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불꽃놀이」 ③
펜션에 돌아가서는 차례로 씻고 보드게임을 했다. 밤 열 시 무렵, 몸에 모기 퇴치용 스프레이를 뿌리고 마당 평상에 둘러앉았다. 낮은 울타리 너머에 칠흑 같은 바다가 보였고 파도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건물 외벽에 달린 조명을 켜니 앞뜰이 환해졌다. 편의점에서 사온 족발과 닭강정을 안주 삼아 소주를 기울였다. 대화는 셋이 함께였던 스무 살에서 내가 군대 간 사이 일어난 학과 내의 사건들로, 적시타가 교양 수업을 함께 듣던 조원에게 고백 받았던 일과 망원의 싱거운 연애사로 흘러갔다. 세상 천지에 내 시간만 고여 썩는 거라던 발렛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종이컵에 술을 따르며 볼 안쪽의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따가 영화 볼래?” 망원이 말했다.
“무슨 영화?” 내가 물었다.
“<소셜 네트워크>”
“그거 페이스북 창업 이야기 아니야? 마크 저커버그.”
“맞아. 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일 벌이는 이야기가 좋더라. 어릴 때부터 어른 되면 친구들이랑 멋진 거 해 보고 싶었거든. 밴드나 연극도 좋고, 카페 창업이나 사업 같은 거.”
“일하는 기분만 내고 놀자는 거 아니야?” 나는 놀리듯 말하며 녀석들의 종이컵을 채웠다.
“그러니까 로망이지. 로망대로 둬야 하는 거.” 망원이 가볍게 받아쳤다.
“친구들이랑 하면 뭐든 재밌긴 하겠다. 근데 그 영화는 친구 사이 틀어지는 내용 아닌가?” 적시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러니까 너무 젊을 때 하면 안 돼.” 망원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종이컵을 마당에 털었다. “노후에 카페나 같이 하면 모를까.”
“카페보단 큰돈 당길 사업이 좋지. 나 괜찮은 아이디어 있는데,” 나는 나무젓가락을 지시봉처럼 쥐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종이책 책등에다가 이어폰을 꽂을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언제든 이어폰을 꽂으면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는 거지. 어때?”
“오, 진짜 별로다. 요즘 다 무선 이어폰 쓰지 않나?” 적시타가 말했다.
“응. 존나 안 팔릴 것 같아.” 망원도 거들었다.
“너무들 하네.”
나를 시작으로 우리는 이런저런 사업 아이디어를 냈다. 담뱃불을 붙이고 종이컵 가득 소주를 부어 조금씩 마셨다. 술을 따른 종이컵은 금세 말랑말랑해지고, 생각과 기분도 풀어지고, 말랑말랑한 종이컵을 쥐니 영화에서 보던 인간의 뇌가 떠올랐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윤택 있고 말랑말랑할지 궁금했다. 사업 아이디어는 점점 더 얼토당토않고 실현 가능성 없는 코미디로 흘러갔다.
“차라리 호텔 수영장에 바닷물을 납품하자.” 적시타가 빈 술병을 한쪽으로 밀어두며 말했다. “사업 롤모델은 봉이 김선달, 어때?”
“호텔에 바다를 들인다? 재밌네. 망하기 딱 좋아.”
안주와 술이 떨어지고도 우리는 평상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녀석들의 졸업이 한 학기씩 남았다고 생각하니 스냅사진처럼 수능 직후 같이 놀던 고등학교 친구들이 생각났다. 나는 식은 족발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재떨이로 썼던 종이컵을 여며 버렸다. 영화 이야기는 모두 잊은 지 오래였다.
다음 날 아홉 시가 넘어 일어났다. 망원과 적시타는 아직 퍼질러져 자고 있었다. 숙취로 멍한 머리를 퉁퉁 두들기다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마구잡이로 자란 풀숲과 낡고 찢어진 현수막으로 전망이 엉망이었다. 꼭 내 머릿속을 보는 것만 같아 창문을 홱 닫았다가 다시 약간 열고 라면을 끓였다.
