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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Dec 02.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16화

2부 「비상구」 ①

   “자퇴를 한다고?” 지도교수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지도교수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업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교수들은 나와 적시타에게 호의적이었고, 망한 뒤에도 안타까워하며 격려해 줬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내 지도교수가 아니었다. 지도교수는 내게 관심도 없다가 사업을 시작한 뒤로는 난데없는 경멸을 내비치더니 끝까지 냉소적이었다. 그간 성적이라도 잘 받아 놓지 뭐했냐고, 학점이 우수했던 적시타에게는 취업 자리를 알선해 줄 것이라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수는 자퇴한 뒤에 다른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창업이요.”

   “또?” 교수는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은 얼굴로 쳐다봤다. “졸업은 하지 그래? 학점 관리하면서 살길도 좀 마련하고.”

   “학업 팽개치고 창업에 전념했는데도 죽 쒔습니다. 학점까지 신경 썼다면 불 보듯 빤하지 않았을까요?”

   “그럼 관둘 법도 하지 않나? 부모님은 아시고?”

   “통화했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말씀하시더군요.”

   애초에 나를 설득할 열정이 별로 없던 교수는 마지못한 척 수속을 밟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교수실을 나서서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이제야말로 배수진을 치고 오로지 내 전부를 쏟아 부어야 할 때였다. 캠퍼스 정문 앞에서 포켓사이즈 소주를 꺼내 마셨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시는 오지 않을 교정을 휙 둘러보고는 소주병을 화단에 던져 버리고 주저 없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N의 학교 앞에서 다시 그와 자취를 시작했다. 나는 모든 아르바이트를 끊고 N이 주는 생활비로 지냈다. 그의 제안이었다. 친구 돈으로 생활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도움 안 되는 감정 따윈 잘라버렸다. 성공해서 갚으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낮밤 없이 자취방과 카페를 오가면서 기존의 사업계획서를 손보는 동시에 실패 원인을 분석, 보완하기 시작했다. 삼 개월 뒤에 우리는 창업 지원을 받았고, 학교 산학협력관 사무실 한 곳을 따냈다. 우리 팀만 쓰는 공간이었고 미닫이 창문도 있었다. 볕과 바람이 잘 드는 창가에 N의 부모님이 창업 선물로 보낸 난초를 두었다.

   우리는 사업자 등록을 하고 사업용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은행에 들렀다. 은행원은 사무적인 친절을 보이며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가 서류를 검토하는 사이 나는 창구 한쪽에 놓인 명함꽂이에서 명함 한 장을 뽑아들었다. 명함을 두 손으로 쥐고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명함을 이렇게 둬도 되나? 누가 이걸 가져가서 사칭하면 어쩌려고. 헛웃음 칠 만큼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은행원이 업무처리가 끝났다며 통장과 도장을 건네줬다.

   은행을 나섰을 때 나는 불쑥 자세를 꼿꼿하게 펴고서 N에게 은행원의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은행 안수경 주임입니다.”

   N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 명함을 받아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뭐하는 개짓거리죠?”

   “우리도 명함 뽑자고.” 내가 웃으며 말했다.

   “명함은 필요하지.” N이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앞장섰다. “재밌네.”

   우리는 명함을 뽑았다. N은 사업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묻지 않았고, 나도 거기에 관한 한 입을 열지 않았다. 적시타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적시타와는 사업을 접은 뒤 달리 연락하지 않았다. 고시촌에서 지내는 망원이 이따금 연락해 왔지만 사정을 아는지 알 수 없었다.

   일은 잘 풀려갔다. N이 어릴 때부터 보여 줬던 은근하면서도 확실한 통솔력과 장악력은 사업에 알맞았다. 사무실에 입주한 지 얼마 안 되어 N은 필요한 타과의 후배 두 명을 직원으로 들였다. N이 뽑은 만큼 그들 역시 능력이 좋았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일에 더욱 몰두했다. 은연중에 기어 올라오는 열등감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우려와 달리 N의 후배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다. 오로지 N 덕분이었다. 열여덟 살 때의 카니발에서처럼 나는 N의 친구라는 지위를 누렸다. N의 주변사람들은 그가 친구로 두는 사람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 듯했다. 어쨌거나 나는 열등감 따위에 주의를 뺏길 여유가 없었다. 자기 전에 혼자 술을 마시는 빈도만 좀 늘었을 뿐…….

