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카니발」 ②
셜록이 나를 돌아봤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응. 넌 왜 여기 있어?”
“나? 난 N 따라 왔지.”
“둘이 친했냐?”
“엄청 친하지.” 어느새 다가온 N이 셜록에게 손을 내밀며 대신 대답했다.
셜록은 녀석과 악수를 나눴다. 전에 다니던 학교 교복이 아닌 처음 보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검정고시 친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물었다.
“그랬지.” 셜록이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교복 앞섶을 쓸어내렸다. “이젠 칠 필요 없게 됐고.”
“근데 왜 여기 있어?”
“후원자 댁 도련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알다시피 돈이 없어.”
“지난학기부터 장학생으로 선정됐어.” N이 덧붙였다.
“넌 알고 있었,” 나는 N에게 묻다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셜록을 바라봤다. “왓슨이 너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그럴 애가 아닌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N을 돌아봤다. 멀뚱히 서 있던 녀석은 이내 설명해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황은 알고 있었어. 다만 셜록이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
“정확해. 고마워.” 셜록이 거들었다.
“아니, 근데 이 새끼들이.”
내가 언성을 높이자 N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셜록도 N에게 담배를 권하며 웃었고, 나도 풀썩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두 녀석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셜록이 장학생으로 뽑힌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녀석에게 그만큼의 투자 가치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녀석들이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린 뒤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 앞뜰에는 돌탁자가 늘어서 있었는데, 금연구역임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워대는 아이들로 붐볐다.
건물 안은 몸이 움츠러질 정도로 시원했다. 나와 N은 둘이서 같은 방을 썼고, 셜록은 안면 없는 세 명의 장학생과 함께 방을 썼다. 방에는 이층 침대가 두 채씩 있었다. 잘 개켜진 흰 수건 두 장과 여행용 세면도구가 담긴 지퍼백이 침대에 놓여 있었다. 쾌적한 공간과 잘 정돈된 서비스. 누군가에게 대접받는다는 기분이 생경하고 흐뭇했다.
“먼저 씻을래?” N이 물었다. “이따가 저녁 일정 있거든.”
“저녁 일정?”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씻고 가는 게 나을 거야.”
“그래야지. 쉰내 나겠다야.”
안 그래도 땀을 흘려 찝찝하던 차였다. 아까보다 덜 지루하기만을 바랐다.
다시 기숙사를 나섰을 때는 해가 완전히 넘어가 어두웠다. 이미 저녁 일정을 시작한 듯 기숙사 주변은 고요했다. 앞서 걷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행사장인 중앙강당으로 가는 길에 N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기독교가 유럽에서 강력한 지위를 갖기 시작한 계기가 뭔지 알아?”
“로마 국교 지정 아니야?”
“그렇지.” 그가 라이터를 꺼내 부싯돌을 틱틱 건드렸다. “로마가 줄기차게 박해해오던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했을 때, 로마 사람들이 과연 넙죽 받아들였을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지만 답은 쉬웠다.
“아니겠지. 인간들은 그런 데선 보수적이니.”
“그래. 로마의 자유분방한 문화와 기독교의 엄격한 금욕주의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어. 국민들의 거센 불만에 황실도 교회도 대책을 내야 했지. 그때 나온 묘수 중 하나가 이거였어. 예수가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 기도한 것을 기리며 부활절 사십 일 전부터 고기를 끊는 사순절이 시작되잖아. 말이 고기를 끊는 거지, 사실상 모든 육체적 쾌락을 끊는 금욕의 시기였어. 로마인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 그래서 사순절 직전, 사흘에서 이레 정도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는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어. 황실과 교회 모두가 허락한 축제였지. 근본 없는 행사는 아니야. 고대 로마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농신제가 그 축제의 뿌리였거든. 기독교에서 나름의 방식과 목적을 가지고 받아들였다는 거지. 묘목을 옮길 때 뿌리와 기존의 흙을 함께 옮기는 것처럼.”
“그거 참 흥미롭긴 한데,” 주의 깊게 듣던 나는 돌연 강당 로비에 시선을 빼앗겼다. “저건 뭐야?”
