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불꽃놀이」 ②
구월에도 한동안 무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나는 망원과 적시타와 시간표를 상당 부분 맞춰 함께 다녔다. 비광이 없고 시내에 살다보니 자잘한 술자리에 참석할 일이 줄었다. 나는 일교차가 꽤 벌어진 구월 말이 되어서야 망원과 적시타와 셋이서 술자리를 가졌다. 우리는 곱창 집에서 곱창과 막창을 굽고 소주를 깠다. 망원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는 우리들더러도 평소에 사진을 남기라고 했다.
“네가 잘 찍어 주는데 뭘.” 내가 말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니까.”
“그래, 네 주량은 기록할 만하지.”
나는 망원 옆에 놓인 수두룩한 빈 소주병들에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적시타도 덩달아 휴대폰에 현재 시각을 띄워서 앵글 앞으로 가져다댔다. 망원이 왜 그런 걸 찍냐고 하는 사이 나는 인스타그램 피드에 사진을 올렸다.
“오후 여덟 시 십이 분. 소주 둘, 넷, 아홉 병. 죽이네.” 적시타가 웃었다.
“누가 보면 나 혼자 마신 줄 알겠네.” 망원이 투덜거렸다.
“네가 여섯 병은 마셨지.”
망원은 다섯 병이라고 정정했다. 우리는 술값을 계산하고 코인노래방에 갔다. 시간제로 선결제를 한 뒤 녀석들이 먼저 방에 들어갔고, 나는 방문 앞까지 갔다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은 뒤 복도로 나와 휴대폰을 켰다. 아까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댓글이 달려 있었다. 집에 올 수 있겠냐는 N의 농담조 섞인 댓글이었다. 나는 끄떡없다고 답글을 단 뒤 잠시 복도에 서 있었다. 노래방 호실이 기억나지 않았다. 젠장. 나는 어깨를 들썩여 가방을 고쳐 메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셋이 있는 단체 메신저에 먼저 집에 간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느닷없이 중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러니까 순전히 N 때문이었다. 동창 중 누군가가 N이 남긴 댓글을 타고 그의 계정을 살핀 게 분명했다. 소식이 퍼졌는지 중학교 동창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얼굴만 아는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N과 친하다는 사실을 의아해했다. 내게 먼저 연락해 간을 본 녀석들은 N에게도 연락하기 시작했다. N은 더 이상 녀석들의 연락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 학기 중간고사를 마쳤을 때였다. N이 주말에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갑자기? 왜? F시에서?” 나는 탐탁찮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여기 시내에서. 근처에 자취하는 애들만 서너 명 모이기로 했어. 같이 가자.”
“누구 모이는데?”
N이 한 명 한 명 이름을 댔다.
“잘 다녀와.”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안부도 전하지 마. 친한 애들 아무도 없으니까.”
“애들 다 너 보고 싶어 하던데?”
“널 보고 싶은 거겠지.”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재밌을 거야.”
N이 끈질기게 설득해대는 통에 결국 황금 같은 주말 오후 술집으로 끌려갔다. 우리는 약속장소인 시내의 한 술집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에 술집 뒤편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곧 중학교 동창 두 명이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검마와 피에로가 N의 양팔이었다면, 녀석들은 손가락쯤 되는 놈들이었다. 그들은 N과 반갑게 근황을 나눴다. 나는 멋쩍게 담배만 피워댔다.
“둘이 같이 산다고?”
몸집이 바위 같은 녀석이 물었다. N이 그렇다고 했다.
“친한 줄 전혀 몰랐네.” 바위가 호탕하게 웃더니 내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감싸고 흔들었다. “와, 너 담배도 피웠냐?”
빌어먹을.
“엄청 친하지. 일단 들어가자.”
N이 화제를 돌리며 내 목덜미에서 녀석의 손을 자연스럽게 떼어냈다.
“우리도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 바위 옆에 따데기처럼 붙어 있는 놈이 말했다.
“아, 미안하다.” 내 말에 모두들 돌아봤다. “난 가 봐야 돼.”
“뭐?”
따데기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나는 N을 흘끗 보았다. 녀석도 당황한 낯빛을 빠르게 바꾸고 있었다.
“리포트 쓰러 가야 돼. 중간고사 대신 나온 과제거든. 얼굴이나 잠깐 보러 들른 거야.”
