다가 눈동자를 굴려 그를 쏘아봤다. 테이블의 분위기가 긴장으로 경직됐다. 나는 풀썩 미소 지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만년필 좋아하시면 하나 추천해 주시죠.”

   “비싼데.”

   개새끼가.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겠죠.”

   “하긴 뭐.” 포마드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N과 포니테일을 번갈아 보았다. “착하고 돈 많은 친구들이 계시니. 친구들에게 말해줄게요.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제 맛이니까.”

   “제가 또 스포일러를 좋아해서요.”

   그래, 계속 까불어 봐, 나는 생각했다. 그때 포니테일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오빠 정신 퍼뜩 차리게 실장님이 직접 선물해 주세요. 과시해도 될 정도로 비싼 걸로다가.”

   “네?”

   “아니다. 오빠가 경제관념이 좀 없어서,” 포니테일이 손을 뻗어 냅킨으로 감싼 만년필을 가져갔다. “실장님이 선물하시면 금방 잃어버릴 거예요. 가격보다 가치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라. 지금 이 만년필도 그렇고요.” 포니테일이 냅킨을 벗기고 만년필을 살펴보더니, 자신의 소매에 닦아 내 가슴주머니에 꽂아주었다. “이래서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 몰라.”

   “그래서 나랑 같이 하잖아.” N이 씩 웃으며 육회를 입에 집어넣었다.

   사방에서 돌려 까이는데도 뭐가 좋은지 포마드는 호감 어린 눈으로 포니테일을 보더니 내게 말했다. “마음 잘 헤아려 주는 친구들이 있어 좋으시겠습니다.”

   N이 술잔을 비웠다. 나도 엎어져 있는 잔 하나를 바로 세우고 백포도주 병에 손을 뻗었다. N이 먼저 술병을 집어 대신 따라 줬다. 일순간 모든 상황이 한없이 싱겁고 지루하고 따분해졌다. 술 한 잔을 천천히 마셨다. 포마드는 포니테일에게 느글거리는 호감을 표했다. 나는 빈 잔을 내려놓고 말없이 자리를 떴다. 포마드가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N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호구 잡혀 줬으면 굽히는 게 예의 아니냐? 뭘 저리 뻗대?” 나는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며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하늘은 쨍했다. 야외 주차장 구석에 흡연구역이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가까운 경계석에 주저앉았다. 담배연기를 뱉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니발 때와는 달랐다. 우리가 상대하는 이들은 만만한 멍청이들이 아니다. N의 친구라는 특권은 더 넓은 세상에선 유효하지 않았다. 이제껏 감춰왔던 볼품없는 자아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커리어. 사회적 입지. 그것을 다져 홀로 단단하게 설 수밖에 없다.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무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재킷 잘 어울리네요.”

   나는 그를 돌아보았고, 순간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적시타와 창업할 때 한창 끼워달라고 졸라대던 학과 후배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의 앞에 섰다.

   “블레이저야.”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아무튼.” 그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내 담뱃불을 붙여 줬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괜찮아?”

   “거뜬합니다. 사업 잘되신다면서요? 축하해요.”

   그가 담배를 한 개비 꺼내더니 박수를 쳤다.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도 담뱃불을 붙였다.

   “너도 창업했어?”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여기 있겠죠? 선배가 터놓은 길 따라 쭉, 잘 가고 있습니다.”

   묘하게 빈정거리는 그의 말투가 거슬렸다.

   “선배 자퇴한 뒤에 학과에서 뭐라 불리는지 알아요?” 후배가 실없이 웃었다. “미스터 콜럼버스. 어때요? 점령할 만한 신대륙은 발견했어요?”

   “글쎄다.”

   나는 담배꽁초를 떨어뜨리고 밟아 껐다. 자리를 뜨고 싶었다. 눈치 빠른 후배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선배,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시면 안 됐어요.”

   “뭘?”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하긴, 쪽팔리니까 잠수 탔겠지. 이해해요.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돼요.” 그는 몸도 못 가누면서 진지하게 말하려 애썼다. 취기 때문에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더 기분 나빴다. 후배가 말을 이었다. “나 안 끼워줬다고 이러는 거 아녜요. 어차피 망했던 사업 뭔 미련이 있다고. 근데 적어도, 적어도 적시타 선배한테만큼은 그러시면 안 됐어요.”

   “그만하지?”

   “화내는 거예요?”

   “주사 부리려면 다른 데서 부려.”

   “뻔뻔하네.”

   “뭐?”

   “친구가 차려 놓은 밥상 다 차지하니까 좋지?”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지랄이야.” 나는 후배의 멱살을 잡았다. “걔만 일했어? 아니, 걔가 뭘 했는데? 나랑 같이 좆뺑이치다가 망하기밖에 더 했어?”