로비에는 안내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강당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의 휴대폰을 수거했고, 다른 두 사람은 금속 탐지기로 학생들의 몸을 수색해 이상 없는 학생들만 들여보냈다. 수거한 휴대폰은 로비 뒤편 이름표가 달린 수납장에 보관했다. N이 내 어깨를 가볍게 쥐고는 지나쳐 들어갔다. 녀석은 휴대폰을 맡긴 뒤 금속 탐지기를 든 안내원 앞에서 양팔을 벌렸다.
“때로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약간의 변화를 수용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N이 내게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정면을 봤다. “그때의 교회처럼. 길고 긴 금욕의 여정에 앞서 짧지만 강렬한 쾌락을 즐기는 기간.”
나는 영문을 모른 채 N을 따라 휴대폰을 맡기고 몸수색을 당했다. 수속을 모두 마치자 N이 강당 문손잡이를 잡으며 나를 봤다.
“그 기간을 카니발이라고 해.”
문을 열자 둑이라도 터진 듯 쏟아져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실내는 어두웠고 높디높은 돔 천장에서부터 화려한 조명들과 여러 개의 미러볼이 현란하게 돌아갔다. 지나가는 불빛들 아래로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미친 듯 춤을 췄고 자욱한 담배연기가 이 정신 나간 광경을 껴안고 있었다. 춤추는 무리들 가장자리에는 술잔을 들고 서서 손나팔을 한 채 대화를 나누는 무리도 있었다. N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강당 왼편에는 원탁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N은 원탁에 놓인 술잔들을 가리켰다. “네모난 쟁반에 있는 건 무알콜, 동그란 쟁반에 있는 건 진짜 술, 알겠지?” 녀석은 가슴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나처럼 정신 나간 광경에 놀란 아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익숙한 듯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안내원들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원탁에 술을 세팅했고, 다른 한쪽은 강당 곳곳에 방치된 빈 술잔들을 회수했다. 카나페와 팡도르 따위를 잔뜩 깔아놓은 원탁도 있었고 담뱃갑을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둔 원탁도 있었다. 강당 벽을 따라서는 소파가 죽 늘어서 있었는데, 그곳엔 당장 침대를 가져다 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진한 키스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내가 N의 어깨를 건드리며 물었다. N이 못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귀 가까이 고개를 내밀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N이 내 귓가에 손나팔을 했다. “카니발. 용인된 일탈.”
“일탈을 왜 이런 데서 해?”
“왜 일탈을 다른 데서 해?”
그는 고갯짓으로 리듬을 타며 원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백포도주가 담긴 잔을 내게 건넸다. 동그란 쟁반. 안내원도 씩 웃으며 얼른 한잔하라는 눈짓을 보내왔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잔을 받아들었다. 코 밑에 잔을 바짝 가져다대고 향을 맡았다. 상큼한 냄새가 났다. 눈을 감고 목을 한껏 젖혀 한 번에 다 마셨다.
“조금씩 마시는 게 좋아요.”
안내원이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소리쳤다. 그러나 가끔은 빨리 취하도록 마실 필요가 있을 테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감은 두 눈을 훑고 가는 불빛, 시고 쌉싸름한 풍미와 함께 모종의 마법을 꿈꾸는 순간. 취기와 열기로 반감의 모서리를 녹이고 상황에 섞여 들어가는 마법. 하지만 그런 마법은 없었다. 빌어먹을. 나는 화려한 파티장 한가운데 느닷없이 떨어진 새파란 무나 다름없었다. 출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그냥 가게?” N이 물었다.
“응.” 출입구를 향해 두어 걸음 내딛다가 홱 돌아섰다. “도대체 왜 이딴 짓을 해?”
음악소리에 묻혀 내 말을 못 들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N은 씩 웃더니 원탁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앞에 있는 안내원에게 무어라 말했다. 안내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딘가에 연락을 취했고, 음악 볼륨이 약간 줄어들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차차 알아가 보는 것도 좋잖아?”
