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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Nov 18.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12화

2부 「불꽃놀이」 ①

   나는 친구들에게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고 한 뒤 N과 함께 펍의 뒷골목으로 나갔다. 어둠이 내린 상가들 사이로 미지근한 밤공기가 끈적거렸다. 담 아래 녹이 낀 추파춥스 깡통이 담배꽁초를 잔뜩 물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담배를 꺼내 물며 물었다. N이 불을 붙여 줬다.

   “어떻게 되긴. 여기서 학교 다니지.” 그도 담배를 피워 물며 물었다.

   “어느 학교 다니는데?”

   N은 담배를 빨며 자신의 왼쪽 어깨를 툭툭 쳤다. 학과 잠바에 내로라하는 명문대 로고와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본 캠퍼스는 서울에 있으나 N이 입학한 인문학부 캠퍼스가 지방에 신설돼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안 덥냐? 유월에 무슨 과잠이야.”

   “애들이 잘못 주문해서 보기보다 얇아. 할 줄 아는 게 공부들밖에 없어서.”

   “그러니까 몽땅 좌천됐지. 취업도 못하는 쓰레기들, 이러면서.”

   “몹시 정확해.” N이 고개를 쳐들고 웃으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공중으로 솟구친 담배연기가 맥없이 풀어졌다.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연락 한번 안 하냐.”

   “너는 했냐? 대학 갔다는 얘기도 없어, 재수한다는 얘기도 없어. 괜히 실수라도 할까 봐 말도 못 꺼냈잖아.”

   “내 사전에 재수란 없지.”

   “응, 존나게 재수 없지.”

   N은 학과 동기들과 한잔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도 기숙사에서 지내는 터라 오늘은 동기 자취방에서 신세를 진다고 했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펍으로 올라갔다. 기숙사 통금시간을 지키려면 곧 나서야 했다. 망원이 누구냐고 묻기에 친한 친구라고 대답했다.

   지하철에서 망원은 오늘 찍은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고, 적시타는 멍하니 짐칸의 광고판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휴대폰을 켰다.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팔로워가 생겼다고 알림이 떠 있었다. N이었다. 게시물도 프로필 사진도 없는 그의 계정을 잠시 보다가 맞팔로우를 하고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기숙사 퇴실까지는 열흘 정도가 남았으나 생활비가 다 떨어져 조금 일찍 고향으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틀에 걸쳐 조금씩 짐을 쌌다.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지만 책도 읽고 망원과 적시타도 만나며 게으름을 피웠다. 미스터 생쥐는 퇴실 날짜까지 기숙사에 남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가시나요?”

   “아뇨, 저는 비전동으로 갑니다.”

   미스터 생쥐가 붙박이창을 가리켰다. 오르막길 끝에 비전동이 세련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나는 식겁했다.

   “기숙사 발표가 벌써 났어요? 신청도 못 했는데?”

   “비전동에 대해 들어 본 적 없어요?” 미스터 생쥐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분히 말했다. “믿음동과 소망동에 입실한 학생들은 자동으로 비전동 입실 신청이 돼요. 다른 동과 달리 비전동은 상시 합격 통보가 가능하죠. 입실 기준은 아무도 모릅니다. 비전동은 퇴실 기간도 따로 없어요. 한번 입실하면 사고 치지 않는 한, 학생이 원할 때까지 거주할 수 있어요. 물론 학생이 원할 경우에는 언제든 퇴실 가능하고요.”

   “입실 기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나요?”

   “정확히 알려진 건 없어요. 아마 성적이 우수하거나 학교에 돈 대는 큰손들이 추천한 학생들이 아닐까, 추측만 하는 거죠.”

   “학교 운영이 그렇게 불투명하면 문제 삼는 학생들이 있지 않아요?”

   “관심 없는 학생들이 태반입니다. 본인도 비전동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잖아요. 물론 비전동에 관한 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하지 않고 학교 자체 재단에서 대는 비용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죠.”