“아직도 시험기간이야? 밥이라도 먹고 가지.”
“시간이 없어서.” 나는 휴대폰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또 보자. 잘 놀고.”
N이 내 팔을 가볍게 쥐고는 이따 집에서 보자고 말했다. 나는 술집에 들어가는 녀석들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었고, 문이 닫히자마자 욕설을 씹어대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정처 없이 쏘다니다 한갓진 골목의 카페에 들어갔다. 평범한 외관과 달리 목재와 항해 관련 소품들로 내부를 인테리어 해 꼭 방주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바이킹을 연상시키는 거구의 남자가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두른 채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반소매 아래로 근육질의 팔뚝에 새겨진 닻 모양의 타투가 눈에 띄었다. 메뉴에는 커피와 함께 수제맥주도 있었다. 가장 싼 맥주를 한 잔 시키고 창가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손님이라고는 노트북을 두들기는 대학생 두 명이 전부였다.
곧 수제맥주와 과자 몇 조각이 나왔다. 나는 맥주를 몇 모금 마신 뒤 소파에 드러눕듯이 몸을 늘였다. 바위의 둔탁한 손길이 목덜미에 남아 있는 기분이라 거칠게 문질렀다. 그래.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동창들을 만나자 애써 밀봉한 십대의 기억은 물론 당시 나의 상태와 기질까지 순식간에 원상복구 되는 기분을 느꼈다. 속을 게워내고 싶을 만큼 역겨웠다.
노트북을 하던 두 학생이 카운터로 가 맥주를 주문했다. 그들은 자리로 돌아가며 카운터를 힐끔대더니 시시덕거리면서 자신들의 팔뚝을 큼지막하게 가늠하는 것으로 사장의 근육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단순히 부러워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생각을 간명하게 정리했다. 인생이란 비웃음당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어떻게든 남을 조롱할 만한 여유를 쟁취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과정이 인생의 전부일지 몰랐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수제맥주 한 잔 값이면 집에서 소주 두세 병은 깠을 텐데, 텁텁한 입 안을 혀로 훑었다. 며칠 전부터 같이 가자고 떼를 쓰던 N을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렸다. 해장라면이라도 끓여 줄 생각으로 콩나물과 땡초, 라면 다섯 개들이 한 팩을 샀다. 소주도 한 병 샀다. 그날 밤 라면에 소주로 저녁을 때우고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는데 N이 전화를 걸어와 마중을 부탁했다. 전에 없이 만취한 목소리였다. 곧장 달려 나가 그가 말한 위치로 향했다. N은 불 꺼진 백화점 옆 경계석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가 그의 입술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야, 괜찮냐?”
나는 그의 입에서 담배를 빼내 하수구에 던졌다. 집으로 부축해 돌아가는 내내 N은 횡설수설하며 알아듣지 못할 말들만 해댔다. 미리 펴 둔 이부자리에 그를 앉히고 한숨 돌렸다.
“진짜 친구는 너뿐인 거 알지?”
N이 벌게진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알아,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
책상 스탠드를 켜고 불을 끄는 순간, 그가 한 말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아는 한 N이 인사불성으로 취한 것은 그날이 유일했다. 다음 날 무슨 술을 그렇게나 마셨느냐고 물었다. N은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번은 이렇게 마셔 보고 싶었지. 아, 근데 진짜 뒈질 것 같다.”
“일어나.”
나는 코가 뻥 뚫릴 만큼 매운 냄새가 나는 해장라면을 끓여 방에 가져갔다. N이 죽상을 하고서 일어나 힘없이 라면을 휘저었다. 그는 평소에도 몸을 장난감 다루듯 놀렸다. 지루하고 무료할 때면 커피나 고 카페인 음료를 연달아 마셔대거나 줄담배를 연신 피워댔다. 카페인과 니코틴 탓에 맥박이 빨라지고, 심박 수가 증가하니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그 탓에 감각이 극단적으로 예민해지는 상황이 재미있다고 했다.
“빨리 죽고 싶어 안달이지?”
“정확히 반대야. 삶을 풍성하게 즐기려고 노력 중이지.”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즐기긴.”