N이 내게 다가오며 되물었다. 목소리가 비교적 선명하게 들렸다.
“설명이라면 충분히 들은 것 같은데.”
“말로 듣는 거랑 몸소 느끼는 건 천지 차이지.” N이 뒤를 슬쩍 보더니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정 싫으면, 저쪽에 아까부터 너만 쳐다보는 애가 있는데 얘기나 좀 나누다 가.”
N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 너머를 눈짓했다. 그쪽에는 죄다 다른 교복을 입은 한 무리가 있었고, 그중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은 한 여자아이가 정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잠깐 멈칫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술잔을 든 채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곧은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N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가까운 무리에 혼자 가서 섞였다. N은 어디서나 환영받는 분위기였으나 그딴 걸 관찰할 때가 아니었다. 포니테일이 내 앞에 다가와 고개를 들었다. 편안한 표정에 어딘지 모르게 결연한 느낌도 배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깔았다. 그의 하얀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눈길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서 신발만 쳐다봤다.
“저 선배랑 친해?”
고개를 드니 포니테일이 N을 눈짓하고 있었다.
“응. 같은 중학교 나와서.” 내가 대답했다.
“선배가 살뜰히 챙기던데.”
“좋은 녀석이지, 날 내버려두고 갔지만.”
“좋은 녀석?” 그가 눈을 크게 깜빡이더니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동안이시네요.”
“그런 편이죠.”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쪽도.”
포니테일은 망설이다가 알겠다고 했다. 음악은 보다 부드러운 선율로 바뀌어 있었고, 조명의 움직임도 약간 둔해졌다. N을 아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개인적이 아니라면?”
“우리 엄마랑 선배 엄마랑 고등학교 동창이야. 부모님들끼리 친한 사이지.”
나는 잠시 N의 부모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여기서 N 선배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걸.” 포니테일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유명인사 같긴 해.”
“선배가 친구를 따로 초대한 건 처음인데. 많이 친한가 봐.”
“혹시 쟤한테 관심 있어?” 나는 N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불러줄까?”
포니테일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약간 쏠려 술잔에서 술이 약간 흘렀다. 다행히 하얀 운동화는 무사했다.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여기 처음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티가 나.”
“너는 언제 처음 왔는데?”
“삼 년 전?”
“일찍이네.”
나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텁텁한 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어릴 텐데. 부모가 미친 게 아닐까 잠깐 생각했지만, 사실 나의 반감은 그딴 윤리적인 데서 비롯하지 않았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과 너무도 달랐다. 절친한 N에게서도 거리감을 느낄 만큼 혼란스러웠다. 음악도 부드러운 선율이라지만 여전히 터질 것 같은 볼륨에 두통까지 느꼈다. 차라리 밤새 혼자 노는 게 편할지 몰랐다. 고개를 들어 포니테일에게 예의바른 미소를 건넸다.
“즐거웠어. 재미있게 놀아요.”
나는 곧장 뒤돌아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뒤에서 포니테일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산책을 하든가 잠이나 자든가, 아무튼 강당을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고 포니테일 쪽으로 나를 홱 돌렸다. 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동안 그는 내 어깨에 한쪽 손을 얹고 포니테일에게 다른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포니테일이 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고, 엉겁결에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포니테일이 웃으며 돌아섰다.
나는 내 어깨를 잡아챈 이를 쳐다봤다. 셜록이었다.
“뭐하는 짓이야?” 내가 물었다.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쟤가 누군지 몰라?”
“쟤만 모를 것 같아? 천지가 초면이야.”
“저거 봐.”
셜록이 포니테일을 가리켰다. 포니테일이 근처의 안내원에게 다가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안내원이 고갤 끄덕이며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강당을 울리던 음악이 곧바로 빠른 템포로 바뀌며 조명 또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야?”
셜록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따라 나와.”
우리는 강당 문을 열고 로비의 안내원들을 지나쳐 나왔다. 바깥은 무더웠으나 끔찍한 소음보다는 나았다. 앞서 걷던 셜록이 중앙강당 맞은편 흡연구역에서 걸음을 멈추고 담뱃불을 붙였다. 그는 포니테일이 J재단 대표이사의 사촌동생이라고 말했다.