“일어나, 바보들아. 이럴 거면 왜 일출명소에 숙소를 잡았어?”
“네가 일찍 잔 거야. 우리는 일출 보고 잤어.” 망원이 잠투정하듯 말했다.
“난 하나님까지 보고 온 것 같아.”
적시타가 숙취에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성호를 긋고 밥상을 펴 라면을 가져왔다. 숙취 없이 말짱한 망원이 적시타를 다독여 앉혔다. 우리는 종이컵을 앞접시 삼아 라면을 먹었다.
“근데 어제 그 아이템은 정말 괜찮은 거 같은데.” 적시타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사업?” 내가 대꾸했다. “그치? 오디오북 삽입하는 거 대박난다니까.”
“그럴 리가. 얘가 얘기한 거. 진짜 해도 될 거 같아.”
적시타가 젓가락으로 망원을 가리켰다. 망원이 젓가락을 들어 그의 젓가락을 눌러 내렸다.
“아이디어만 있다고 사업이 되나 뭘.”
“그러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내서 대박 친다니까.” 적시타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좋은 아이템은 당장 선점해야지.”
“술이 덜 깨셨네.” 망원이 적시타의 종이컵에 라면 국물을 떠 줬다. “정 아까우면 네가 하세요. 사업 잘 키워서 나중에 취업이나 시켜 줘.”
“진짜지? 나 한다?” 적시타가 나를 돌아봤다. “같이 할래?”
“그러던가.”
열한 시에 펜션을 나서서 시내로 향했다. 망원과 적시타는 F시에서 놀다가 저녁에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나마 번화가인 곳으로 친구들을 데려갔다. 길을 걷다 녀석들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백화점 옥상에서 거대한 관람차가 아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나는 고갯짓으로 관람차를 가리켰다.
“저게 F시의 명물이야.”
“무너지기라도 하면 엿되는 거 아니야?” 망원이 말했다.
“저래 봬도 십 년 넘게 끄떡없었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슬슬 무너질 때도 됐다고 봐야지.”
백화점 일층 매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적시타가 여기서 관람차를 타봤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정돈된 건물 내부에 마음이 놓인 눈치였다. 옥상 출입구 안쪽에는 회전초밥 집과 프랜차이즈 분식집이 입점해 있었다. 감자 토핑이 들어간 핫도그를 하나씩 사들고 나섰다. 옥상 전체가 작은 놀이공원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미니 바이킹과 회전목마, 모노레일, 공중그네, 거대한 관람차가 있었다. 그중 관람차만 다른 것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했다. 인조잔디에 디딤돌로 낸 길을 따라 매표소로 향했다.
매표소 직원의 말을 들어보니 정작 작동하는 기구는 관람차뿐이었다.
“다른 건 탈 수 없나요?” 적시타가 물었다.
“손님이 없어서요.” 매표소 직원이 지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마 오시는 분들도 관람차만 타시거든요.”
“말했잖아. 저게 우리 동네 명물이라니까.” 내가 말했다.
“맞아요. F시의 상징이죠.” 매표소 직원이 맞장구쳤다.
우리는 관람차 표를 끊었다. 매표소 직원이 관람차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손수 문을 열어줬다. 우리가 차례로 타자 그는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문을 잠갔다.
“이렇게 조그만 놀이공원은 처음 와 봐.” 망원이 창문에 붙어서 바깥을 보며 말했다.
“우리 동네에 유명한 유원지 있는 거 알아?” 적시타가 망원에게 물었다.
“아, 거기 알아. 바이킹 엄청 무섭다고 유명한 데 아니야?”
“맞아. 바이킹 빼고 다 망한 걸로도 유명한 데고. 다른 놀이기구는 작동을 멈춘 지 오래돼서 다 녹슬고 고장 났는데 바이킹만 쌩쌩해. 어릴 때부터 매년 망한다, 문 닫는다, 소문만 무성한데 아직도 매일 열고 있어. 바이킹만 타러 오는 마니아 손님들이 꽤 있나 봐.”
“이 관람차의 미래 같군.” 망원이 창틀을 토닥이며 말했다.
