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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Dec 05.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17화

2부 「비상구」 ②

   N과 둘이서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던 날이었다. 우리는 커피를 들고 주차장 옆 흡연구역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사위가 고요했다. 선선한 바람이 낮 동안의 더위를 씻어 내리는 초가을의 밤이었다.

   “요즘 계속 사무실에 있는 거 같다? 데이트는 안 해?” N이 물었다.

   “뭔 데이트?”

   “포니테일이랑 술도 먹고 배드민턴도 치고 하더니.”

   나는 담배 연기를 잘못 삼켜 켁켁거렸다. “그게 무슨 데이트야, 미친놈아.”

   “포니테일이 그러던데, 데이트라고. 걔 너한테 관심 있어. 분명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다시 빨았다. N은 애초에 포니테일이 우리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도 나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창업했다고 할 때는 별 반응도 없었어. 너랑 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궁금해하더라고. 투자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은근슬쩍 너 연애하느냐고 물어보던데?”

   “연애?”

   “그래. 사무실 처음 왔을 때도 밖에서 먼저 만났다가 깜짝 놀랐잖아. 걔 그렇게 차려입고 꾸민 거 난생처음 봤어.”

   “그건 과장인 것 같은데.”

   “좀 과했나?” N이 시시덕거렸다.

   “이빨도 정도껏 까야지. 걔가 나 같은 애한테 관심을 왜 가져?”

   “그건 진짜라니까. 하여간 눈치 없는 척 존나 해요.” 그가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튕겨 끄고 꽁초를 재떨이에 버렸다. “누가 너더러 연애하래? 어차피 썸 타는 거 서로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음의 피부에 자극 주고 그러라는 거지.”

   “마음의 피부?”

   “그래. 몸이 살아있다는 걸 언제 느껴? 자극을 느낄 때야. 영혼과 마음도 그 피부에 자극을 주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다고. 존재가 흔들리게 된다니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영혼과 마음에 피부가 어디 있어?”

   “사람들이 왜 말 한 마디에 울고 웃겠냐? 피부에 자극을 받으니까 반응을 하는 거 아냐.”

   나는 잠시 그를 빤히 보다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혹시 사이비 종교 같은 데 빠진 건 아니지?”

   “별 걱정을 다 하시네. 내가 종교를 만들면 만들었지 빠지겠냐.”

   “네가 창설하고 네가 빠지는 우를 범할 수도 있지.”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져.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간 나중에 고생한다.” N이 기지개를 켜며 주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도 마음도 주기적으로 쉬어 줘야 일에도 더 도움 돼. 너 휴대폰 가져왔냐?”

   “사무실에 두고 왔는데, 왜?”

   N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응, 우리 여기 있어. 흡연구역.”

   N이 주차장 쪽으로 휴대폰을 흔들었다. 포니테일의 차가 들어와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포니테일이 우리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많이 바빠?” 그가 물었다.

   “전혀. 마침 잘 왔다. 얘 좀 데려가.” N이 투덜거렸다.

   “아직 할 일 남았어.” 내가 대답했다.

   “일은 혼자 다 하지? 그럴 거면 나는 왜 있고 애들 월급은 왜 주냐?”

   N이 나를 포니테일에게로 떠밀면서 내일까지 정직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두 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사무실에서 짐을 가져 나왔다. 포니테일은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한밤의 도로를 달렸다. 창문을 내리자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그는 배드민턴을 치러 가자고 했다. 늦은 시간에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나는 좋다고 했다. 운동하는 포니테일의 생기 어린 모습이 좋았다. 언젠가 그와 처음 오페라를 보러 갔을 때 나는 앙상블로 나온 지역발레단의 무용수들에게 홀리듯 시선을 빼앗겼었다. 인간의 몸과 몸짓이 그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운동과 무용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질 수도 없는 것이었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는 배드민턴장의 불을 켰다. 조명이 차례차례 텅 하는 소리를 내며 켜졌다. 포니테일이 체육관 관장과 안면이 있어서 문을 닫은 시간에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품이 큰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네트 양쪽에 서서 라켓을 쥐었다. 나는 배드민턴 경기의 룰을 잘 알지 못했다. 첫날 두어 판 쳤을 때 포니테일이 이렇게 말했다.

   “이길 생각이 없구나?”

   정확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그것도 좋은 것 같다며 다시 서브를 넣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승부를 접고 가능한 한 힘껏 랠리만 이어나갔다. 한 사람이 실수하거나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오늘도 그랬다. 셔틀콕이 내 라켓에 닿지 않고 떨어졌을 때 우리는 둘 다 땀에 흠뻑 절어 있었다.