“대표이사 사촌동생?”
“그래, 아까 봤잖아. 행사 사회 보던 인간.”
나는 이마를 문질렀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양아치 약장수 같던 인간이 재단 대표이사라고?”
“귀는 토핑으로 달고 다니냐? 소개할 때 뭘 들은 거야?”
“관심이 없었지.”
“프레젠테이션 첫 마디였어.”
“아,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나 보지.”
나는 괜스레 신경질이 났다. 모든 상황이 성가셨다. 셜록이 길에 침을 탁 뱉고는 담배를 빨아 연기를 뿜어댔다.
“그럼 너는 아까 걔가 대표 이사 사촌인 것도 관심 없겠다, 그렇지?”
“당연하지. 나랑 뭔 상관이야.”
나는 장학생도 아니고 후원자네 애새끼들도 아니었다. 이런 멍청한 파티나 즐기시는 잘난 머저리들과 도무지 상관없는 놈이었다. 안 그래도 형편 차이에 기분 엿 같은데 셜록이 부채질해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났다 자식아. 이건 뭐 사람 보는 눈도 없고, 눈치도 없고.”
셜록이 담배꽁초를 떨어뜨리고 밟아 껐다. 그는 휙 돌아 중앙강당으로 가려는 듯하더니 다시 걸음을 멈췄다.
“맞다, 작년에 너 좋아하는 애 생겼다고 했었지? 걔 아직도 좋아하냐?”
셜록이 물었다. 펜던트 이야기였다.
“그 얘기가 왜 나와?”
“펜던트가 검마 여친이었던 건 아냐?”
“뭐?”
“네가 좋아해마지않는 펜던트가 검마 여자친구였다고. 펜션 사건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애. 걔가 그 뒤에 뭔 짓을 했는지 알아? 지 힘들다고 비뚤어져서는 학교 후배를 존나 괴롭혔어. 학원까지 쫓아다니면서 아주 집요하게 괴롭혔다지. 몰랐다는 얼굴이네? 그 후배, 결국 입원까지 했어.” 셜록이 선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정신병원에 통원 치료 다니고 있고. 너도 아주 잘 아는 애지. 물론 그 모든 게 너와는 절대로, 절대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할 말을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이었다. 셜록이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적어도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살아. 사람답게, 새꺄.”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중앙강당으로 돌아갔다. 순간 두꺼운 장막처럼 등 뒤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쟁쟁하게 덮쳐왔다. 아니지. 아까부터 울고 있었겠지. 그러한 인지를 머릿속에서 흘려보내며, 나는 뒷걸음질 치다 흡연구역 벤치에 주저앉았다. 힘없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다리의 떨림도 주체하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벤치를 톡톡 건드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곧 마구.
몰랐다. 펜던트가 그 아이인 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나는 골똘히 자문했다. 그러나 골똘한 감각만 남고 생각에 발전은 없었다. 사고회로가 마치 고장 난 자동차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과열만 되어 폭발할 듯했다. 주먹으로 벤치를 힘껏 내리쳤다. 짝사랑을 가능케 하는 환상의 거리는 살얼음 낀 강이다. 섣불리 걸었다가는 깨져 빠지기 십상이다. 펜던트와 왓슨, 그리고 왓슨의 동생이 무작위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에는 무심코 넘어갔던 상황들, 왓슨의 표정과 말투가 미처 생각지 못했었던 의미의 조각들로 마음에 박혔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내가 맺어왔던 인간관계의 기초는 거리두기였다. 감정소모도 덜하고 상처를 주고받을 일도 비교적 적은 삶의 방식이었다. 또래들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조숙한 삶을 즐기고자 한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껏 현명하다고 믿어 온 삶의 방식이 실은 무정한 무관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의 편안하고 오만한 무관심이 친구의 상처를 한 번 더 내리친 도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겠어, 내가 알고 그랬어? 근데 정말 몰랐어? 어떻게 몰랐어? 당장에는 구별할 수 없는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의 물줄기들이 뒤섞여 솟구치는 동안 기억들도 끊이지 않고 재생됐다. 구역질이 났다.
