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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Nov 07.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9화

1부 「열아홉」 ②

   삶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던 펜던트와 왓슨을 잃고 일상은 수그러지듯 조용해졌다. 공부를 했고 다른 친구들과 종종 떠들었다. 비릿한 상실감을 떨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거 아닌 일에 조금 더 크게 웃는 것뿐이었다. 좀 더 자주 황야를 내면화했고, 시드는 기분을 괜찮은 상태라 여겨야 했다.

   삼 학년이 되고서는 절대 친해지지 않을 것 같던 문니와 가까워졌는데, 시작은 담배 때문이었다. 보충수업을 앞두고 문니가 꾀병으로 함께 외출증을 끊을 동료를 구하던 날이었다. 웬만하면 일과 중에 학교를 벗어나지 않던 나도 그날따라 학교가 지긋지긋했다. 압착기처럼 짜대는 입시의 압력은 여간 낙관적인 성격이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녀석과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이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내가 대답했다.

   “너는?” 담임이 문니에게 물었다.

   “사랑니 때문에 너무 아파요.”

   문니가 한 손을 뺨에 댔다가 다시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비실비실 웃었다. 담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녀석을 보다가 나를 돌아보더니 이윽고 외출증을 끊어 줬다.

   문니가 얼른 병원에 들렀다가 피씨방에서 석식시간까지 있자고 했다.

   “멍청아. 그럼 너도 감기라도 했어야지. 병원 두 탕 뛸 일 있어?”

   “아 맞네.” 문니가 머리를 긁적였다. “종합병원 가면 되지.”

   “멀고 비싸잖아.”

   “새끼, 불평 많네. 형님이 피씨방에 라면까지 쏜다, 됐지?”

   그는 아무튼 덕분에 쉽게 외출증을 끊었다며 신나게 교문을 나섰다.

   진료를 받고 근처 피씨방으로 향했다. 상가 건물 뒷골목에서 문니가 담뱃갑을 꺼내며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담배 한 개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녀석이 놀란 눈을 하더니 순순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고맙다.”

   그는 담배를 피우는 내내 신기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부터 문니는 종종 내가 원하면 두툼하게 말아놓은 화장지에 담배 몇 개비를 감싸서 건네줬다. 철없고 다소 불량하며 왁자지껄한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그가 달라진 것은 삼 학년 여름이 다 됐을 때였다. 그는 야자시간에 내 옆자리로 책 한 권을 가져와 앉았다. 보통은 시답잖은 농담이나 걸어대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그날은 정말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유명한 그림들을 엮은 화집이었으니 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웬일로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그림들이야. 아까 도서실에서 빌렸어.”

   그는 집중을 깨고 싶지 않은지 무신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장 구경하다 딴 짓이나 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감상했다. 마지막 그림까지 눈여겨본 다음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이십 분이 넘도록 그림 한 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얌전히 봤다면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등받이에 등을 붙인 채 팔짱을 끼고서 봤다가, 책을 세워서 봤다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봤다가, 책을 멀찍이 들고서 봤다가……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었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감상하잖아. 방해하지 마.” 그가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염병하네. 네 자리 가서 보든가.”

   앞문에서 쾅 소리가 났다. 야자 감독 선생이 교편으로 문짝을 후려치고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희 공부 안 해?”

   나는 다시 참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이 교실로 들어와 문니에게 왜 친구를 방해하냐며,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꾸짖었다. 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해 안 했어요.” 내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선생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문니를 봤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와 녀석이 보던 화집을 낚아챘다. “이거 뭐야? 공부 안 해?”

   “주세요. 그거 봐야 해요.”

   “네가 지금 이런 거 볼 때야?”

   “제가 지금 공부해 봤자죠. 그리고 혹시 알아요? 제가 이십일 세기의 다 빈치거나 뭐, 또 누구있지?” 문니가 나를 돌아봤다.

   “워홀일 수도 있죠.” 내가 말했다. “달리거나.”

   “뭘 달려?” 문니가 물었다.

   “살바도르, 아니야 됐다.”