   출입구 옆 음료자판기에서 이온음료를 뽑아 왔다. 포니테일은 코트에 누워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번 하면 진이 다 빠지네.”

   그가 아직 고르지 못한 숨소리로 말했다. 나도 힘겹게 미소 지으며 음료를 건넸다. 그는 차가운 캔을 뺨에 잠깐 댔다가 따서 마셨다. 코트 한쪽에 셔틀콕이 떨어져 있었다.

   “졸업이 언제라고 했지?” 내가 물었다.

   “지금 마지막 학기야.”

   “끝나면 재단에 바로 들어가는 거야?”

   그는 그렇다고 했다.

   “너도 더 바빠지겠네.”

   “왜? 아쉬워?”

   그가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쉬울 게 뭐가 있느냐며 캔을 땄다. “자주 보면 되지.”

   “나 때문에 못 보겠어? 오빠 때문에 못 보는 거잖아. 일이랑 살림을 차리셔서.”

   “지금은 그럴 때잖아.”

   “주객전도지. 잘 살아보겠다고 일하는 거 아니야? 사업을 위해 오빠를 갈아 넣으면 안 돼. 사업이 오빠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이게 내 전부야. 이 일이 내 존재고 정체성이야.”

   일은 아이러니했다. 남과 비교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일에도 삶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를 갉아먹는 생각이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면 되레 쉬지 않고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포니테일과 진 빠지게 배드민턴을 치는 것도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데 신경을 집중하면 생각을 비우기 좋았다. 하지만 혼자서 이런 시간을 가지기란 쉽지 않았다. 헬스나 산책을 하러 나서다가도, 간만에 도서관이나 들러 볼까 나서다가도 이럴 시간에 일을 좀 더 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간사하게도 일에 빠지는 것이 당장의 나를 지켜주는 갑옷임을 알고 있었다. 낮밤 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은 나의 귀를 닫는 것뿐만 아니라 남들의 입 또한 닫게 만드는 방법이었으니까. 약아빠진 짓이더라도 사회적 입지를 단단히 다지기 전까지는 다른 수가 없었다. 불안을 달래는 방법은 일과 술뿐이었고, 그 결과 사업은 나날이 잘되어 갔지만 나는 더욱 피폐해져 갔다.

   포니테일은 졸업하고 재단에 입사했다. 우리는 한 달에 두어 번씩 만났다. 주로 포니테일이 찾아왔지만 내가 먼저 연락할 때도 있었다. 관계에 뚜렷한 진전은 없었다. 일찍이 우리 사이의 호감을 눈치 챈 후배들도 포니테일과 나를 엮으려 들었지만 우리는 능청만 떨 뿐 모른 척했다. 당장 내게 일이 중요하다는 걸 포니테일이 이해해 준 덕이었다.

   사업을 재개한 지 이 년이 넘었을 때, N은 중요한 행사에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 그가 창업을 준비할 때 도움 받았던 스터디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현재 잘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들과 젊은 투자자, 정재계 자제들이 참석한다고 했다. 포니테일도 참석자 명단에 있었다. 애초에 N이 속했던 스터디라면 구성원이 어떤 인물들일지 알 만했다. 나는 캘린더를 확인했다.

   “주말에 투자자랑 점심 약속 있잖아.” 내가 말했다.

   “그 사람도 행사에 참석한대. 거기서 만나자고 얘기해뒀어.”

   나는 입술을 말아 넣고 캘린더를 다시 훑었다.

   “곧 진행할 프로젝트 예산 책정도 해야 하고, 지원사업 보고서도 써야 해.”

   “애들이 할 거야. 그래서 오늘 쉬게 했잖아.”

   N이 등 뒤의 후배들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빈자리를 건너다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네.”

   “절대 없지.” N이 미소 지었다. “언제까지고 사무실에 있을 수만은 없잖아?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 테고.”

   “꼭 가야 하는 거지?”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볼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가야지, 그럼.”

   “좋았어, 다행이다. 덜 시달리겠네.”

   “응?”

   “포니테일이 너 데려오라고 아주 난리였거든. 사람을 얼마나 달달 볶아대던지.”

   “잘들 논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서 N이 들고 있는 서류를 눈짓했다. “그건 뭐야?”

   “애들이 맡기고 간 거. 난 결재했으니까 너도 살펴보고 결재해 줘.”

