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면도날」 ①
보스턴백을 얹은 캐리어를 계단 꼭대기까지 힘껏 끌어올린 뒤 아래를 내려다봤다. 빌어먹을 계단이 못 해도 백 칸은 족히 넘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찬바람이 목구멍을 할퀴었다. 계단 꼭대기에서 완만한 경사로로 이어진 가까운 건물에 다가갔다. 크기에 비해 과하게 웅장한 주랑현관이 딸린 건물이었다. 캐리어를 기둥 옆에 세워 두고 문자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소망동 206호. 2월 ××일 13시부터 입소 가능.
간판을 확인하고 건물로 들어섰다.
캐리어를 들고 힘겹게 중앙계단을 올라 206호를 찾았다. 방은 놀라울 정도로 비좁았다. 이층 침대 한 채와 서로를 등진 칸막이 책걸상 두 세트가 구비된 가구의 전부였다. 방 가장 안쪽에는 블라인드가 달린 붙박이창이 있었고, 천장에 달린 낡은 환풍기가 환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화장실인 줄 알고 열었던 현관 좌측의 공간은 샤워기와 수건걸이만 달랑 놓인 욕실이었다. 볼일을 보려면 복도의 공중화장실을 써야 했다. 전반적으로 별로였지만 기분만은 근사했다. 붙박이창 아래에 가방들을 쌓아 두었다. 아무래도 캐리어와 보스턴백 중 하나는 본가로 돌려보내야 할 듯싶었다.
개강까지는 열흘 정도 남아 있었다. 입소 가능한 첫날에 부리나케 온 나와는 달리 룸메이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사항에 따르면 룸메이트끼리는 학과, 학년, 학번이 겹치지 않는다고 했다. 침대 옆 책상에서 회전의자를 빼 앉았다. 붙박이창 너머로 좀 더 오르막에 위치한 비전동이 보였다. 학교 기숙사는 여학생 전용인 믿음동, 남학생 전용인 소망동, 우등생 전용인 비전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숙사 앞 고행의 계단을 생각하니 우등생들이 더 고생이겠다 싶었다. 회전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며 여기서 지낼 날들을 가늠하다가 침대 모서리에 발을 찧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비좁은 방이었다.
간간이 기숙사에 입소하는 학생들만 오갈 뿐 교정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패딩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채우고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큰길을 따라 걸었다. 캠퍼스는 후방에 높은 산과 접해 있어 곳곳에 완만한 언덕이 져 있었다. 당장 청설모나 고라니가 튀어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학교를 벗어나 식당이 밀집한 골목을 지나자 술집이 즐비했다. 비싸고 세련되어 보이는 펍부터 <텅텅비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을 단 술집까지 다양했다. 원룸가 근처인데도 개강을 안 한 탓인지 거리가 썰렁했다. 나는 멋쩍게 술집들을 둘러보다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골랐다.
“신분증 보여 주세요.” 바코드를 찍던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면도기를 챙기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가장 싼 일회용 면도기와 담배 한 갑, 라이터까지 계산했다.
비닐봉투를 손목에 끼우고 학교로 돌아갔다. 빌어먹을 고행의 계단이 몇 칸인지 속으로 세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내려오던 늙수그레한 경비가 길을 막아섰다.
“기숙사생이에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봉투에 뭐 들어 있어요?”
“장 본 건데요.”
경비가 비닐봉투 안을 힐긋거렸다. 다부진 체격의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릴 적 꽤나 장난꾸러기였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내가 별거 없다며 봉지 안을 보여 주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술이네. 기숙사에선 음주행위 금지예요. 벌점 들어간다고.”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신입생이에요?” 경비가 가슴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몇 호예요?”
“아직 안 마셨는데요.”
“주사부리면 벌점 부과할 겁니다. 먹고 방에서 나오지 마요. 오늘만 봐주는 거야.”
그는 수첩에 펜을 대고 눈짓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기왕 봐주시는 김에 싸그리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방까지 같이 갈까요?”
“304호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벌점 관리는 경비가 아니라 기숙사 사감의 몫이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룸메이트는 없었다. 선배인 그에게 책상과 침대를 먼저 고를 선택권을 주려 했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침대 옆 책상에서 감자칩과 맥주를 먹었고, 다 먹은 뒤에는 역시 고민하다 불을 끄고 이층 침대로 올라갔다. 사흘 뒤에 있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제외하면 개강까지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잠자리가 낯설어 뒤척임이 길어졌고, 문득 아까 고행의 계단이 몇 칸인지 세다 말았던 게 생각났다. 몇까지 셌는지 생각하다 곧 잠들었다.