N은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몸이 정신을 지배하지는 않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지. 커피를 마시면 잠이 깨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담배를 피우면 안정도 각성도 되고. 몸은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나약하지만, 그래서 인간의 온 존재를 통제 가능하게 해 주지.” 그는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서 먹으려다 말고 “내성은 조심해야겠지만.”이라고 덧붙인 뒤 면발을 입에 넣었다.
“어찌됐든 자극에 지배당한다는 거 아니야?”
“멍청한 놈들이나 그러지. 적절히만 사용한다면 몸은 물론 정신과 감정까지도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어.”
“네, 네. 어제는 꽤나 멍청하셨나 보네요.”
“혁신적이었던 거지. 실험가의 정신이랄까.”
N이 능청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해장라면을 싹 비우고 고맙다며 그날 저녁으로 족발과 회를 샀다. 술도. 웃고 떠들고 취하고, 그렇게 즐겼다.
우리는 꼬박 일 년을 함께 살았다. 스무 살이 끝날 무렵, 졸업을 앞둔 선배들은 내게 좋은 선배가 되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나도 아직 학교에 적응을 못 한 상황에 후배들이 들어온다니 당황스러웠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 학년이 되었고, 후배들과는 잘 지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쌩까고 살았다. 적시타와 망원은 나름대로 후배들과 잘 지냈다. 녀석들은 꾸준히 학점을 잘 받았고 나는 당당히 그들의 깔창이 돼 주었다.
이 학년 일 학기가 끝날 때쯤 N은 자주 산책을 나가자고 졸랐다. 이따금 피곤해서 나가지 말까 하다가도, 우리가 언제 또 같이 살아 보겠냐는 N의 말을 들으면 금세 주섬주섬 현관으로 나섰다. 커피와 담배를 들고 깊은 밤을 거닐면 함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몰래 십대를 끊어내려던 마음가짐과 무관하게, N이 내 이십대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는 줄곧 뿌리 없이 유영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뿌리를 없앨 수 없다면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N 역시 나의 뿌리를 이루는 것들 중 하나였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십대에서 유일하게 꺼내 보고픈 추억이었다. 둘만이 공유했었던 비밀스러운 시간 속에서 나는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었고, 그 기분은 성인이 되어 함께한 시간들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자취방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시내와 골목을 거닐며 나누던 대화들, 담배를 피우는 순간들 모두 언제 돌아봐도 마음이 청량해지는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스물한 살 여름, N의 후배에게 자취방을 넘겨주고 우리는 보름 간격으로 각자 입대했다. 입대 후 처음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N과 전혀 휴가를 맞추지 못했다. N은 입대하면서 예전처럼 SNS를 모두 끊었는지 이따금 이메일로 연락했다. 나는 휴가를 나올 때마다 본가에 잠깐 있다가 망원과 적시타를 만나러 학교로 가곤 했다. 한번은 F시에서 문니가 불러내 술자리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예닐곱 명 모인 자리였다. 모두들 여전하면서도 십대 때의 치기 어린 모습들은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우려가 무색할 만큼 기분 좋게 놀고 헤어졌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동에 늘어선 가로등을 지나쳐 걸을 때는 왠지 마음이 흔들렸고, 다시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전역 직후에는 본가에서 지냈다. 스물세 살의 늦봄이었고, 복학하려면 대여섯 달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출퇴근해야 하는 바닷가의 유명 호텔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리어카에 시트와 이불을 가득 싣고 층층이 돌아다니며 침구를 바꾸고 호텔 식당의 음식물쓰레기를 내다버리는 일이었다.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일도 그렇지만 남의 잠자리를 정리하는 것은 꽤 구역질나는 일이었다. 헝클어진 이불은 간밤의 몸과 몸짓을 그대로 간직했다. 퇴근길 버스에서 나는 가끔 그들이 누구일지 그려보고는 했다. 하룻밤 묵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탈까. 어떤 집으로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버스가 어디쯤을 달리고 있든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수거한 침구를 세탁업체 차량에 싣고 주차장 흡연구역에 갔다. 담배를 피우던 발렛이 알은체했다. 나보다 두 살이 많고 여기서 일한 지 일 년이 넘은 사람이었다.
“오늘도 시승했어요?”
“말들은 좋아. 주인들이 문제지.” 발렛이 호텔 위를 올려다보며 건들거렸다. “인성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뭐 잘났다고 저 사랑스런 차들을 밖에 두고 호화를 즐기는지.”