어느새 나는 소란 속으로 다시 들어와 있었다. 쿵쿵거리는 음악 아래 조명이 더 어두워진 듯했다. 음악이 고막을 세게 때려오자 머리가 커다란 종처럼 울렸다. 넋을 놓은 채 원탁 앞으로 갔다. 가지각색의 술잔들을 눈대중으로 훑으며 손끝으로 흰 식탁보를 가볍게 쓸었다. 녹색 열매로 장식된 칵테일 잔을 고르자 아까의 안내원이 마티니라고 귀띔했다. 나는 반 잔 정도를 들이켜고 어찔한 머리를 흔든 뒤, 남김없이 마셨다. 올리브를 씹자 비린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마티니 한 잔을 더 들고 안내원에게 인사한 뒤 담뱃갑 더미에서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챙겼다. 그 모든 몸짓이 가뿐했다. 전에 없이 경쾌한 몸짓을 즐기며, 나는 스스로 이 상황을 애써 가벼운 일로 만들려 하고 있음을, 그리고 실패할 것임을 알았다. 흥청망청 노는 인파를 헤치는 동안 술이 조금 흘러넘쳤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신 나간 무리들과 좀 떨어진 벽까지 가서 기대섰다. 마티니를 들이켜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빈 잔을 옆에 두고 처음 뜯는 담뱃갑을 신경 써서 뜯은 뒤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왼손에 담배를 끼우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 했으나 잘 붙지 않았다. 몇 번 애를 쓰는데 누군가가 담배를 낚아채 내 입에 물렸다.
“빨아.” N이 자신의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빨면서 붙이는 거야.”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담배 연기가 입천장과 목구멍을 쓸고 지나가며 매캐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씨팔. N이 킥킥거리며 옆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N은 정수리를 벽에 대고 턱을 건들거렸다. 입술 끝에 매달린 담배도 함께 간들거렸다. 가벼운 리듬. 아무런 얘기도 오가지 않았다. 조명은 점점 더 어두워져 이제 곧 학생들의 실루엣만 보일 듯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는 둥 마는 둥하며 한 무리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멍청이들. 술담배와 스킨십을 탐하며 모조 클럽을 즐기는 등신들과 젠체하며 사교계 흉내나 내는 머저리들. 하지만 나는 저 자리에 끼고 싶었다. 시끄러운 음악으로 머리를 비워내고 술과 담배로 온몸을 마비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탈탈 털어 말리고 싶었다.
“어차피 딱 하룬데 뭘. 그냥 놀자.” N이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담배 때문에 가빠진 호흡과 맥박도 점차 진정됐다. 내가 일어서자 N도 따라 일어서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명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음악은 얘기하기 좋을 만큼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N은 나를 데리고 새 술잔을 챙겨 여러 무리를 오갔다. 그의 친구라는 이유로 나는 어디서건 환영받았다. 아무도 내 배경을 묻지 않았다. 행사에 도착한 순간부터 느꼈지만 N은 정말이지 특별한 아이였다. N의 말 한 마디, 표정과 몸짓 하나에 좌중의 분위기가 좌우됐다. N에게서 뻗어 나온 거미줄처럼 모두가 그의 행동에 섬세하게 반응했다. 아이들은 N의 초대를 받은 나 역시 후원자의 자제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혹은 누구라도 상관없거나. 그런 생각이 들자 허리가 곧게 펴졌다. 누구여도 상관없다면 부잣집 자식으로 보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김이었을까? 어쨌든 하루니까. 딱 하루쯤은 거짓을 담보로 허영을 취해도 괜찮지 않을까. 들고 있던 술을 마저 들이켰고, 때맞춰 누군가가 웃긴 말을 해 나도 크게 웃었다.
포니테일이 근처 다른 무리에서 얘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술기운과 분위기에 힘입어 N을 두고 포니테일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