개강 첫날, 오전 여섯 시가 조금 안 돼서 눈이 떠졌다. 월요일이었고 첫 수업은 아홉 시였다. 누운 채로 뒤척였지만 다시 잠들 것 같지 않았다. 침대 사다리를 더듬어 내려와 불을 켰다. 이른 아침의 한기가 방 안에 팽팽했다. 룸메이트는 아직 입소하지 않은 상태였다.
욕실에 선반이 없어 샤워 용품을 바닥에 두고 번번이 허리를 굽혀가며 썼다. 머리와 몸을 다 씻고 거울에 서린 김을 손으로 닦아낸 뒤 면도했다. 아버지가 쓰던 고가의 묵직한 삼중날 면도기와 달리 일회용 면도기는 매우 가볍고 날카로웠다.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지만, 다시금 뿌예지는 거울에 한눈을 팔다 턱 한쪽을 베였다. 비누거품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쓰라린 턱을 거울에 비춰 봤다. 그 순간 아직까지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 그러니까 타지생활이 일박이일의 캠프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의 삶으로 계속 되리라는 것, 비로소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피를 물로 씻어내고 휴지로 닦았다. 몹시 쓰라렸다.
첫 주 강의는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이라 부담이 없었다. 개강 첫날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한 남학생이 와서 알은체했다. 같은 학과 동기인 그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뒤풀이에서 장기자랑으로 비광 코스프레를 해 눈길을 끌었었다. 비광은 자신도 기숙사에 산다고 운을 뗐다.
“동기 중에 기숙사 사는 애들,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갈래?”
“몇 명 모이는데?” 내가 물었다.
“너랑 나 포함해서 네 명.”
“어디서 먹어?”
“기숙사 식당. 애들은 지금 기숙사에 있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달리 먹을 데도 없었다. 기숙사로 가는 동안 비광은 이틀 뒤 있을 개강총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꽤나 들뜬 모습이었다. 기숙사 지하에 들어섰을 때, 비광은 고개를 쑥 내밀어 식당 앞에 서 있는 여학생 두 명을 살피더니 손을 흔들었다. 망원과 적시타였다.
“쟤들이야?” 내가 물었다.
“응.” 비광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만세하듯 팔을 쭉 뻗었다. “기숙사 팸 첫 회식이다!”
“왜 저리 들떴어.” 나는 중얼거리며 따라갔다.
기숙사 식당은 뷔페식이었다. 제육볶음과 상추를 적당히 챙겨 모여 앉았다. 기숙사 팸 첫 회식의 주요 논의 사안은 개강총회였다. 비광의 입장이야 내내 들었고, 망원과 적시타의 생각이 궁금했다. 비광은 신입생들 모두 그날 차례로 자기소개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셋 모두 질색했다.
“신입생 오티 때 다 했는데, 그걸 왜 또 해?” 나와 사선에 앉은 적시타가 내 심경을 정확히 대변했다.
“그야 그날 안 온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그게 우리 잘못이야?”
“아 맞다. 깜빡했네.” 내 앞에 앉은 망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그날 본가 가는 날이다.”
“거짓말. 다음 날 수업 있잖아.” 비광이 빙글거렸다.
“에라이.”
“근데 다들 고향이 어디야?” 비광이 물었다.
“여기, 에라이.” 망원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나도 여기.” 적시타가 웃으며 덧붙였고,
“난 R시. 너는?” 비광이 내게 물었다.
“고향?” 아, 어, 음. “F시.”
“생각해서 답할 문제야?” 비광이 웃었다.
적시타가 내 얼굴을 빤히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쳤어?” 그가 턱을 가리켰다.
“아, 오늘 면도하다가 살짝 베였어.”
“밴드라도 붙이지.”
“나 있어.”
망원이 가방 앞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냈다. 이미 피딱지가 앉은 터라 필요할까 싶었지만, 일단 고맙다며 받아 두었다. 어색한 상냥함들에 체할 것 같았다. 비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강총회에 가야 할 이유를 오만 팔천 가지 들먹였다.
“그래, 그래. 인생은 멀리 봐야지.” 망원이 쌈을 싸며 말했다. “나중까지 생각하면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지, 입학하자마자 삐딱선 타서 좋을 거 없잖아?” 비광이 맞장구를 쳤다.