발렛은 매사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어느 날 담배를 피우다 비밀 하나를 알려 준다고 했다.
“손님들이 차를 맡길 때 분위기를 봐. 호캉스 즐길 게 분명하잖아? 그럼 파트너한테 일 잠깐 맡기고, 그놈들 차를 몰고 해안도로를 존나 달리고 오는 거야.”
“미쳤어요?”
“제정신은 아니지. 기름 약간 채워서 돌아오면 문제없어.”
“주행거리 확인하면 들통 나지 않아요?”
“여행까지 와서 그딴 거 일일이 확인하는 새끼들이 어디 있어? 애초에 렌터카도 많고.”
“파트너가 신고하면요?”
“그럴 리가. 그 새끼는 해안으로 세 바퀴씩 돌걸.”
“CCTV에 찍히지 않아요?”
“아직까진 뭐 문제없었어. 매니저한테 걸리잖아? 그럼 열쇠 주면서 ‘형님도 한 바퀴 돌고 오시죠.’하면 만사 오케이지.” 발렛이 공손하게 열쇠를 내밀며 낄낄거렸다. “처음에는 걸릴까 봐 쫄렸는데, 이제는 걸렸으면 싶어. 다 때려치우고 싶거든. 군대 다녀왔다고 했지?”
“네.”
“그럼 알겠네. 군대 다녀오면 남자 된다, 사람 된다, 다 개소리인 거. 주위를 둘러봐. 세상 천지에 내 피 같은 시간만 고여 썩고 있던 거지.”
칠월에 망원과 적시타가 F시로 놀러왔다. 어느새 사 학년 일 학기까지 마친 그들은 더 바빠지기 전에 졸업여행을 계획했다. 그들은 셋이서 삼박사일 일정을 짜자고 했으나 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단체 메신저가 며칠 잠잠하길래 저들끼리 여행 계획을 짜는구나 싶었으나, 곧 그들은 바쁜 나를 위해 직접 F시로 놀러오겠다는 천인공노할 계획을 통보했다. 말리려 했으나 이미 물샐 틈 없이 삼박사일 일정을 짜 둔 뒤라 도리가 없었다.
여행 첫날 아침, 망원과 적시타가 F시로 내려왔다. 나는 첫째 날 퇴근하고 합류할 수 있도록 둘째 날에 휴무를 맞춰 놓았다. 아침부터 터미널 사진을 필두로 풍경과 음식 사진들이 차례차례 단체 메신저에 올라왔다. 나는 사진을 훑어보다가 휴대폰을 직원용 캐비닛에 넣고 잠갔다. 메신저에 올라온 사진들은 내가 아는, 내가 살고 있는 F시의 모습이 아니었다. 당연하겠지만 여행지와 삶의 터전은 도무지 같을 수 없었다.
퇴근하고 평소 버스를 타던 곳의 맞은편에서 버스를 탔다. 녀석들은 일출 명소 근처에 펜션을 잡아 놓았다. 세 정류장을 지나 내렸다. 망원과 적시타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고생했네.” 적시타가 말했다. “너희 집은 여기서 멀어?”
“응. 여기 온 것보다 귀갓길이 열두 배는 더 멀어.”
친구들을 데리고 하동에 갈 생각은 없었다. 볼 만한 것도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없었다.
펜션에 짐을 두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해가 길어 아직 날은 밝았다. 자그마한 어선들이 만에 모여 들고 있었다. 우리는 식당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콘크리트길은 식당 수조에서 흘러나온 비린내 나는 물에 젖어 있었다. 적시타와 망원이 앞장서서 작은 횟집에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이 적당한 자리에 앉아 물회를 세 개 시키고 소주 두 병을 깠다. 녀석들은 즐거워 보였다. 아까 단체 메신저에 올린 사진들을 다시 꺼내 보며 낮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우리보다 먼저 식사를 하던 아저씨들이 계산을 하고 나갔다. 망원이 그쪽 테이블에 놓인 빈 소주병을 셌다.
“둘, 넷, 일곱. 야, 그래도 우리가 저 아저씨들보다는 많이 마셔야 하지 않겠냐?”
“저 분들 딱 봐도 주당 사이즌데.” 적시타가 고개를 저었다. “술 앞에서 배짱부리는 거 아니야.”