   “뒷말 나올 구멍을 단단히 막아 뒀네요.” 나는 펼쳐놓은 캐리어를 닫은 뒤 지퍼를 잠갔다. “아무튼 그런 혜택이라면 비전동 학생들은 졸업까지 걱정이 없겠어요.”

   “뿐만 아니에요. 내부에 스포츠 시설과 휴게시설, 편의점, 각종 식당 등 꽤 많은 시설이 있다더라고요. 전부 이십사 시간 이용 가능하고요. 무엇보다 큰 장점은 방마다 화장실이 있다는 거죠.” 미스터 생쥐가 씩 웃었다.

   “듣던 중 가장 부럽네요. 선배님은 아마 성적이 좋으셔서 들어가는 거겠죠?”

   “저도 몰라요. 이번 학기 성적이야 아직 나오지도 않았고요.” 그는 붙박이창 가까이 다가갔다. “이유 따윈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선물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아요. 이제 해야 할 건 혜택을 최대한 누리면서 공부하는 것뿐입니다. 아, 맞아요.”

   그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작별 선물입니다. 관상용으로만 두기는 아까워요.”

   상자에는 잉크병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미스터 생쥐가 내 책상 선반을 가리켰다. 비숍과 플래티넘 프레지던트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한정판이라며 잉크 상자를 가리키고 살짝 미소 지었다. 나는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참, 혹시 아르바이트할 생각 있어요?”

   미스터 생쥐가 물었다. 학기 중에 아껴둔 말을 쏟아내는 사람처럼 갑자기 말이 많아진 그가 낯설고 신기했다. 나는 무슨 아르바이트인지 되물었다.

   “교직원 식당 청소예요. 원래 제가 하던 일인데 두 달 동안 기숙학원에 들어가게 돼서요. 근무시간이 짧아서 큰돈은 못 벌어도 용돈벌이는 될 겁니다. 다음 달부터 출근이니 생각 있으면 연락 주세요.”

   나는 그에게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흡연구역인 공동 테라스에서도 비전동이 보였다. 비전동을 향한 난간에 양팔을 걸치고 담배 연기를 뿜었다. 어른들이 무슨 게임을 하든 학생들은 본인을 위해 자극을 받으라던, J재단 장학 후원 행사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비전동도 비슷한 용도이리라 생각했다. 학생들의 공부 의욕을 증진시키기 위한 자극제. 그러나 내게는 별 약효가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 나도는 동기부여 영상이나 공부 자극 영상을 봐도 그 순간만 뜨거워질 뿐, 실천으로 이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이따금 받는 자극만으로도 삶이 뒤바뀐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나의 그릇은 고만고만했다.     


   고속버스는 F시로 향했다. 나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를 모교라고 여기지 않았듯 F시 역시 고향이라 여겨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열한 살에 잦은 이사를 끝내고 정착한 그곳에서 나는 줄곧 이방인이었다. 또래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던 시절부터 어린이집이며 유치원, 놀이터, 교회, 학원 등에서 서로 알고 지냈다. 같은 교복을 입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다가도 친구들이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면 나는 마음속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추억의 연대에 내가 낄 틈이라고는 없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야 어느새 내 생의 절반을 보낸 곳이 F시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고향일 수밖에 없는 곳인데도 그 사실이 너무나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평생 다른 곳을 출신지로 말하던 F시에서, 이제는 F시를 고향이라고 말하는 나의 삶이 웃기는 아이러니 같았다. 사람들이 고향을 물을 때마다 F시라고 대답했지만, 그럴수록 F시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갔다. 내게는 고향이 없었다. 버스 통로에 누인 캐리어를 보고 이 가방을 놓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스무 살의 설익은 예감은 희미해질 테지만, 그 순간에는 분명한 예감이자 계시요, 선언이었다. 고속버스가 F시에 다다르기도 전에 나는 방학만이라도 함께 지낼 수 있는 동기를 구하고자 연락을 돌렸다. 다음 학기도 문제였지만, 교직원 식당 청소와 병행할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면 운이 좋을 경우 자취방 보증금을, 나빠도 두어 달치 월세와 생활비를 벌 수 있을지 몰랐다. 보증금은 부모님께 빌리거나 생활비 대출을 받으면 될 테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탁탁 두들겨댔다.

