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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Nov 04.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8화

1부 「열아홉」 ①

   아홉이라는 수는 숨 가쁘다. 어릴 적 세면대에 물을 받아 놓고 얼굴을 푹 담가 잠수하는 취미가 있었다. 잠수를 시작하면 속으로 꼭 열을 세고 나왔다. 컨디션에 따라 세는 속도가 달라졌지만 빼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잠수를 통해 나는 아홉이라는 수를 사랑하게 됐다. 하나둘에서 아홉까지 세다 보면 숨 막히는 고통과 곧 고지를 넘을 수 있다는 희망, 지금까지 견뎠다는 자긍심이 숨 가쁜 감각으로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열을 세고 얼굴을 치켜들 때의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시원한 공기도 좋았지만, 나는 점점 더 숨이 넘어갈 듯한 아홉의 감각을, 이승과 저승의 칼날 같은 경계에 선 감각을 사랑하게 됐다. 원래 깃발은 꽂고 나면 허무해지는 법이니까. 그럼 다음 깃발을 준비해야지. 좁아터진 화장실에서 골백번도 넘게 찍던 모노드라마는 어느 날 열을 세고 머리를 치켜들다 수도꼭지에 뒤통수를 찧으면서 종영했다. 졸음을 씻어내려 학교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 있는 열아홉 살의 머릿속에는 이런 추억들도 지나간다.

   “너희들의 열아홉은 그냥 열아홉이 아니다. 열, 아홉이지. 카운트다운은 시작됐어.”

   삼 학년 담임선생이 첫 조례시간에 한 말이었다. 딴에는 명언이라 생각했겠지.

   수험생활은 조용했다. 나 정도면 안정권이라는 낙관과 더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하리라는 가벼운 체념, 운 좋으면 상향 지원한 대학에 가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을 지녔다. 관심이 없더라도 책을 펼쳐 놓으면서 부모님과 선생들, 동급생들에 대한 예의를 차리기도 했다. 설익은 관심과 눈총을 맞지 않기 위한 방어책이기도 했다. 내가 책상다리 휘어지도록 푸짐하게 예의를 차리는 동안 N 역시 발길이 뜸해졌다. 모의고사를 마친 주말에나 잠깐 내려와 햄버거, 피자 따위로 끼니를 때우고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N은 더 이상 장학 후원 행사를 언급하거나 참여를 권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날의 광경과 감각은 여전히 생생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희미해졌다. 아무튼, 공부에 집중할 때였다.

   그즈음 나는 줄곧 황야를 내면의 풍경으로 삼았다. 지평선에까지 다다르는 누렇고 거친 황야. 풍경을 짓누르는 건조한 적막과 이따금씩 그것을 깨면서 휘도는 모래바람, 하늘빛을 덮으며 공중으로 번지는 모래, 시든 식물 몇 포기, 기암. 그런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아홉이라는 수가 가져다 준 느낌일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개인적인 세기말을 수차례 맞이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십대를 마무리하는 지금이 나에게는 그랬다. 대체로 조용하고 덤덤했으며 이따금씩 격렬한 감정에 휘둘려 미쳐버릴 듯했으나, 잠시 지나면 또 나름 괜찮던 한때였다.

   작은 사건이 있긴 했다. 열아홉 전의 일이었지만.

   셜록과의 대화 이후로 일상에서의 내 기분은 완전히 변했다. 펜던트를 우연히 마주쳐도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나 자신도 펜던트도 모두 유령 같았고, 그를 바라보던 시절을 떠올리면 이삿짐을 빼놓은 방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듯 고요히 처연했다. 드물게 내면의 빈 공간감을 느낄 때에야 이상한 슬픔이 오한처럼 밀려들곤 했다.

   왓슨을 향한 미안함은 더욱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가 종일 펜던트에게 눈길도 주지 않자 왓슨은 차이기라도 했냐면서 시시덕거렸다. 도통 속을 알 수 없었다. 미안한 만큼 밉기도 했다.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을까. 펜던트가 왓슨의 동생을 괴롭힌 사실은 함께 다니던 다른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들에게서 상상 이상으로 소속감을 느껴왔음을 깨달았고, 동시에 그 소속감이 나만의 착각이었을지 모른다는 묘한 배신감과 비참함에 시달렸다. 오랫동안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 줄만 알았는데, 실은 나 혼자 동떨어진 길을 걷던 꼴이었다. 그것도 진작 갈라졌던 길이 다시 만나는 지점에서 서로 부축해 오는 친구들을 맞닥뜨리며 깨달은 꼴. 저들끼리 서로 다독이고 함께 펜던트를 증오했을 동안 나는 어디 있었지? 인생은 결국 혼자라며 팔짱 낀 채 또래들과 멀찍이 거리를 둬왔지만, 막상 혼자임을 깨닫고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 모습이 쪽팔리게 우스웠다. 그럼에도 원망 한 마디 할 수 없는 것은 어쨌거나 미안함은 내 몫이기 때문이었다.

   미칠 것 같던 그해 가을날 저녁, 교내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왓슨을 따로 불렀다. 우리는 별관의 어두운 층계참으로 갔다. 저녁에는 늘 불이 꺼져 있고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왓슨이 벽에 설치된 계단 손잡이에 걸터앉아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있잖아, 펜던트가 검마 여자친구였던 거 알고 있었어?”

   왓슨은 그렇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은 양.