   N은 대외적으로도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적시타와 견주어도 월등했다. 미팅을 앞둔 상대들의 개별적 스타일을 파악해 그에 걸맞은 다양한 가면을 준비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훌륭한 사업 파트너지, 인생을 함께할 친구가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해도 기업을 대표하는 이의 인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N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심을 살 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삶의 윤리적인 지향점이 있어서라기보다 티끌만 한 오점도 남기지 않겠다는 결의에 가까워 보였다. N의 바른 품행은 그래서 오히려 차갑게 느껴졌다. 사업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사무실에 들어간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N이 한 투자자와 함께 사무실로 오고 있다고 연락했다. 나는 후배들과 서둘러 투자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전날 잠을 좀 자두고 샤워도 하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못하는 날들이 숱했다.

   “혹시 모르니까 지금 진행하는 서류들 정리해 놓자.” 내가 후배들에게 말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요.”

   “괜찮으니까 프린트해서 책상 위에 둬. 다른 서류들도 가져오고. 나는 프레젠테이션 준비하고 있을게.”

   N은 샌드위치와 커피 트레이를 양손에 든 채 사무실로 들어왔다. 함께 온 투자자는 후배들 또래의 젊은 여자였다. 어딘지 낯이 익다 싶던 나는 말문이 막혔다. 후배들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나는 당황한 채로 책상에 놓인 명함 지갑을 집어 들었다. 투자자가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기억은 하려나?”

   열여덟 살에 카니발에서 만난 포니테일이었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아.” 나는 명함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악수했다. “반갑습니다. 당연히 기억하죠.”

   “당연히라니 좀 민망한데. 존댓말도 민망하고.” 포니테일이 웃었다. “왜 안 줘?”

   “네?”

   “명함. 주려던 거 아니야?”

   “아아.”

   나는 허둥대며 그에게 명함을 꺼내 줬다.

   “투자자님이 사 주셨어. 맛있게들 먹어.” N은 후배들에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건네고 포니테일과 나를 돌아봤다. “우린 잠깐 나가자.”

   N과 포니테일과 함께 학교 앞 백반 집으로 갔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포니테일의 근황을 들었다. 최근 J재단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개인적인 주식 투자를 통해 번 이윤으로 우리 사업에 투자한다고 했다. N은 지금까지의 투자자 목록을 내게 건넸다. 알고 있던 기업과 엔젤 투자자들 외에 포니테일을 포함한 몇몇 개인 투자자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목록을 훑다가 두 사람을 쳐다봤다.

   “괜찮겠어?” 나는 N에게 물었다.

   “그럼.”

   포니테일도 다 아는 눈치인 듯했다. 새로 추가된 투자자들은 대부분 N의 아버지의 경쟁관계에 있는 업체나 사람들이었다.

   “얘기 안 해줬어?” 포니테일이 N을 쳐다보고는 내가 든 서류를 건너다봤다. “거기 제일 먼저 오빠네 사업에 크게 투자한 홀딩스 있지? 거기도 선배 아버님이랑 척진 곳이야.”

   “아버지랑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비즈니스지.” N이 대답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서류를 돌려줬다. 맥락 없이 사무실 창가에 있는 난초가 생각났다. 포니테일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포니테일이 널 궁금해하는 것 같더라.” N이 젓가락으로 고등어구이의 살을 바르며 말했다. “널 정확히 기억하더라고.”

   “어떻게 기억하던데?”

   “그날 세상 무너진 사람처럼 울던 애라고.”

   “젠장. 둘 다 기억이 한참 잘못됐네.”