   컨테이너로 마구 지은 공장,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벼가 자라는 논. 그새 하동은 약간 더 낡아 보였다. 시간 저편에 묻혀 있던 냄새를 맡으며, 종유석이 자랄 것만 같은 음침하고 어두운 굴다리를 지났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하동이 드러났다. 바싹 여위어 뼈의 윤곽마저 드러낸 비쩍 마른 알몸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 동네는 차라리 네온사인 한 점 없는 캄캄한 밤이 나았다.

   부모님은 왜 자주 오지 않느냐고 투덜거리며 반겨 줬다. 고향 친구들에게는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이따금 부모님과 바닷가에 갈 때 말고는 방에만 있었다. 기억이 도처에 깔린 F시에서 유일하게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내 방은 방공호나 다름없었다. 종일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동기들과 연락을 나눴다. 자취방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같은 지역으로 대학에 간 고교 동창들에게도 연락을 돌릴까 했지만, 차마 그러지는 않았다.

   부모님과 식사하던 도중 나는 조만간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어요.”

   일단 지르자는 심정이었다. 부모님은 지낼 데도 없는데 집에 있으라고 했다. 원한다면 근처 업체에 일자리를 구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시간표만 잘 맞추면 개강하고서도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잔말 말고 집에 있으라는 호통만 돌아왔다. 밥을 억지로 입에 쑤셔 넣고 방에 들어갔다. 부아가 치밀어 주먹을 꽉 쥐었다. 책상이라도 내리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허공에 내질렀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잠시 서 있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미스터 생쥐에게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메시지를 남긴 뒤 휴대폰을 침대에 던졌다.

   될 대로 되라는 인생도 망하라는 법은 없는지, 며칠 뒤 코스모스 졸업을 앞둔 선배가 방을 이어받을 생각 있냐며 연락해왔다. 나는 다음 날 선배의 방을 보러 갔다. 학교 앞이 아니라 시내에 위치해 있었고, 가격에 비해 넓고 깔끔한 방이었다. 본가로 돌아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룸메이트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머리를 싸맸다. 버스에서 내릴 때 N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도 자취방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 자취방을 보러 다녀왔다고, 함께 지낼 룸메이트를 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N은 자취방의 위치를 물었고 나는 시내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시내를 중심으로 각자 정반대편에 학교가 있었다. 선배의 자취방은 얼추 그 중간쯤 있는 셈이었다.

   “좋네. 방만 있으면 같이 지내도 재밌지 않을까? 넌 괜찮아?”

   “너무 좋지.” 내가 말했다. “부모님은 좀 난리 치시겠지만.”

   “부모님?”

   “기숙사에 안 들어가냐고 게거품 물고 있거든. 성적 달려서 안 되는데 참.”

   “내가 한번 뵈러 가 볼까?”

   “네가?”

   이튿날 N은 바로 F시로 내려왔다. 양손에 과일바구니와 비싼 와인을 들고서. 부모님은 좋아라 했고, 김샐 정도로 흔쾌히 자취를 허락했다. 그들은 시트콤에 나오는 푼수 장인장모가 부잣집 출신의 예비사위를 대하듯 N을 대했다. N은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자신이 보증금을 댈 테니 월세만 반반씩 내자고 했다. 내 사정을 봐준 것이 분명했다. 이삿날 N과 나의 부모님들은 서로 처음 만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N에게는 물론 그의 양친에게도 과하게 친절했는데, 나로서는 그것이 좀 민망했다.