“더 멀리 보면 결석도 나쁘지 않긴 해.” 적시타가 말했다.
“내 말이.”
망원과 적시타가 건배하듯 서로의 쌈을 맞부딪쳤고, 비광은 순간 난색을 표하다가 다시 침착하게 개강총회에 가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들과 친해지는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은 자리를 뜨고 싶어 밥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개강총회 겸 신입생 환영회며 학년별 모임과 같은 학과 행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기숙사 팸의 첫 논의가 무색하게 우리는 거의 모든 행사와 술자리에 전원 참석했다. 망원과 적시타와 나는 부르면 가고 아니면 말자는 주의였는데, 비광이 거의 모든 자리에 참석하면서 성실히 우리를 물어다 날랐다. 선배들의 술자리에 불려가고 동기들과 안면을 트면서 정신없는 나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기숙사생이라 밤새도록 술자리에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통금시간에 맞춰서 돌아왔는데도 만취해 침대 사다리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 벌써부터 아쉬운 술자리보다 피하고 싶은 술자리가 많았다.
개강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기숙사로 돌아가니 룸메이트가 방 가운데 캐리어를 두고 그 위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앞머리를 차분하게 내린 그는 얼핏 생쥐를 닮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짐 안 푸셨어요?” 내가 물었다.
“침대나 책상 중에 하나를 바꿔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지금은 후배님이 책상에서 고개를 돌리면 침대에 있는 제가 보이는 구도라서요. 칸막이가 있다고 해도 서로 불편할 겁니다.”
그의 말투는 깍듯하고 새초롬했다. 나는 침대 옆 책상에 놓인 내 책들과 프레지던트 만년필, 그리고 비숍을 봤다.
“그러네요.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요.”
“술 마셔요?”
“가끔요.”
“그럼 아래층을 써요.” 그가 아래층 침대를 가리켰다.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말고.”
“선배님은 술 안 드세요?”
그는 그렇다고 했고,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다. 우리는 이불만 바꿔서 생활했다. 무진장 늦었던 입소와 달리 룸메이트의 생활패턴은 큐브를 맞추듯 매우 규칙적으로 돌아갔다. 평일 내내 첫 수업을 아홉 시로 맞추고 오후 일곱 시에 기숙사 식당에서 석식을 먹은 뒤 방에 돌아왔다. 통금시간인 열한 시에는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다. 과제나 시험 때문에 바쁜 기간에도 기상 시간을 당길지언정 취침 시간을 미루지는 않았다. 이따금 끼는 검은 뿔테 안경은 그를 더욱 고지식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비광은 내 룸메이트가 미스터 생쥐라고 불린다고 했다. 선배들을 따라 총학생회를 비롯해 여기저기 발을 넓히던 비광은 우리 학과뿐 아니라 교내 잡다한 이야기들을 많이 주워 왔다. 기숙사 팸끼리 학교 앞 칼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던 날, 녀석은 식사 내내 미스터 생쥐 이야기만 해댔다. 미스터 생쥐 역시 학과 수석을 놓친 적 없는 수재라고 했다.
“그 사람 강박증도 있다던데 사실이야?”
“몰라.” 나는 칼국수를 앞접시에 옮겨 담으며 대꾸했다.
“같이 살면서 뭘 몰라.”
“관심 없어.” 나는 망원과 적시타를 봤다. “근데 믿음동도 방마다 화장실 없냐? 매번 공중화장실 가는 거 귀찮아 죽겠네.”
“거기도 없어? 뭔 놈의 기숙사가 고시텔만 못 해.” 망원이 말했다.
“왜? 미스터 생쥐가 화장실 자주 간다고 뭐라 해?” 비광이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화제를 돌리려고 해도 그가 입만 열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벼르고 벼르다 한소리 하려는데 적시타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왜 그렇게 생쥐 씨한테 관심이 많은데? 톰과 제리야?”
“재밌잖아. 그 선배 괴짜라던데.”
“나라면 학과 수석인 생쥐 선배가 왜 비전동이 아니라 소망동에 있는지가 더 궁금할 것 같은데.”
“어, 그러네.” 망원이 젓가락 끝을 이빨로 살짝 깨물었다. “비전동에 들어가는 기준이 뭐지?”
“미스터 생쥐는 워낙에 괴짜라 자기가 비전동 안 간다고 했을지도 몰라.” 비광이 말했다.