“초저녁에 다 재워 버릴 생각이면 더 시키든가.” 나도 덧붙였다.
망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주 두 병을 더 시켰다. 식사를 마치고도 술이 약간 남아 해물파전을 시켜 함께 먹어치운 뒤 공금으로 계산했다.
바다가 하늘보다 먼저 짙어졌다. 해안을 등지자 산 너머로 태양이 하늘을 진하게 물들이며 저물고 있었다. 망원이 그 풍경을 가리켰다.
“하늘 너무 예쁘다. 저거 보니까 칵테일 먹고 싶지 않아?”
“너도 정말 어지간하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편의점에서 값싼 포켓사이즈 와인 세 병과 네 캔에 만 원 하는 세계맥주를 사들고 해변으로 갔다. 해변의 모래는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드문드문 펼쳐진 알록달록한 텐트들 위로 인공 색소 같은 석양이 풍성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텐트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중학생 때만 해도 여름날 저녁이면 해변에 고기 굽는 냄새가 바다의 짠 내만큼이나 진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펜션? 모텔이나 호텔? 아니면 F시를 떠났거나 다시 찾아오지 않는 걸까. 순간 이러다 F시가 망하지 않을까 싶었다. 헛웃음이 잇따를 만큼 가벼운 생각이었고, 뭐 이대로 망해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큰길에 불꽃놀이 용품을 늘어놓은 노점이 보였다.
“저거 해 볼래?”
무심코 던진 말에 녀석들이 벌떡 일어나 노점으로 향했다. 여러 종류의 불꽃놀이 용품이 포장되어 있었다. 적시타가 스파클라를 여러 개 골랐다. 나는 분수류 폭죽과 로망캔들을 뒤적이며 물었다.
“이런 것도 살까?”
“시끄러워.” 적시타가 대답했다.
“말이 심하시네?”
“너 말고. 폭죽이 시끄럽다고.” 그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것만 사자.”
우리는 스파클라를 한움큼 사서 해변에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았다. 망원이 스파클라로 적시타와 나를 번갈아 겨누며 불을 붙여 달라고 했다.
“맞다. 아까 담배 샀어야 하는데.” 내가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이참에 끊어.” 망원이 놀리며 불꽃이 튀는 스파클라로 원을 그렸다.
나는 적시타에게 담배 한 개비만 달라고 했다. 그는 한 개비 꺼내 물고 스파클라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내 얼굴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돗대야.”
“에이씨.”
나도 스파클라에 불을 붙였다. 요란하고 단발적인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뱅글뱅글 돌릴 때마다 노을과 비슷한 빛깔의 곡선이 잠시 선명하다 사라졌다. 망원의 지휘 아래 우리는 스파클라의 끝을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망원이 앵글에 불꽃을 담는 동안 적시타는 피우던 담배를 내게 건넸다. 내가 쳐다보자 태연하게 담배를 한 번 더 까딱였다. 담배를 건네받아 한 모금 빨고 다시 건네줬다. 우리가 번갈아 담배를 피우는 동안 사진을 다 찍은 망원이 이제 꺼지라며 연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스파클라 한 개씩을 태운 우리는 모래밭에 앉아 아직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언제 올라올 거야?” 적시타가 내게 물었다.
“다음 달엔 가야지. 조만간 방 구하러 들를 생각이야.”
“이번에도 시내에서 살게?”
“그땐 룸메가 있으니 거기서 살았지.” 나는 공연히 바지자락을 툭툭 털었다. “지금은 비싸서 못 살아.”
“이번엔 그 친구 분이랑 안 살아? 복학 시기 겹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럴 생각이었는데 친구가 갑자기 해외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돼서 쫑났어.”
나는 먼 바다를 보며 곧 한국을 떠날 N을 떠올렸다. 해가 완전히 져서 칠흑 같은 파도가 흰 거품을 끓이며 해변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작은 배 한 척이 요란한 모터소리를 내며 우리와 좀 떨어진 잔교를 향해 갔다. 나는 망원과 적시타의 근황도 물었다. 망원은 이대로 마지막 학기를 다닐지,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적시타는 이미 여러 군데 입사 지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맥주를 한 캔씩 비운 뒤 녀석들은 스파클라를 또 태웠다. 나는 맥주를 한 캔 더 땄다. 그새 미지근해져 맛이 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