   시내는 낮이나 밤이나 사람이 많았다. 불빛과 인파의 진원지인 번화가를 등지고 걷다 보면 소음은 줄고 내 발소리만 커졌다. 그러면 실제로는 좁아지는 골목이 점점 넓어져만 가는 기분이었다. 복제한 것만큼이나 비슷비슷한 건물이 가득한 원룸가 한쪽에 웅크린 작은 방이 우리의 거처였다.

   방학 동안 아침이면 나는 학교로, N은 시내의 토익학원으로 갔다.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거나 책을 읽었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교직원 식당에 가서 청소했다. 이따금 적시타나 망원이 공부나 동아리 활동을 하러 학교에 들르면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망원은 집들이 한번 안 하냐고 졸라댔지만, 나는 룸메이트가 있어서 힘들다고 거절했다. 자취방에 친구를 들여 개판 나는 집을 여럿 봤기에 N과 나는 서로에게 좋은 핑계가 되어 줬다.

   번화가라 물가가 만만찮긴 해도 집 근처에 즐길 게 많았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피시방을 가고 당구를 치고 술을 마셨다. 작은 갤러리도 여럿 있어서 전시가 바뀔 때마다 들르기도 했다. N이 가 보자고 해서 클럽에도 가 봤다. 원래도 관심이 없었지만 역시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나는 자취방에 있는 것이 좋았다. 혼자여도 좋았고 N과 함께여도 좋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웠다. 십대에서 드물게 건질 만한, 향수를 느낄 만한 몇 안 되는 순간들을 현재로 이어나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고향이라는 의미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사람에게 깃들 수 있다면, N에게서 느끼는 이 감정이 고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기분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N은 다달이 용돈을 받아서 썼다. 빠듯해 보이지 않았다. 자취한 지 두 달째에 그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빔 프로젝터와 스크린, 스피커를 구입했다. 나는 함께 포장을 뜯으며 물었다.

   “이거 다 얼마야?”

   “얼마 안 해. 사십만 원 좀 넘었나?”

   “그렇군요, 도련님.”

   “싼 거 고른다고 스탠드형으로 샀어. 그거 좀 잡고 있어 봐. 스크린 달게.”

   받침대를 세우고 스크린을 위에 건 뒤 아래로 잡아당겨 아래쪽 걸쇠에 걸었다.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연결해 영상 크기와 높이를 조절했다.

   “마저 세팅할 테니까 맥주랑 과자 좀 사올래?” N이 프로젝터를 조작하며 말했다.

   나는 지갑을 챙겨 편의점으로 갔다. 하이네켄 네 캔과 팝콘 한 봉지를 샀다. N은 스피커 연결까지 마쳐 놓았다. 맥주를 냉장실과 냉동실에 두 캔씩 넣고 함께 옥상에 올라갔다.

   “영화 틀어 봤어?” 내가 담뱃불을 붙이며 물었다.

   “음질 죽여. 스피커에 돈 들인 보람이 있어.”

   “오. 무슨 영화 볼 거야?”

   “<리플리> 어때?”

   모르는 영화였다. 무슨 영화냐고 물었다.

   “구십 년대 말에 나온 영화인데, 소설이 원작이라 스토리도 탄탄하고 연기랑 연출도 좋아. 나는 지금까지 세 번은 더 봤을걸.”

   우리는 재떨이로 쓰는 화분에 담배꽁초를 던져 넣고 내려갔다. 침대와 맞닿은 벽에 이불을 쌓아 소파처럼 꾸미고 불을 껐다. 냉동실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왔다.