   “니들 나랑 말장난하니?” 선생이 못마땅한 듯 우리를 번갈아보다가 화집을 돌려줬다. “다른 애들 공부 방해하지 마라.”

   선생이 교실을 나가자 문니는 아까처럼 산만하게 그림을 감상했다. 쉬는 시간에 나는 뭘 보는 거냐고 물었다. 그가 화집을 펼쳐 내 쪽으로 밀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였다.

   “아까 세계사 수업 때 참고서 날개에 실린 그림 봤냐? 제목이, 그래 <이삭 줍는 여인들>이었는데, 뭐랄까, 존나 놀라운 거야. 원래 알던 그림이었는데 유심히 보다 보니까, 와 씨발,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그릴 수 있었나 싶어. 사진도 아닌데 명암이나 그런 걸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그린다는 게 가능하냐고.” 문니는 들떠 있었다. 투박하고 빈곤한 어휘로는 분명히 표현하기 힘든 환희와 경이에 휩싸여 있었다. “젠장, 말로 표현하려니까 잘 안 되네. 내가 느낀 건 존나 비싼 수억 원어치 감상이었는데 씨불이니까 싸구려 같아지네. 뭔 말인지 모르겠지? 내가 멍청해 보일 순 있는데, 네가 직접 느껴 보면 달라.”

   “멍청해 보이지는 않아. 근데 그래서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거야?”

   “응. 이 그림들이 명화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나도 눈깔이 있으니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수백 년 동안 명화로 불리는 이유까지는 모르겠거든. 내가 놓친 게 있다는 거지. 뭔가 계속 보고 있으면 새로운 게 느껴지지 않겠냐? 요즘 현대미술도 죄다 괴상한 거 세워 놓고 작품이라고 하잖아. 그런 것들도 뚫어지게 보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가 눈에 힘을 주고 그림을 다시 쳐다봤다.

   “그러니까 멍청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말했다.

   “해 보면 알겠지.”

   문니는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다음 장에도 유명한, 그러나 화가나 작품명은 알지 못하는 그림이 실려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수학도 현대예술처럼 역사를 알면 흥미롭게 이해된다던 페르마의 말을 떠올렸다. 교실로 돌아가 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주며 미술사 책을 읽어 볼 것을 권했다.

   “그 재수 없는 새끼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다음 날부터 문니는 도서실에서 미술사 책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인상적인 부분이 나오면 기억해 뒀다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쉴 새 없이 떠드는 통에 좀 괴롭기도 했지만 순수한 열정에 달뜬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선생들은 문니가 얌전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는 기색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쌀쌀해졌다. 해가 짧아지면서 어렵지 않게 붙을 것 같던 대학들에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쫓겼다. 이제 시간은 최대 압력으로 우리를 쥐어짰다. 선생들은 일찍 합격 소식을 들은 학생들에게 다른 아이들을 배려하도록 당부했다. 이윽고 수능날, 정설대로 혹한의 날씨에 나를 비롯한 수십만 수험생들이 패딩 점퍼를 껴입고 수험장으로 향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듯 불어대는 칼바람에 혼이 쏙 빠졌다. 한나절 후 완전히 지지 않은 해 아래로 희비가 엇갈린 학생들이 수험장을 나섰다.

   이후 나는 보름에 걸쳐 대학교 세 곳에 면접을 보러 갔다. 한 곳은 캠퍼스가 무지막지하게 넓었고, 다른 한 곳은 의자에 거의 드러누운 채 반말을 해대는 교수 탓에 교정에 침을 뱉으며 나왔고, 마지막 한 곳은 배탈이 나서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임했다. 세 곳에 모두 합격했지만 두 번째 학교에는 절대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추운 날씨와 함께 십대가 끝나간다는 검푸르고 차가운 기분을 음미했다. 친구들과 곧잘 추억들을 나눴고, 당구장과 노래방을 쏘다녔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떼창을 하던 와중에도 나는 종종 속으로 한 걸음 물러나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무심히 바라봤다. 미러볼 불빛이 얼룩덜룩하게 덮인 얼굴들을 꽤나 차분한 심정으로 기억에 아로새겼다.