   나는 서류를 받아들고 펜 트레이에 둔 플래티넘 프레지던트 만년필을 집었다. N과 사업을 재개한 뒤로 서명을 하거나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면 프레지던트를 가지고 다녔다. 어떤 사안에서든 선생님이 말했던 정확한 눈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부적 같은 용도였다. 서류를 결재하고 일어나 후배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주말 아침 일찍 외출 준비를 했다. 행사장은 우리 사업의 리드 투자자인 유명 홀딩스의 신입사원 연수원이었다. 나는 체크무늬가 들어간 녹색의 얇은 블레이저를 걸쳤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플래티넘 프레지던트를 가슴주머니에 꽂았다. N이 자신의 향수를 건네 나도 뿌렸다.

   연수원은 남해에 있었다. N이 운전하는 동안 나는 조수석에 앉아 지원사업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뒤 N이 퉁명스럽게 입을 뗐다.

   “그거 애들한테 맡겼다니까.”

   “알아.”

   “네, 네. 그러시겠죠.”

   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N이 갑자기 오른손을 뻗어 노트북을 닫으려 들었다.

   “야, 야, 야.” 나는 얼른 단축키를 눌러 저장하고 두 손을 뗐다. 노트북이 덮였다. “미쳤어?”

   “바깥 좀 봐. 경치 좋잖아.”

   N이 다시 핸들을 쥐며 너스레를 떨었다. 차창 밖에는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고, 고즈넉한 단층 건물들이 모인 마을도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괜히 투덜거렸다.

   “운전에 집중해, 미친놈아.”

   “아무리 집돌이라도 막상 여행 오면 좋아들 하던데.”

   “싫어하진 않아.” 나는 컵 홀더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덧붙였다. “굳이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거지.”

   “왜? 감흥이 없어?”

   “어딜 다녀도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앞서 가던 고속버스가 휴게소로 빠지는 걸 지켜보며 대꾸했다. “어딜 걷든 무얼 보고 무얼 먹든 평소 가지고 있던 고민들만 종일 생각하더라고.”

   “그래서? 문제가 해결됐어?”

   “가끔은.”

   “그럼 됐네. 여행 다니면서 머리 정리도 하고, 문제도 해결하고.”

   “중요한 건 여행을 안 다녀도 늘 머릿속을 탐험한다는 거지.”

   우리는 함께 웃었다. 휴게소를 지나쳐서 계속 달렸다. N이 엄지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노트북 두고 눈이라도 좀 붙여. 어제는 좀 잤냐?”

   “글쎄다.”

   “또 술 처먹고 주무셨겠지.”

   나는 헛웃음을 치며 노트북을 뒷좌석에 놓았다. 좌석을 젖히고 눈을 감았다. 환한 어둠속에서 차가 부드럽게 커브를 도는 것이 느껴졌다.

   잠이 깼을 때는 연수원 진입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쭉 뻗은 길을 따라 양옆에 사이프러스가 늘어서 있었고, 경광봉을 든 직원들이 야외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주차를 안내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대고 건물 안에 들어갔다. 연수원 내부는 청결하고 쾌적했다. 에어컨 바람이 약간 춥게 느껴져서 손에 접어 쥐고 있던 블레이저를 다시 입었다. 지하 강당은 다양한 연령층의 양복쟁이들로 어수선했다. 모두 어두운 계열의 격식 있는 정장차림이었다. 나는 N을 팔꿈치로 찔렀다.

   “드레스코드가 장례식이야? 귀띔이라도 해 주지.”

   “글쎄, 맞춘 건 너희 아니야?”

   N이 강당 한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민트색 정장을 입은 포니테일이 눈에 띄었다. 우리를 발견한 그가 손을 살짝 흔들며 걸어왔다. 불현듯 포니테일을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왔어?”

   그의 물음에 미소로 화답했다. N이 겨우 모시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포니테일과 함께 있던 모델처럼 키가 아주 큰 여자가 따라와 인사를 건네며 내 행색을 훑었다.

   “옷이 정말” 그가 놀리는 투로 말했다. “캐주얼하시네요.”

   “내가 선물한 거야.”

   포니테일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델은 정말이냐며, 어쩐지 센스가 남다르다고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포니테일과 나를 번갈아 봤다.

   “뭐야? 두 사람, 옷 맞춘 거야?”

   “뭐래.” 포니테일이 그의 팔을 툭 쳤다. “곧 CEO 강연 있어.”

   “정말?” 나는 벌써 따분함을 느꼈다.

   강연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댄 채 모처럼 술 없이 숙면을 취했다. 중간에 잠깐 깼을 때는 연사가 바뀌어 있었다. 옆을 보니 N이 더 자라는 듯 눈짓했다. 다시 눈을 감았고 금방 잠들었다.