“과소평가하네. 현재일걸.” 내가 덧붙였다.
관람차가 올라갈수록 도시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다. 사람으로 들어찬 번화가들, 구획을 가로지르는 넓고 좁은 도로와 자동차들, 드문드문 조성된 볼품없는 공원, 미적 감각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건물들의 조합, 그 속에서도 위용을 드러내는 세련된 고층건물들, 세월에 패인 자국이 선명한 고가도로, 도시 경관의 끄트머리에서 해변으로 접어드는 지점의 우람한 공장지대. 나는 그 풍경을 한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질색하고 혐오를 끼얹을 만한 곳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조용히 수긍했다. 물론 그런 깨달음이 변화시키는 것은 없었다.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곳은 F시의 번화가가 아니라 상동과 하동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는 F시의 상징이 바다와 산업, 멍청한 대관람차일지 몰라도, 내게는 어린 시절이 눌어붙은 상동과 하동이 F시의 전부였다. 관람차는 맑은 하늘을 계속 휘저었다. 망원은 창문에 바짝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적시타는 창밖의 공중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볼 거 없죠?” 매표소 직원이 관람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아뇨, 근사하던데요.” 마지막으로 내린 적시타가 대답했다.
“야경이 끝내주니까 해 지고 다시 와요.” 매표소 직원이 자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야근의 도시거든요.”
망원과 적시타는 해가 지기 전에 F시를 떠났다. 며칠 내내 단체 메신저에 여행 사진이 차례차례 올라왔다. 나는 복학 직전까지 한 달여를 더 호텔에서 일했다. 그때까지도 발렛은 도둑 운전을 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말했다.
“너 가고 나면 나도 돌아오지 말아야겠다.”
“네?”
발렛이 씩 웃어 보였다. 어떤 의중이 담긴 미소가 분명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떠날 때가 되니 다시금 F시의 누구와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다. 그간 망원과 적시타가 친하게 지냈다던 남자 후배 한 명을 소개받아서 룸메이트가 됐다. 돈을 아끼자는 명목이었지만, 절약적인 면 외에는 정말이지 얻을 게 하나도 없었다. 성격도 성향도 취향도 맞지 않아 점점 대화가 없어졌다. 얼마 안 가서는 자취방에서 자주 마주치지 않도록 무언의 생활패턴 조정이 이뤄졌다.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고 나는 그 시간을 유영하듯 지냈다. 평일에는 과제와 공부를, 주말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부는 그럭저럭 할 만했다. 돌대가리 후배들이 많아서 학점도 어렵지 않게 딸 것 같았지만, 입학 초기에 말아먹은 학점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업계획 따위는 가뿐히 잊고 지냈다. 나에게 그날의 이야기들은 한여름 해변에서 자리장사를 위해 펼쳐둔 파라솔처럼 한철 지나 걷어버린 너스레에 불과했다. 그러나 적시타에게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사업 계획을 꼼꼼히 짜면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교내 창업 지원 시스템과 국가에서 주관하는 청년 스타트업 지원 공모에 사업계획서를 넣었다.
십이월 초순, 학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데 적시타가 다가와 식탁을 두들겼다.
“어쩐 일이세요, 선배님?”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호칭이 왜 그래?”
“먼저 졸업하시니 선배님이죠.”
“됐고요, 이거나 봐.”
적시타가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청년 스타트업 지원 공모에 당선됐다는 메일이었다. 내가 어리둥절해 있자 그는 가방에서 서류더미를 꺼내 건넸다. 거기에는 망원이 제시하고 적시타가 구체화한 사업 계획이 면밀히 적혀 있었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계획서를 살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마음 깊은 데서 작고 푸른 이파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적시타는 학교의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도 선정돼서 약간의 지원금과 사무실을 제공받는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막연히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첫 장부터 다시 검토하며 손가락으로 탁탁 식탁을 두들겼다. 국가와 학교가 인정한 가능성이라면 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데?” 내가 말했다.
“같이 하기로 했다, 너.”
“당연하지.”