   그날 이후로 포니테일은 종종 우리 사무실에 들렀다. 처음에는 투자자의 방문이 부담스러웠지만, 곧 그가 우리를 친구처럼 대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먼저 사업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그는 일절 관련된 사안을 꺼내지 않았다. 특유의 명랑한 성격이 금방 위화감을 없애 주었다. 사업에 있어서도 포니테일에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일에 열정을 보이는 후배들이 업무와 관련해 질문하면 꽤나 날카로운 지적들을 해 줬다. 우리가 세무와 회계 쪽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도움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포니테일에게서 종종 개인적인 연락이 왔다. 둘이서 밥을 먹거나 술을 한잔하기도 했다. 내 생일에 그가 둘이서 저녁을 먹자고 연락해 왔다. 그는 나를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사업 다시 시작할 때 부모님은 뭐라고 안 하셨어?” 포니테일이 물었다.

   “난리 났었지. 남들은 다 잘살려고 애쓰는데 너는 왜 망하고 싶어 용을 쓰냐고.”

   “그래서 뭐라 그랬어?”

   “위대한 유전자의 힘이 아닐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날 뒤로 연락도 끊었어. 연락처 다 차단 박았거든. 우리 가족들은 다 지옥에 주민등록 되어 있을걸.”

   “웃으면 안 되는데.” 포니테일이 웃음을 참았다. “잘될 거야.”

   “글쎄. 길은 두 갈래야. 삐까뻔쩍하게 금의환향하거나 망해서 뒈져버리거나.”

   “잘돼. 안 될 것 같았으면 나도 투자 안 했어.” 포니테일이 와인 잔을 한 바퀴 돌린 뒤 한 모금 마셨다. “부모님도 나중엔 좋아하실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 부모님은 잘 계셔? 오빠도?”

   “오빠? 나 외동인데?”

   “응?” 나는 잠시 생각하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너 그때 오빠 있다고 했잖아. 애들 무릎 작살내서 깽값 물었다던.”

   포니테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거 지어낸 이야기야. 외동 맞아.”

   “지어냈다고? 왜?”

   “그때 그쪽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요.” 그가 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위로가 필요한 것 같은데 떠오르는 이야기가 그것뿐이라.”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포니테일이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나면 거짓말이었다고 말해 주려 했는데, 그 뒤로 다신 안 와서.”

   “왜? 기다렸어?” 내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오빠가 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 첫날 사무실에서 바로 알아보던데?”

   “당연하지.”

   “또 당연하대.” 포니테일이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그때 엄청 좋았나봐?”

   “놀리지 마.” 나도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포니테일이 잠시 딴청을 피우다 다시 장난치듯 첫 키스였냐고 물었다.

   “그만하시죠, 투자자님. 계속 그러시면 갈 거야.”

   “알았어, 그만할게. 아참, 이거 받아.”

   포니테일이 체크무늬가 들어간 얇은 녹색 블레이저를 선물했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선물을 준비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마음에 들어?”

   “완전. 색 정말 예쁘다, 고마워.”

   “십대에 처음 만났을 때는 둘 다 교복 입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오빠 보자마자 어른 티가 나서 놀랐다니까?” 포니테일이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나도 어른 티가 좀 나나?”

   “넌 어릴 때도 어른 같았어.”

   N이나 포니테일은 내게 거인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부모가 가진 사회적 위치나 재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품을 지녔고 담대했다. 세상에 대한 안목, 나는 평생을 공부해도 가질 수 없는,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안목을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것조차 제대로 못할 때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마냥 자괴감에 빠졌다.

   “그런 말 아닌 거 알잖아.” 포니테일이 김 샌 듯 되받았다.

   “바보라 잘 모르겠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업은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N과 후배들은 학교에서 꽤 부러움을 사는 모양이었다. 혁신적이고 모범적이며 건실한 이미지겠지. 나는 적시타와 일했던 때를 생각하며 학생이 아닌 지금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밖을 향한 귀는 닫는 편이 좋았다. 창업한 지 일 년이 지났을 때 우리는 지자체로부터 유망 청년창업기업에 선정됐다. N은 학교에서 창업을 희망하는 후배들을 상대로 소규모 강연을 부탁받았다고 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다. 녀석은 사무실 후배들도 함께 가니 참석만 해달라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맡기라 했다. 결국 당일 강연 직전에 나는 몰래 술을 마시고 들어갔다. 그 무렵 항상 포켓사이즈 소주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불안할 때마다 몇 모금씩 마시고는 했다. 우리는 열 명의 총기 있는 눈망울 앞에서 인사한 뒤 단상 안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N은 단상 중앙에 홀로 서서 강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분위기를 살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피로와 가벼운 취기가 눈꺼풀을 짓눌렀다. 어느새 꾸벅꾸벅 졸다가 N이 힘주어 말하는 대목에서 잠이 깼다.