   <리플리>는 무명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호텔 보이로 일하던 청년 톰 리플리의 일대기다. 어느 날 손을 다친 친구 대신 행사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은 리플리는 친구의 프린스턴 대학 재킷을 입고 성공적으로 연주를 마친다. 행사가 끝난 뒤 선박기업 부호 허버트 그린리프 씨 내외는 리플리에게 연주를 잘 들었다며, 혹시 자신의 아들 디키 그린리프를 아느냐고 묻는다. 디키도 프린스턴 대학 동문이라는 것이다. 거짓말과 임기응변에 능한 리플리는 디키와 친구인 척 능청을 부린다. 그린리프 씨는 리플리를 집으로 초대한 뒤, 아들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혹시 직접 데려와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대가는 천 달러. 리플리는 제안을 수락하고 재즈광인 디키와 친해지기 위해 재즈 음반을 수없이 들으며 여행을 준비한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곧 디키와 친해지는 데 성공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둘 사이는 미묘하게 틀어져 간다. 어느 날 리플리는 디키를 따라 산레모로 여행을 떠나고, 곧 이것이 디키가 준비한 작별여행임을 깨닫고는 다투기 시작한다. 디키는 자신에게 집착하는 리플리를 끝없이 조롱하고, 리플리는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한다. 이후 패닉에 빠진 것도 잠깐, 거짓말은 물론 타인 흉내내기, 서명 위조에 능한 리플리는 디키로 신분을 위장해 유럽 생활을 즐기며 갖가지 사건에 연루된다.

   “My funny Valentine. 저 노래 책에서 봤는데.” 나는 리플리가 재즈 바에서 노래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무슨 책?”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제목 좋네.” N이 맥주를 들이켰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세 편씩 영화를 봤다. 녀석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리플리>를 좋아해 몇 번 더 돌려 봤다. <터미널>이나 <데블스 에드버킷>, <택시 드라이버>, <콘스탄틴>, <하이스쿨 뮤지컬>, <매트릭스>, <다크나이트>, <인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 취향을 가리지 않고 봤다. 간혹 <러브 액츄얼리>나 <어바웃 타임> 같은 로맨스 영화를 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왜 이걸 너랑 보고 있느냐며 서로 투덜거리고는 했다.

   내로라하는 명작들을 꽤나 감상했지만 N은 <리플리>를 최고로 꼽았다. 영화의 원작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로 ‘리플리 5부작’ 중 첫 권에 속한다. 국내 번역본은 절판된 지 오래였다. N은 나와 지내는 동안 틈틈이 인터넷을 뒤져서 중고로 책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의 기분과 기질을 유지하고 그와 어울리는 얼굴 표정을 짓는 거였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자리를 잡았다.”* N이 커피를 마시며 한 대목을 읊었다. “흥미롭지 않아?”

   “흥미롭긴 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리플리를 좋아하는 거야?”

   “누구나 한번쯤 타인으로 사는 삶을 꿈꾸지 않아? 자신이 선 데를 진창이라 생각하면서 말이야.” N이 검지를 들어 위쪽으로 반원을 그렸다. “벗어나고 싶은 거지. 가능한 한 재밌는 방법으로.”

   “리플리처럼?”

   “소설이잖아. 리플리가 저지르는 사기는 인생을 건 도박이야. 대리체험, 대리만족. 얼마나 짜릿해.”

   N은 커피 잔을 비우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은 이해할 법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러그 아래 깔린 작은 이물질을 밟은 것처럼, 들추기에는 귀찮으나 은근히 거슬리는 불편함을 느꼈다. 나 역시 내가 서 있는 진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비관적인 전망이 가슴을 짓눌렀다. 내 소원은 졸업 후 F시로 돌아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앞날은 한 발짝만 잘못 내딛어도 그 빌어먹을 동네로 나가떨어질 위태로운 외줄이었다. 결국 오도가도 못 하고서 자괴감에 허우적거리는 게 나의 현실이었다. N은 경쾌하게 책장을 넘겼다. 그는 자신이 발 담근 진창이야말로 내게는 빛나고 달콤한 세상임은 개의치 않은 채, 리플리의 행적에 빠져들었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재능 있는 리플리』, 홍성연 옮김, 그책, p.142.

참고로 2024년 기준 을유문화사에서 ‘리플리 5부작’ 전권이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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