그 순간 내 마음은 푸른 잎이 내뿜는 환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사업계획서를 읽던 그 순간에 움튼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가슴을 짓눌러온 구질구질한 환경과 캄캄한 전망 가운데서도 내게는 비현실적으로 푸르른 낙관의 잎이 있었다. 더 이상 자라지도 않고 항상 한 장의 이파리로만 살아있는, 하지만 아무리 짓밟혀도 꺾이거나 죽기는커녕 찢어지지도 않는, 눈부시게 푸르른 낙관의 잎. 내가 심거나 키운 것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어쩌면 내가 태어나던 순간에 함께 움텄을 그 이파리는 늘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속삭였다. 그런 목소리가 없었다면 나 같은 놈이 어떻게 노력이라고는 일절 하지 않은 채 퍼질러져 살 수 있었을까? 낙관은 나를 주저앉히고 정체시키며 내 삶을 망칠지도 몰랐지만, 동시에 나를 달랬고 평온하게 했으며 하루를 살게 했다. 이따금 대책 없는 낙관이 나를 망치리라는 것을 깨달을 때면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뽑히지도 죽지도 않는 낙관의 잎 앞에 나는 또 주저앉고 절망하고 괴로워하다 결국 마취되었다. 이파리의 말에 따르면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될지 몰랐다. 적시타가 내민 계획서 앞에서 낙관의 잎은 또 속삭이고 있었다.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고.
이파리의 지껄임이 예언이든 개소리든, 나는 적시타의 제안을 기회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십이월 말부터 출근했다. 학교는 산학협력관의 한 층을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아홉 팀에게 사무실로 지원했다. 그중 우리 팀만 유일하게 사무실 한 곳을 통째로 썼다. 대신 다른 방보다 훨씬 비좁았고 창문도 출입문에 달린 좁고 길쭉한 유리창뿐이었다.
사무실에는 사용감이 있는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갖춰져 있었다. 나는 N이 창업 선물로 해외에서 결제해 준 노트북을 사무실에 업무용으로 뒀다. 마음가짐을 다잡자는 의미로 노트북 옆에 비숍을 나란히 세워 두었다. 휑한 사무실 구석에는 값싼 스탠딩테이블을 설치해 인스턴트 커피와 티백, 간식거리들을 구비해 두었다. 책장과 프린터기도 중고로 들이며 사무실의 구색을 갖춘 뒤에는 하루 빨리 현실감을 찾으려고 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추운 연말연시의 한시적인 이벤트 같았다.
사무실에 입주한 지 일주일이 채 안 됐을 때였다. 업무를 보던 저녁에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들겼다. 문에 달린 긴 창문으로 다른 팀의 학생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우리는 들어오시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옆 사무실에서 왔는데요, 많이 바쁘세요? 저녁은 드셨나요?”
“네. 무슨 일이세요?” 적시타가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저희 사무실에서 포틀럭 파티를 하기로 했거든요. 같은 층에 있는 분들 모두 함께하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시간되시나요?”
크리스마스이브면 나흘 뒤였다. 우리는 어정쩡하게 초대를 수락했다. 나는 후라이드 치킨과 뱅쇼를, 적시타는 모듬회 한 접시와 사케를 준비했다. 파티는 주최한 팀을 포함해 세 팀이 입주해 있는 넓은 사무실에서 열렸다. 창문에 알파벳 풍선으로 메리크리스마스 문구를 붙여 놓았고, 경쾌한 크리스마스캐럴이 틀어져 있었다. 아홉 팀 중 시간이 맞는 일곱 팀이 모였다. 각자 자기소개와 본인이 참여하는 사업을 간략히 소개했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사업도 있었고 듣기에 혹할 만한 사업도 있었다. 나는 뱅쇼를 한 잔 들고서 사람들의 눈빛을 읽었다. 어색함 사이로 묘한 설렘의 빛이 물결처럼 흘렀다. 나는 적시타의 사업계획서를 읽었을 때 느꼈던 가능성, 뭔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구 분의 일로 조각나는 기분을 처음 느꼈다. 주최자가 손뼉을 두 번 치더니 “저희 일 얘기는 삼십 분 안에 딱 끝내고, 얼른 놀죠. 크리스마스이븐데.” 하고 말했다. 모두 수긍했다. 남은 사람들은 더욱 간략하게 소개를 마쳤다. 그러자 할 얘기가 없었다. 일관성 없이 준비한 음식과 술을 먹고, 흐지부지하게 파티는 끝났다. 내년 연말에도 함께 보자는 이야기가 중얼중얼 오갔다.