   “아니, 아니 어떻게 그래?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뭘 말해, 온 동네 애들이 다 알고 있던 건데.”

   “난 몰랐어.”

   “그런 것 같더라.”

   “네가 진작 얘기해 줬으면……”

   여기서 말문이 막혔다. 왓슨이 진작 말했으면 어쨌을 거냐고 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진작 얘기했어도 이렇게 될 일이었어.” 왓슨이 말했다. “너랑 내 사이만 불편해졌겠지. 지금처럼.”

   “그래도…… 걔 때문에,”

   “거기까지만 해.”

   옅은 빛 사이로 왓슨의 눈이 번뜩였다.

   “미안해.”

   “미안할 일이냐.” 왓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답답하다는 듯 덧붙였다. “어쨌거나 걘 좋은 애가 아니야, 등신아.”

   무엇이 문제였을까. 지워지지 않는 미안함이었을까. 아니면 친구들에게서 소외됐다는 비참함과 서운함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펜던트에게 미련이 남았던 걸까. 나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하면서 횡설수설 말을 이어갔다. 펜던트도 펜션 사건으로 무너졌을 거라고, 제정신이 아니라 그랬을 거라고, 상처받고 무너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준다고, 그러기 쉽다고, 지껄였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냐?” 왓슨이 내 말을 끊었다.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그제야 나는 명백히 펜던트를 변호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잠깐만, 그런 뜻이 아니라,”

   “왜? 걔도 어쩔 수 없었다고 얘기하려고? 그럼 아이고, 그렇구나 하고 내가 이해해야 해?”

   “사정이 그랬다는 거지. 걔도 엉망진창이라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을 거야.”

   “폭력의 계보라도 써 보자는 거야?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걔는 그럴 수 있다고 쳐. 남자친구가 눈앞에서 죽었으니 사리분별 못 하고 미쳐버릴 수 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되지. 옆에 있는 사람들은 사리분별 똑바로 하고, 걔가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잡아 줘야 하는 거야.”

   나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왓슨이 화를 억누르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쏘아붙였다.

   “너 같은 놈들이 사정 다 봐주고 이해해 주니까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설쳐대지. 내 동생은 아직도 씨발 병원 다니는데.”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듯 말했다. “네가 걔 좋아하는 거, 난 신경도 안 써. 네 잘못도 아니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 온 동네 애들이 다 알던 사실을 혼자 뒤늦게 알아가지곤, 미안하답시고 괴로워하고 사과하는 거, 그래, 이해할게. 좋은 마음이었을 거야. 근데 오늘 불러다가 한 얘기는 네가 잘못한 거야, 알아? 펜던트가 겪은 일도 애석한 일이지. 근데 걔를 위해서는 마음 아파해 줄 수 없어. 걔가 한 짓거리 때문에.”

   “야,” 내가 말을 끊었다. “뭐, 내가 사리분별도 못한다는 거야?”

   왓슨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웃어? 누구나 다 상처 주고받으면서 살아. 너는 살면서 실수 한번 안 하냐?”

   “누구나, 누구나.” 왓슨이 중얼거리다가 눈을 부라렸다. “어떻게 내 동생한테 상처 주는 인간들은 똑같은 말만 하냐. 다들 아프다고 걔 고통이 사라져? 아무렇지 않은 일이 돼? 당장 걔가 아파 죽겠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누구나 다 아프다는 게 뭔 소용이야. 너도 정신 좀 차려.”

   “내가 뭘?”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살아갈 건데? 네가 지금 나한테 미안해서 사과했냐? 네 마음 편하자고 사과했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한 발 다가섰다. “나라고 사과하는 게 쉬웠을 거 같아?”

   “아까 말했지, 사과할 일 아니라고. 미안하답시고 불러내서는 개소리로 사람 열 받게 하고 있잖아, 네가.”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씨불인 내 잘못이야.” 내가 쏘아붙였다. “니들도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 년 동안 한 마디를 안 해 주냐?”

   “네가 언제 우리한테 관심 가진 적은 있었어?”

   “관심이 없었으면 사과를 했겠냐?”

   “관심이 없었으니 사과할 일이 생겼겠지.”

   “씨발, 진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층계참을 울렸다. “지는 살면서 잘못한 적 한 번도 없는 것처럼 말하네. 야, 지적질 하니까 좋지? 존나 잘난 거 같고 기분 째지지? 사람이 자기가 잘났다고, 잘 살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인생 내리막길 구르는 거야, 이 좆같은 새끼야.”

   “좋은 말이네. 너나 명심해 둬, 새끼야.” 왓슨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그렇게 사정 다 봐주면서 살아. 주위엔 쓰레기만 넘쳐나겠지. 그 사이에서 너는 쓰레기가 안 될 방법이 있을 거 같아? 분명히 말해 두는데 편견 없는 척,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사는 네가 네 친구들 다 망치고 있는 거야.”

   왓슨이 뒤돌아 계단을 올랐다. 나는 벽을 발로 차댔다.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숙여 숨을 골랐다. 알고 있다. 내가 틀렸다. 대화의 어느 순간부터 글러먹은 새끼마냥 지독하게 자기방어의 태세를 취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빌어먹을 아가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조차 원래 왓슨을 싫어했던 게 아닐까 헷갈릴 정도였다. 묵묵히 어둠에 잠긴 두 발을 쳐다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왓슨의 발자국 소리가 잠잠히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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