   강연이 끝난 뒤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강당에 식사를 위한 원탁들과 출장 뷔페가 들어왔다. 홀딩스는 참석자들에게 백포도주와 수십 명의 대리운전기사를 지원해 주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N은 미팅 예정이었던 투자자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는 나더러 신경 쓰지 말고 포니테일과 산책이나 다녀오라 했다.

   건물 후문은 석조와 꽃으로 조경을 가꾼 널따란 정원으로 통했다. 초가을의 햇볕이 꽃들 위로 눈부시게 떨어졌다. 포니테일을 따라 걷던 나는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했다.

   “어디 연락 올 데 있어?” 포니테일이 물었다.

   “아니. 혹시 일 때문에 연락 올까 봐.”

   포니테일이 내 휴대폰을 빼앗아들고는 벨소리를 최대로 높인 뒤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이제 그만 확인해. 알겠지?” 그는 주머니 속에 넣은 휴대폰을 가볍게 노크했다. “저쪽으로 걷자.”

   우리는 구절초와 코스모스로 조성된 화단 길을 걸었다. 포니테일은 종종 멈춰 서서 꽃 사진을 찍었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려다 안주머니에 함께 들어있던 담뱃갑을 건드렸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그래서 여행이 별 의미 없는 나의 발길을 잠시 멈추는 건 오로지 담배뿐이었다. 나는 혼자 미팅을 하며 내게 쉴 시간을 마련해 준 N을 떠올렸고, 구절초를 휴대폰 카메라에 담으려고 멈춰 선 채 활짝 웃고 있는 포니테일을 보았다. 친구와 담배, 나를 멈춰 세워 쉬게 해주는 것은 그들이 전부였다.

   “오빠, 여기 와봐.” 포니테일이 손짓했다. “사진 찍어줄게.”

   “됐어, 사진은 무슨.”

   “그럼 거기 서 있어.”

   “뭐?”

   포니테일은 그 자리에서 내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로 갔다.

   “뭐하는 거야. 그럼 안 예쁘잖아.” 나는 포니테일이 서라는 곳에 서서 손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자, 찍어.”

   “그렇지.”

   그가 셔터를 누르기 직전에 나는 굉장히 어색하고 과장된 미소를 짓고 자세도 엉거주춤하게 바꿨다. 포니테일이 뭐하는 거냐면서, 완전 바보같이 나왔다고 웃었다.

   “어차피 멋있게 안 나와. 그럴 바에야 웃기게 찍는 게 낫지.” 내가 웃었다.

   우리는 찍은 사진을 함께 보았다. 포니테일의 사진도 찍어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격렬하게 거부했다.

   “야, 너도 내 사진 찍었잖아. 빨리 서봐.”

   “싫어. 그럼 같이 찍어.”

   포니테일이 휴대폰 카메라를 전면 렌즈로 바꾸었다. 뭐라 하기도 전에 그가 구도를 잡았고, 나도 최대한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사진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러워했다. 우리는 천천히 산책했다. 구획이 단정하게 나눠진 화단은 화사했고 정원을 걷고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오빠는 한가해지면 뭐 하고 싶어?”

   “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한가해졌으면 좋겠어.”

   “대단해, 아주. 워커홀릭 납셨어.”

   포니테일이 툴툴거렸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포니테일이 두어 걸음 더 걸어 들어가다 따라 멈춰 섰다.

   “너, 나 잘 모르지?”

   포니테일이 나를 돌아봤다. “응?”

   “난 엄청 게으른 사람이야. 노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좋아해. 사람 만나서 대화하고 시간 보내는 건 질색이고.”

   포니테일이 말없이 나를 보며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뭔가를 열심히 해 본 적도 없어. 좋아하는 게 생겨서 제대로 해 볼까 싶으면, 금방 변덕을 부려서 질려버리고. 우리 부모님은 근성 없는 놈들을 진짜 싫어했는데, 그래서 날 그렇게 싫어했었나 봐.” 나는 농담조로 말했다. “살면서 무언가를 이렇게 열심히 해 본 적은 처음이야. 먹고살아야하고, 그래서 절박하긴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만 일하는 건 아니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이제 좀 알 거 같거든.”

   포니테일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 하는 일이 그렇게 좋은 거야?”

   “아니.”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포니테일과 눈을 맞췄다. “몰입.”

   “몰입?”