“그냥 방을 바꿔 줘.” 적시타가 체념한 듯 내게 말했다.
“생쥐고 수석이고 나발이고, 다들 본인 학점 신경 써야 할 때야. 중간고사 금방 온다?” 망원이 말했다. “학점 잘 챙겨야 기숙사 팸도 유지할 거 아냐.”
“솔직히 너희는 통학해도 되잖아. 진짜 열심히 해야 하는 건 우리지.” 비광이 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알면서 그렇게 열심히 노세요?”
“놀다니? 이 친구가 뭘 모르네. 술자리나 인간관계들이 다 인생의 내실을 다지는 과정이야.” 비광이 어르신 흉내를 냈다.
“통학 안 해.” 적시타가 끼어들었다. “기숙사에서 지내는 게 공부에 집중도 잘 돼.”
망원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굳이 돈 쓸 필요 있나? 집도 가까우면서.” 비광이 중얼거렸다.
“뭘 그렇게 따지고 드세요? 다 사정이 있는 거지.” 망원이 아이를 어르듯 대꾸했다.
“무슨 사정?”
“음? 저 취조하세요?”
“이야,” 내가 말을 끊었다. “나는 우리 칼국수가 방금 나온 줄 알았어. 한 삼십 분 전에 나왔는데 말이지. 소주 한잔할래?”
망원과 적시타, 비광 모두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을 보면 성적이 형편없던 내가 기숙사에 들어온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서서히 기울던 가세는 지난 이 년간 급속도로 기울어졌다. 통학이 싸게 먹힌다고 여긴 부모님은 내가 F시의 대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그곳에 원서조차 넣지 않았다. 철없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학기 기숙사 신청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으나, 어리석던 나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술과 담배만 찾았다. 이 악물고 공부하는 오기나 근성 따위는 없는 놈이었다.
미스터 생쥐는 주말마다 외박을 내고 고향에 갔다. 덕분에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종일 방에 틀어박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기숙사에 술을 들이기는 쉬웠다. 가방에 넣고 들어가면 끝이니까. 경비는 나를 알아보는 눈치였지만 알은체하지는 않았다. 학기가 진행될수록 과제도 공부할 양도 늘어났지만 나는 최소한의 과제만 하고 책 읽는 데 시간을 쏟았다. 망원과 적시타가 외려 내 성적을 더 신경 썼다. 부모님이 작은 인쇄소를 운영한다는 적시타는 본가에 들를 때마다 수업자료나 전공 관련 논문을 잔뜩 프린트해와 우리에게 나눠 줬다. 망원은 스펙을 쌓을 요량으로 시사토론 동아리에 들어가 스크랩한 자료들을 종종 공유했다. 나는 그들에게 해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이따금 녀석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이 도서관에 있는지 찾아봐 주는 별 볼 일 없는 수고를 하면서, 녀석들이 어미새처럼 물어다 주는 양질의 정보를 따박따박 받아먹었다. 개강할 때부터 기숙사 팸을 외치던 비광은 날이 갈수록 나가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기숙사 팸과 스터디를 하거나 드물게 선배들의 술자리에―비광 때문에―불려나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환풍기를 끄고 침대 헤드에 베개를 받친 뒤 기대어 책을 읽고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붙박이창이 들이는 좁은 볕과 부유하는 먼지들, 평온하고 고요한 시간은 모종의 자유를 선물했다. 자유가 시간의 질감마저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그 비좁은 방에서 느꼈다.
대학에 온 뒤로 고향 친구들과의 연락은 피했다. 지나온 시간이 현재에 배어나오는 것을 최대한 경계했고, 가능하다면 십대라는 시절을 통째로 걸어 잠그고픈 마음이었다. 자연스레 줄어드는 동창들의 연락 가운데 문니만은 꾸준히 연락이 왔다. 여전히 눈치 없고 친근한 녀석은 미술에의 열정 또한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건성으로 그의 연락을 받았지만, 미술에 푹 빠진 새로운 삶을 그가 잘 영위해나가길 진심으로 바랐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만족스러운 지금의 생활을 지키려 애썼다.