   “창업의 장점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N이 말했다. “창업에 있어서 좋은 사업 아이템은 기본이죠. 우리는 그것을 형식화하고, 현실화하고, 자본화해야 합니다. 어떻게? 단호한 자기 인정이 필수적입니다. 자신한테 부족한 점이 있으면 힘껏 개발하고, 그 동안 사업에 차질이 없게끔 능력 있는 파트너를 두세요.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같은 팀의 팀원이 아닙니다. 입사동기라면 경쟁구도를 갖추고 있겠지만, 창립멤버는 아니에요. 팀원들은 팀이라는 하나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겁니다. 다른 멤버가 잘하는 걸 본인이 더 잘하려는 건 미련한 짓입니다. 손과 심장이 서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듯이, 각자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고 다른 멤버가 못하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쟁상대는 밖에 있지도 않아요. 애초에 경쟁상대가 되려면 체급이라도 맞춰야 하니까, 안 그래요? 우리는 당장 첫 번째 안정기에 접어들어야 합니다. 신체가 활발히 움직일 수 있도록 걸음마를 거쳐 유아기를 지날 때까지는 눈 돌리지 말고 본인 사업체에만 몰두해야 하는 겁니다.”

   “N 형은 어떻게 늘 활력이 넘칠까요? 자신감도 넘치고.” N의 강연을 듣던 후배 한 명이 내게 귀엣말을 했다.

   “쟤는 원래 저랬어. 중학생 때부터.”

   “부러워요. 비법이 뭘까요?”

   “간단해. 술, 커피, 담배.”

   “에이. 그러는 형은 어떻게 늘 담담하세요? 우리가 실수해도 화도 안 내시고.”

   “별거 있나. 알코올, 카페인, 니코틴 덕분이지.”

   그리고 열등감. 나는 녀석들보다 학벌도, 머리도, 능력도 달렸다. 내가 실수를 지적해 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테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서로 불만과 불화만 늘어갈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업체 내부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피해야 했다. 인력도 없이 적시타와 둘이서 일했던 시절이 눈에 선했다. 어떻게 얻은 환경과 사람들인데, 별거 아닌 일들로 분열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모든 모멸감을 내 안에 감췄다. 나 자신이 이 팀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말은 안 하지만 모두 그렇게 생각하리라 여겼다. 해소되지 않은 열등감은 모종의 피해의식을 부풀렸고,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했다. 불안감을 잊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집에도 안 들어가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날이 현저히 늘었다. 일로도 불안감을 달랠 수 없을 땐 술을 퍼마셔댔다.

   포니테일은 말뿐인 위로로 내 자존감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를 데리고 사업 컨설팅을 받고, 자기계발과 사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으러 다니는 등 내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려 애썼다. 공부는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정치라고 그는 말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며 헬스장을 끊어 주고 종종 함께 배드민턴도 치러 다녔다. 나중에는 N도 합세해서 그들이 속한 여러 소모임과 사업 관련 행사에 나를 데려갔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N은 주로 대외적인 업무를, 나는 내부의 업무를 도맡아 왔다. 성향차이에 따른 업무 배분이었지만, N이 내부의 일들도 훤히 꿰뚫고 있는 반면 나는 대외적으로 눈이 어두웠다. N과 포니테일은 사업을 위해서든 정신 건강을 위해서든 내게 사회활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나는 몇 번 따라나서다 말았다. 그들이 신경 써 줄수록 내 손끝에는 내면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금속덩어리 같은 패배감이 만져졌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토양에 호미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체념을 들킬 수는 없어서 그들의 정성에 애써 웃었다. 사무실에서 멀리 나갈 때마다 그날 밤에는 반동처럼 모니터와 서류더미에 파묻혔다. 포니테일과 N이 잠시 눈을 돌리면 나의 생활 반경은 사무실과 자취방으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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