   “그래서? 한 점 부끄러움 없다?”

   “내가 키운 사업이야. 씨발, 내 전부를 갈아 넣고 키운 내 사업이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해야겠지. 도둑놈새끼.” 후배가 비웃었다. “도대체 해야 할 땐 아무것도 안 하다가, 뒤늦게야 두 팔 걷어붙이는 이유가 뭐예요? 그게 친구 뒤통수 때리는 건 줄 몰랐던 것도 아닐 텐데.”

   “뭐, 해야 할 땐 아무것도 안 해?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이거 봐, 끝까지 자기 잘못은 없지. 어른들 말씀 틀린 게 없다니까? 세상에 믿을 새끼 하나도 없어.”

   돌연 손에 힘이 빠졌다. 그런 애들 싫어. 어른들 말이 옳다는 걸 몸소 증명하잖아. 나는 그의 멱살을 쥔 손으로 가슴팍을 밀치고 지나갔다. 몸에 열이 올랐다. 뒤에서 후배가 소리쳤다.

   “같이 있던 분 여자친구 아니에요? 빨리 가 봐요. 아까 합석한 인간, 취하면 손버릇 고약하다고 유명하던데.”

   나는 그 말에 후배를 한번 돌아보고는 지하 강당으로 향했다. 저절로 점점 걸음이 빨라져 지하에 도착했을 때는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강당은 아직 식사 중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 테이블에는 N과 포마드만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포니테일은 강당에 없는 듯했다. 포마드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이, 동생! 스테이크 좀 내오지?” 그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주변에 있는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포마드는 그새 거나하게 취해 있었고 N은 그를 벌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놈이 스테이크를 빨리 가져오라고 고성으로 재촉했다. 나는 알겠다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새 접시에 함박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천천히 가득 담았다. 곧이어 조심히 포마드에게 다가가다 실수인 척 발을 헛디뎌 놈의 정수리에 접시를 냅다 엎었다.

   “이런 씨발!” 포마드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죄송해요.” 나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사과했다. “발을 헛디뎌서, 정말 죄송합니다.”

   포마드의 머리와 목덜미, 상의가 음식물로 엉망이었다. 깨진 접시와 함박스테이크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N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상황을 파악하는 눈치였다. 포마드가 냅킨으로 목덜미를 닦으며 소리를 질렀다.

   “씨팔, 너 이 개새끼, 일부러 이랬지?”

   “아녜요, 정말 죄송해요.”

   “그거 하나 제대로 못 가져와?”

   나도 냅킨을 뽑아 그의 상의를 조금 닦아주었다. 그새 얼마나 퍼마셨는지 술 냄새가 지독했다. 포마드가 나를 밀치며 꺼지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씻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행사장 직원들이 달려와 깨진 접시와 음식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N이 그들에게 사과하며 깨진 접시 값을 현찰로 물어줬다. 포마드는 욕설을 씹어대며 붉어진 얼굴로 자리를 떴다. 나도 어쩔 줄 모르는 척 따라나섰다.

   포마드는 화장실로 향했다.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갔다. 그가 세면대에서 얼굴과 목덜미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아, 휴지……” 나는 중얼거리며 좌변기 칸을 하나하나 열어 살폈다.

   “핸드타월 쓰면 되잖아 등신아.” 포마드가 지껄였다. “덜떨어진 새끼들은 써먹을 데가 없어.”

   화장실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세면대에 수그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발로 그의 무릎 뒤쪽을 찍어 내리며 뒷덜미를 세게 잡아당겼다. 포마드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그의 멱살을 잡고 뒤쪽 벽으로 끌고 갔다. 녀석의 뒤통수가 벽에 세게 부딪쳤다.

   “야, 이 씨발새끼야.” 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네 따까리냐?”

   “뭐야, 돌았어?”

   “더 까불어 보지, 왜? 하루 종일, 씨발 좆도 아닌 새끼들이 왜 자꾸 지랄들이야.”

   나는 그의 멱살을 쥐고서 머리통을 벽에 박아댔다. 그때 N이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포마드가 그를 보더니 이 미친 새끼 좀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N은 좌변기 칸을 슬쩍 건너다보고 화장실 출입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그는 다시 문을 닫고 다가와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나는 포마드의 멱살을 쥔 채 그대로 있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친구가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N이 쪼그려 앉아 지폐 몇 장을 접어서 포마드의 가슴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건 세탁비.” 그리고 지폐를 좀 더 두둑이 꺼내 포마드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깽값.” N이 나를 돌아봤다. “아직 안 팼지?”