   논술과 면접으로 바빴던 N도 십이월 말쯤 나를 보러 왔다. 우리는 상동과 하동을 샅샅이 산책했다. N의 제국이었던 중학교 교정부터 아직까지도 공사가 재개되지 않은 피에로의 아지트, 펜션 사건의 진상이 오갔던 언덕 위 공터, 하동의 음침한 굴다리, 칼바람 부는 강변의 운동길까지. N은 여기서 한 학기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나와는 겹치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서 우리는 서로 모르는 일화들을 나눌 수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는 집 앞 초등학교에 갔다. 학생 수가 꾸준히 줄고 있어 몇 년째 폐교 이야기가 오가는 허름하고 낡은 모교였다. 우리는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별관으로 향했다.

   “너는 언제 여기로 전학 왔다고 했지?” N이 본관의 불 켜진 일 층 교무실 창문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사 학년 때.”

   말도 안 되지만, 그 순간 나는 이 학교를 모교라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운동장 측면의 낡은 창고를 지나 별관 입구 대리석 계단에 앉았다. 담배를 반쯤 피우던 N이 계단에 드러누웠고 나도 그렇게 했다. 패딩 점퍼가 폭신하게 등을 받아 줬다. 한기가 들지 않았다. 현관 지붕의 전구는 꺼져 있었고 나는 의미 없이 그것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댔다.

   “편하네.” N이 말했다.

   “그러게.”

   “대학은 어디 간다고 했지?”

   면접 본 곳 중 캠퍼스가 가장 넓은 학교로 결정했다. 팔을 뻗어 모래에 아무렇게나 재를 털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여기서 멀지 않느냐고 N이 물었다.

   “그러니까 가는 거지.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는 거야.”

   천장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노래방에서의 얼룩덜룩한 얼굴들이 떠올랐고, 내가 그들을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그들은 내게 죽은 이들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는 서둘러 F시에서의 세월, 십대라는 시기를 매듭짓고 싶었다. 담배가 입술에서 간들거렸다. N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너는 어디로 가?”

   “아직 합격 소식이 덜 와서 기다리는 중이야.”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담배를 두 모금 서둘러 빨고 모래에다 꽁초를 비벼 껐다. 바람이 운동장을 빠르게 휘감아 돌며 우렁차게 울었다. 우리는 담배를 한 개비씩 더 피워 물었다.

   “나는 여기 안 지겨운데. 너랑 논 기억밖에 없어서.”

   “그럼 네가 여기서 살든가 새꺄.”

   우리는 같이 웃었다. 담배 때문인지 살짝 어지러웠다. 눈을 감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다시 눈을 힘주어 떴다. 현관 천장이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돌다 멈췄다.

   “어지러운데.”

   “꺼.”

   “싫어.”

   나는 한 모금 더 빤 뒤 담배연기를 내뿜지 않고 입에서 새어나가게 뒀다. 속이 약간 뒤집혔다.

   “대학 가면 자주 못 보겠지?”

   낯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물었다. N은 웃지 않았다. 뜸을 들이다 “아마도.”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톤으로 이젠 네가 좀 찾아오라고 덧붙였다.

   “그래, 그래야지.”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야 씨발, 누구 온다. 손전등 들고 있는데?”

   “일어나, 일어나. 경비야.”

   우리는 벌떡 일어나 담배를 밟아 끄고 뒷문을 향해 내달렸다. 뒤에서 경비가 거기 누구냐고 소리치며 뛰어나왔다. 맹렬히 부는 찬바람을 맞으며 힘껏 달리자 속이 후련해졌다. 바람이 꼭 입가를 잡아당기는 것 마냥 웃음이 새어나왔다. 거리를 좀 벌렸나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경비가 제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놓친 손전등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그의 얼굴과 상의를 비추며 언 땅에 떨어졌다. 나는 잠깐 멈춰서 엎어진 경비와 앞서 달리는 N을 번갈아 돌아봤다. 그리고 곧 N을 따라잡으려 더 힘껏 달렸다.




이것으로 『TRICK OR TRIP』의 1부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원래 1부만 연재하려 했으나 계획을 바꿔 소설 전편을 연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곧 2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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