   “무언가에 미쳐서 몰입해 있다는 감각이 좋아. 일에 몰입하면, 어느 순간 모든 고민이나 걱정들, 삶의 문제들이 지워지고 나도 텅 빈 상태에 들어가. 그런 상태가 굉장히 기분 좋아. 평온해.”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마음속에 있던 것을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 당장 몰입할 수 있는 게 내가 하는 일인 것뿐이야. 다른 더 좋은 대안이 나타난다면 당장이라도 갈아탈 수 있어. 물론 돈벌이는 좀 돼야 하겠지만.”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포니테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근데 정말 평온해?” 포니테일이 잠시 입술을 앙다물다가 내 눈을 바로 봤다. “오빠 일하는 거 보면 자신을 너무 갉아먹는 것 같아.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지만, 일을 하면서도 너무 불안해 보이거든. 그럴수록 일도 술도 더 찾고.”

   나는 시선을 피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포니테일이 조금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좋아하는 몰입도 오래하지.”

   바람이 불어왔고, 문득 연분홍빛의 코스모스가 눈부시게 눈에 띄었다. 슬로모션처럼 흔들리는 꽃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걱정하는 게 아니야.” 포니테일이 분위기를 털어내듯 가뿐한 목소리로 말했다. “N 선배도, 사무실 사람들도 다 걱정해. 그러니까 술도 좀 줄이고, 알았지?”

   “그래. 고맙다.”

   “좋아. 말 잘 들으니까 얼마나 예뻐.” 포니테일이 한쪽 팔로 내 등을 명랑하게 감싸며 말했다. “상으로 비타민 선물해줄게.”

   “아, 그건 싫어.”

   “씁, 챙겨 먹어. 사무실로 보내놓을게.”

   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내키지 않은 얼굴로 알겠다고 말했다. 슬슬 강당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근데 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함께 걷다가 내가 말했다. “너 왜 N은 선배라고 불러? 걔랑 같은 학교 나오지도 않았다며.”

   “그야 선배는 선배니까.”

   “그게 대답이 돼?”

   “됐어, 진짜 궁금한 건 오빠는 왜 오빠냐, 이거지?” 포니테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린 키스했잖아.”

   “뭐?”

   포니테일이 나를 빤히 보다 갑자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런 대답 기대한 거 아니야?”

   “뭐래, 이씨. 빨리 와.” 나는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오빠 얼굴 엄청 빨개졌어.”

   “아, 빨리 오기나 해.”

   지하 강당은 금세 연회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출입구 근처 벽면을 따라 출장 뷔페 음식과 식기들이 늘어서 있었고, 테이블 당 네 자리씩 마련된 원탁이 강당 안쪽에 모여 있었다. 발 빠른 이들은 이미 식사 중이었다. 단상과 가까운 원탁에 홀로 앉아 스테이크를 써는 N이 보였다.

   “둘이 계속 붙어 있네?” 모델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N 씨가 기다리시던데.”

   “같이 먹을래?” 포니테일이 원탁을 둘러보며 모델에게 말했다.

   “미안. 이래 봬도 찾는 사람이 많아서.” 모델이 익살맞게 웃고는 나를 보았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나는 음식을 담아 N의 옆자리에 앉았고, 포니테일이 내 옆자리이자 N의 맞은편에 앉았다. N은 스테이크 맛이 끝내주니 얼른 먹으라고 권했다. 미팅도 잘 끝냈다고 하기에 고맙다고 했다. 나는 야채수프를 한술 뜨고 스테이크를 썰었다. 왠지 주변의 자잘한 소리들이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 소리, 은근하게 끓고 있는 어떤 요리의 소리, 육중한 출입문이 연신 여닫히는 소리.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형광등으로 환한 이곳은 분위기도, 음식도, 참석자도, 관계자도 모두 정갈했다. 정갈하고 어색하고, 재미없었다. 종종 들려오는 대화들은 시럽 같은 겸손함을 잔뜩 끼얹고도 썩은 내를 감추지 못하는 떫고 같잖은 자랑들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오니 다시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듯했다. 포니테일과 산책할 때 되살아났던 온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날 선 초조함만이 뇌를 저몄다. N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잔 하나를 바로 세우고 백포도주 병을 땄다. 그는 포니테일에게 한잔하겠냐고 물었다. 포니테일은 사양했다. 나는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땀을 닦고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너도 안 마셔?” N이 내게 물었다.

   “응.”

   “웬일이래.”

   나는 아기 손바닥만 한 함박스테이크를 썰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식사를 하던 도중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한 남자가 N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녀석의 아는 형인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 테이블에 합석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불편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여기는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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