   “뭐?” 포마드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곧바로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N도 그의 복부를 발로 차고 귀싸대기를 날렸다. 쓰러진 놈의 옆구리를 연거푸 걷어찼다. 내가 무릎으로 얼굴을 찍으려 하자 N이 그건 안 된다며 말렸다. 녀석이 얼른 튀어야 한다고 종용했다. 우리는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포니테일과 마주쳤다. 설명할 겨를 없이 그의 손을 잡고 건물 밖으로 함께 내달렸다. 손이 매우 차서 잡고 나서야 당황했다.

   “무슨 일이야?” 포니테일이 따라 달리며 물었다.

   “아까 그놈, 완전 미친놈이야. 술 마시고 행패 부리더라니까.” 내가 말했다.

   “행사도 쫑났어.” N이 덧붙였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갔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포니테일에게 차를 가지고 왔냐고 물었고, 그는 안 가져왔다고 했다.

   “그럼 우리 차 타고 가.” 내가 말했다. “대리 있다고 했지?”

   “대리한테 맡기면 안 되지.” N이 내게 차키를 건네며 말했다. “네가 운전해.”

   “난 술 안 마셨냐?”

   “지금 콩트해?” 포니테일이 차키를 낚아채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둘이 사고 쳤지?”

   N이 뒷좌석에 먼저 타더니 잽싸게 문을 닫았다. 나는 땅을 한번 차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가 빠르게 진입로를 빠져나갔다. 안전벨트를 매고 어깨를 들썩였다. 몸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사고 쳐놓고 좋아?” 포니테일이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응. 쉬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네. 재미있어.”

   “끝내줬지. 에라이, 싸가지 없는 새끼.” N이 뒷좌석에 드러누웠다. “난 잔다. 도착하면 깨워.”

   “둘 다 정상이 아니야.”

   포니테일이 창틀에 팔을 괴고 이마를 짚었다. 나는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날씨가 좋았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후 나는 포마드가 뭔 짓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무 일 없었네요. 그쪽 나가시고 얼마 안 돼서 저도 나갔거든요, 콜럼버스 씨.”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듣고 있었어?”

   “응. 무슨 이야긴지는 잘 모르겠더라.” 포니테일이 손가락으로 핸들을 가볍게 문질렀다. “사업 시작할 때 무슨 일 있었어?”

   차가 구간단속 구간으로 들어가며 속도를 줄였다. 포니테일이 단속 속도에 맞춰 운전하는 동안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구간단속이 끝났을 때 천천히, 우리 사업의 진짜 시작을 이야기했다. 망원이 꺼내든 사업 아이템, 적시타가 구현한 사업계획서, 그리고 나와 N이 실현한 사업…… 단언하건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한테 유리하도록 사실을 교묘히 바꾸려들지 않았다. 만약 내가 실제와 약간 다르게, 무언가를 가감하여 말했다면 아마 그때는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끝내면서 포니테일의 질타를 기다렸다.

   “미친 새끼네. 그걸 왜 오빠한테 지랄해?”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오빠가 열심히 키운 사업 맞아. 물론 잡음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지 뭐.” 포니테일이 잠시 뜸을 들였다. “오빠도 내심 신경 쓰이는 거지?”

   “안 그렇다면 거짓말이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좌석 끄트머리에 엉덩이가 걸치도록 미끄러져 내려갔다.

   “지금이라도 연락해보는 게 어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포니테일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이번 생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켕겨버리면 다음 생에서도 그 사람과 또 엮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럼 다음 생에 풀면 되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이번 생의 문제들은 이번 생에 다 끝내고 가고 싶어.”

   “그랬는데도 다시 태어나면?”

   “그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관계만 맺을 수 있겠지?” 포니테일이 부러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낙관적이시네.” 나는 웃었다.

   포니테일은 우리를 자취방 앞까지 데려다주고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N은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자취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나는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오전에 하던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했다. 작업이 끝날 때쯤에는 해가 거의 져서 사무실이 캄캄했다. 형광등을 켜고 창문을 닫았다. 창가에 서서 난초의 잎 끝자락을 매만지며 한참 서 있었다. 오후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안에 불기둥처럼 치솟은 화를 응시했으나 불길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난 잎의 끄트머리가 뚝하고 끊겼다. 나는 소주를 사와 사무실에서 혼자 병나발을 불었다.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다. 분명 달라지려던 찰나에 어그러졌고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포니테일이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바보 같은 내 사진 한 장과 포니테일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도대체 얘가 왜 내 옆에 있을까. 포니테일의 얼굴을 착잡하게 보다가 바보 같은 내 사진으로 넘겼다. 나는 소주를 병째 마시며 낄낄거렸다. 우스운 표정과 우스운 포즈. 우스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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