학교 축제를 앞둔 사월 초순의 오후, 나는 공강 시간을 때우러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마침 노트북을 챙기러 기숙사에 들른 미스터 생쥐와 함께 방을 나섰다. 고행의 계단 양 옆 화단은 만개한 벚꽃들로 화사했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다 밑에서 열심히 올라오는 비광을 발견했다. 녀석은 그 무렵 선배들의 명을 받아 축제 무대에 설 동기들을 섭외하러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보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싫어.” 나는 그의 면전에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비광이 미스터 생쥐에게 눈을 빛내며 인사한 뒤 나를 쳐다봤다. “야, 장기자랑이 뭐 어렵다고 그래.”
“어렵다는 게 아니야. 싫다는 거지. 나는 결단코 싫어.” 나는 경쾌하게 거절하며 씩 웃었다. “비켜. 도서관 가야 해.”
“아씨, 선배가 애들 꼭 모으라 했는데. 망원이랑 적시타는?”
“교양 수업 발표 준비한다고 바쁘던데.”
“하여간, 범생이들. 이따 저녁 먹을 때 전화해. 선배님도 열공하십쇼.”
비광이 익살맞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다시 기숙사로 올라갔다. 미스터 생쥐가 녀석을 돌아보더니 내게 물었다.
“축제 장기자랑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 쟤는 무대 체질인가 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뭘 하겠대요?”
“몰라요. 코스프레라도 하겠죠.”
“코스프레?”
“아, 그게” 내가 웃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뒤풀이 때 장기자랑을 했었거든요.”
“요즘도 그런 걸 하는 데가 있어요?”
“뭐, 뒤풀이자리에서, 원하는 애들만요. 아무튼 그날 쟤가 갑자기 이 사람 저 사람한테서 옷이랑 모자랑 우산까지 빌리더니 비광처럼 꾸며서 나온 거예요. 화투짝에 그 비광이요. 그리고는 노래를 불렀는데,” 나는 비광이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요염한 자태로 노래하던 모습이 떠올라 비위가 상했다. “아무튼 다들 질색하면서 자지러졌어요. 그래도 선배들 눈에 들었는지 여기저기서 빼놓지 않고 부른다더라고요. 애들 모으는 거 보니 이번에는 어벤져스라도 꾸리나 보죠.”
“같이 해 주지 그래요?”
“뭘요? 장기자랑이요?” 나는 질색했다.
“신입생 때 놀아 보는 거죠.”
“선배님은 하셨어요?”
“참가했었는데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뭘 하셨는데요?”
“파이 값을 외웠어요. 소수점 아래로 삼천 자리까지 욀 수 있거든요. 근데 오십 개도 안 듣고 끊어버리더라고요.”
“확실히, 예, 장기이기는 하네요.” 나는 가방끈을 조이며 멋쩍게 웃었다.
미스터 생쥐의 진심 어린 충고에 힘입어 나는 비광에게 장기자랑으로 파이 값을 외우자고 했다. 비광은 그렇게 나가기 싫어하는 줄 몰랐다며 체념했다. 축제 당일, 녀석은 동기 네댓 명과 함께 아이돌 댄스를 연습해 무대에 섰다. 망원과 적시타는 나와 함께 관중석에서 박수를 쳤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다들 즐기는 분위기였다. 장기자랑이 끝난 뒤 우리는 무대에 선 동기들과 함께 축제 주점에서 닭꼬치에 소주를 먹고, 먼발치에서 초청 가수들의 공연을 구경했다. 완연한 봄날에 낭만적인 취기가 돌았다. 다른 가수가 무대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비광과 적시타와 담배를 피우러 갔다.
“야, 다 같이 외박하자.” 비광이 물었다.
“오늘? 어디서?”
내가 물었다. 비광은 동기들과 <텅텅비어>에서 한잔 더 한 뒤, 그중 한 명의 자취방에서 밤새 놀기로 했다고 말했다. 적시타가 담배연기를 깊게 빨았다가 뱉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 패스. 내일 아홉 시 수업이야. 망원도 힘들걸.”
“걔도 같은 수업인가?” 내가 물었다.
적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무대가 시작됐는지 다시금 음악과 환호소리가 커졌다.
“야, 불편하면 너랑 망원은 같이 놀다가 집에 가서 자면 되잖아.” 비광이 담배를 쥔 손으로 적시타를 가리켰다.
“집?”
“본가.” 비광의 얼굴에 어릿하게 웃음기가 비쳤다. “아, 거기가 더 불편하겠다.”
그가 묘하게 거슬리는 어조로 덧붙이더니 볼이 합족해지도록 담배를 빨며 적시타를 쳐다봤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말했다.
“취했냐? 내일 아홉 시 수업이라잖아.”