새해가 오고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도, 급여도 없이 매일을 일했다. 우리는 파트너로서 잘 맞았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적시타가 학술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을 내면, 나는 그것들 중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을 선별해 커다란 기획으로 엮어냈다. 우리는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계획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데 사활을 걸었다. 커피와 피로회복제를 달고 살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이따금 다른 사무실에서 담배 냄새가 스며들어왔다.
“누가 담배 또 담배 피우나 보네.” 내가 중얼거렸다.
적시타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생각에 잠길 때마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한참동안 물고 있는 버릇이 생겼다. 흡연구역은 너무 멀었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책상 가까이 있었다. 나는 답답할 때면 물티슈로 비숍을 닦았다. 소원을 들어 줄 요정이라도 깃든 듯 신경 써서 닦아댔다. 사업에 관한 한, 구 분의 일로 조각난 가능성일지라도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확신을 가지고 추진해 확실한 성과를 가져와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업가보다는 도박꾼의 기질로 창업에 임했다. 가능한 한 빨리 눈에 띄는 결과가 나오길 바랐다. 혹시라도 망한다면 하루 빨리 길을 틀어버릴 수 있게.
다른 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복도를 소등하는 시간이 지나도 사무실들은 환했다. 아예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분리수거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면 종종 다른 사무실의 학생들과 마주쳤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처럼 빛나던 그들의 눈빛은 점차 스스로에게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빛으로 바뀌어갔다. 투명하지만 분명한 부피감을 지닌 일회용 용기들이 분리수거함에 쌓일 때마다 매번 다른 감정이 마음의 밑바닥에 침전했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나는 수업과 아르바이트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자취방에서는 자고 씻는 게 전부였다. 같이 살던 후배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독립선언을 하는 바람에 아르바이트를 더 늘려야 했다. 피로에 절어 사무실로 가던 날, 경비가 산학협력관 게시판에 공지문을 붙이고 있었다. 실내 흡연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무실에 가자 적시타가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사무실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거야?” 내가 투덜거렸다.
“사무실을 하나 사. 그럼 원 없이 피우게 해줄게.”
“네네, 커피로 버티겠습니다. 한잔 타 줄까?”
적시타가 괜찮다는 표정으로 텀블러를 흔들었다. 얼음이 달각거렸다. 나는 스탠딩테이블로 가서 전기포트에 물이 담긴 걸 확인하고 스위치를 눌렀다.
“내일 아홉 시 수업이야. 일찍 퇴근해야 돼.”
“근데 커피는 왜 타?”
“퇴근 못 할 거 아니까.”
종이컵에 스틱 커피를 붓고 뜨거운 물을 따랐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종이컵을 휘휘 돌리며 자리로 가는데 출입문의 긴 유리창 밖으로 누군가가 힘없이 지나갔다. 기저귀 브랜드 사의 로고가 그려진 박스를 들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옆 사무실 팀원이었다. 적시타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렇게 나가는 팀만 벌써 두 번째야.”
“아마 더 나가겠지?”
그게 우리는 아닐 거라는 생각과 우리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 중 어떤 것이 먼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책상에 널브러져 있던 스틱 커피 한 봉지를 더 뜯어서 뜨거운 커피에 부었다. 고개를 양 옆으로 꺾고 노트북을 켰다. N이 메일로 보내온 영국 에든버러 사진이 바탕화면으로 깔려 있었다. 문서 파일을 열었다. 노트북 옆에 놓인 비숍을 괜스레 연필꽂이 쪽으로 살짝 돌리고 업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