“가만있어 봐.” 적시타가 나를 저지하듯 손을 들어 올리며 비광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를 불편해할 이유는 뭐고, 집이 불편할 건 또 뭔데?”
“아니, 뭐, 남자애들이 더 많으니까.”
“집은?”
“집도, 뭐,” 비광이 조소를 지우지 않고서 말했다. “멀기도 하고, 늦었으니까. 내일 아홉 시 수업이라며.”
“정말 그런 뜻이야?”
비광이 당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시타가 그를 빤히 보다 담뱃불을 튕겨 끄더니 먼저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비광이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씨발, 졸라 예민하네.” 그가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너도 이해 안 되지?”
“뭐가?”
“아니,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집이 있으면서 왜 기숙사에 들어오냐고.”
“이해가 필요한 문제야?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는 거지.”
“뭐 있어, 분명.”
비광이 가래침을 요란하게 긁어 뱉었다.
“응?”
“뭐 있다고, 씨발.” 녀석이 고개 숙여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뱉었다. “모르겠어. 쟤들 우리랑 좀 안 맞지 않냐? 공부 좀 한다고 뻐기는 것도 좆같고.”
“뻐기긴. 쟤들이 우리 챙겨 주는 거지.”
“누가 챙겨달라고 했냐고.” 그는 적시타가 사라진 쪽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야, 막말로 저런 애들 때문에 타지에서 온 애들이 큰 돈 써가며 자취하는 거라니까. 그게 우리가 될 수도 있었어.”
“그렇다고 해도 쟤들 탓은 아니지.”
“실드 겁나 치네. 너도 술 마시러 안 갈 거지?”
“응. 피곤해.”
“내일 일어나면 연락해. 해장이나 하자.”
“됐어. 컵라면 먹을 건데 뭘.”
“그걸로 속이 풀리냐?” 그가 내 팔을 툭 쳤다. “전화해. 해장국 살 테니까.”
“됐네요. 천천히 피워라. 먼저 간다.”
내일 연락하라고 소리치는 비광을 뒤로 하고 나는 기숙사로 향했다. 길을 따라 거의 다 진 벚꽃과 초록의 새순 들이 가로등 불빛에 언뜻언뜻 비쳤다. 고행의 계단에 다다랐을 때 앞서 오르는 두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망원과 적시타인지 궁금했지만 따라잡지는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살짝 늦잠을 잤을 뿐 말짱한 컨디션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저녁 늦게 기숙사 앞에서 비광을 마주쳤다. 그는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며 투덜거렸다. 훗날에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주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는데, 내 앞에서 태연하게 투덜거리는 비광이 전날 만취한 채 동기의 자취방에서 망원과 적시타를 맹렬하게 씹어댄 것을 나는 짐작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그들의 행동거지와 태도를 지적했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기숙사에 들어왔겠냐면서, 집이 멀쩡치 않으니 그런 거라고 떠들었고, 자기만의 상상으로 오염된 단서들을 기반으로 그들의 사생활과 가정사, 가정형편 등을 지나치게 추측했으며, 술을 마시고 또 마시면서 외모와 차림새를 상스러운 말들로 평해댔다. 돌이켜보면 비광은 그날 이후로 망원과 적시타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만, 원래도 수많은 무리들에 발을 담그던 녀석이라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의 말들이 돌고 돌아 우리 귀에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불쾌해했고 망원과 적시타는 분개했다. 그 주 주말에 내가 본가에 다녀오는 동안 망원은 적시타와 함께 비광을 만나 이야기했다며, 녀석과 다시 엮일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려니 했다.
비광과 나 사이에도 잡음이 없지 않았다. 그는 단둘이 있을 때면 세상 절친한 친구처럼 굴다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를 쌩깠다. 얼마간은 그런 행동이 대놓고 눈에 보여 나를 싫어하나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광은 재미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고 싶어 했다. 그는 나름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그렸고, 그런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문제는 스스로 만든 이미지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초인이 아님을 깨달은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비광도 지나치게 많은 인간관계를 맺고서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관계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다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의 표정을 과장시키고, 목소리를 키우고, 말수를 늘리고, 관계마저 무수히 증식하게 만들었다. 모든 행동이 눈에 띄게 어색했고 과장되어 서툴렀다. 비광이 당황할수록 그의 망가진 이상적 인간상은 불쾌함만 초래했다. 결국 자신이 만든 이상과 관계 모두에게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