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별명의 정글」 ②
고등학교 입학 후 N은 한 달에 한 번씩 F시로 놀러왔다. 올 때마다 당일치기로 얼굴만 잠시 보거나 막차에서 자곤 했다. 줄곧 마음이 쓰였던 나는 여름쯤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 N을 집에 들였다. 녀석은 편하게 놀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처음 우리 집에 오던 날, 기차에서 내린 N은 엄청나게 큰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박엽지를 두 겹 깐 고리버들 바구니에 빛깔 좋은 과일들이 작은 낙원을 꾸리고 있었다. 가방에 위스키도 있다며, 부모님이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챙겨 주셨다 덧붙였다.
짐을 두기 위해 집에 먼저 들렀다. 어머니는 과일 바구니와 위스키를 보더니 절제된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실은 몹시 기뻐하고 있음을, 그렇지만 체면을 차리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N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데 눈이 밝았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하동에서 시내에 가는 데만 한 시간가량 걸리기 때문에 그간 N과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시내에는 F시의 젊고 어린 사람들이 죄다 나와 있는 듯했지만, 멋깨나 부린 청년들도 N만큼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쯤 포켓볼을 치고 볼링장에서 내기 볼링을 쳤다. N은 번번이 스트라이크를 쳤고 간혹 삐끗해도 스페어로 잘 마무리했다. 시원하게 졌다.
여름 햇볕이 골목골목을 쪼갤 듯 내리쬐었다. 자그마한 개인 카페에 들어가 나는 아메리카노를, N은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사들고 앉았다. 에어컨 바람이 잘 드는 자리였다. N은 내 학교생활을 궁금해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반대방향으로 여섯 정류장 떨어져 있었다. 중학교 동창들이 같은 고등학교로 많이 배정돼서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다. 왓슨은 나와 같은 학교에 갔고, 셜록은 근처 다른 학교로 배정됐지만 한 학기도 채우지 않고 자퇴했다. 학교를 다니던 초여름까지는 왓슨과 셋이서 만나 놀기도 했었으나, 자퇴한 뒤로는 검정고시를 치겠다는 말만 남기고 잠적했다. 왓슨조차 연락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진들 간의 서열정리는 조용히 끝났다. 어쩌면 입학 전에 마무리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쪽은 내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조용조용한 애들끼리 드잡이가 좀 있었다. 모두들 자존심이 강했고 깔보일까 두려워했으며 내심 그런 드잡이가 쓸데없는 짓임도 아는 눈치였다. 우리는 고등학생이고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드잡이는, 말하자면 중학생 물이 빠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르는 발악이었다고나 할까.
N이 화장실을 다녀오며 에스프레소 한 잔을 더 주문해 가져왔다.
“친구들 중에 재밌는 애는 없어?” 그가 물었다.
나는 페르마 얘기를 했다. 그는 유별나게 똑똑한 녀석이었다. 중간고사 직후 나와 짝이 됐을 때는 우수한 성적으로 전교 일 등을 차지했다. 녀석은 가방에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나 G. H. 하디의 『어느 수학자의 변명』 같은 책을 두어 권씩 챙겨 다녔다. 책상에 쌓아 둔 서너 권의 교과서와 참고서 사이에 끼어 있는 양장본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지적이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한날은 문니라는 애가 페르마에게 툭툭 시비를 걸었다.
“넌 그렇게 살아가지고 추억이 남겠냐?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서도 공부. 넌 집, 학교, 집, 학교, 그게 인생의 전부지?”
페르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십대에 추억이라곤 하나도 없다? 너 같은 새끼들보다 나 같은 애들이 훨씬 추억도 많고 즐겁게 산다고, 알아?” 문니가 대문 같은 앞니를 번쩍거리며 웃었다.
“그래. 알찬 추억 나눠 먹으며 즐겁게들 살아.”
페르마는 눈길 한번 안 주고 대꾸했다. 수학 문제를 풀던 손도 멈추지 않았다.
“추억 따윈 없어도 된다는 거냐? 먹질 못해서? 돈이 전부가 아니야 인마. 추억은 그 뭐냐, 응, 삶의, 음…… 그래, 추억은 삶의 질에 관한 거라고.”
나는 문니가 그런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에 놀랐고, 그런 말을 저렇게나 멋대가리 없이 한다는 것에 더 놀랐다. 문니도 굉장히 멋있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턱을 살짝 들고 자신만만하게 페르마를 내려다보았다. 페르마는 샤프심을 눌러 넣고 샤프를 공책에 내려놓았다.
“추억이 뭔데?” 페르마가 팔짱을 끼고 책상에 팔꿈치를 얹었다.
“응?”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 만나서 놀고, 담배 피우고 술도 좀 마시고, 피씨방 노래방 쏘다니면서 저들 딴에나 신나고 위험한 일탈을 즐기는 거? 그게 추억이야?” 조곤조곤 말하는 페르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딱딱 박혔다. 다른 녀석들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았다. 페르마가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추억이라고 누가 그래? 아니지, 그것도 추억 맞지. 근데 그런 것만 추억이라고 누가 그래? TV에서? 영화? 아니면 너희랑 그렇게 놀던 형누나들이? 그게 추억이라면, 그래 좋다 이거야. 근데 나는 그런 거에 도통 관심이 없어. 해 본 적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라, 해 봤는데 재미가 없더라고. 그러는 너는 못 풀던 수학문제를 풀었을 때의 기분을 알아? 수많은 수학자들이 일생을 바쳐온 난제가 수백 년 만에 풀리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 저런 난제를 풀어 보리라는 욕심을 가져 본 적 있냐고. 니들이 학교 담 너머 담배 뚫리는 편의점 찾는답시고 추억 쌓을 때, 나는 내 친구들이랑 수학 공식의 역사를 탐구하며 추억을 쌓아. 입시 때문에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고, 이 추억 재벌 새끼야.”
페르마가 책 더미에 끼어 있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을 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페르마의 말은 흥미로웠지만 문니가 주먹이라도 날리지 않을까 자못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씨발, 그래서 네가 재수가 없다는 거야.”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재밌네, 둘 다.” N이 웃었다.
“처맞지 않은 게 다행이지.”
“팼으면 일열 관람이었을 텐데.”
N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담뱃갑을 꺼냈다.
“여기 금연이야.”
“알아. 너희 집에서 자는데 피우겠냐.”
그는 담뱃갑을 열어 코에 바짝 가져다 댔다. 눈매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그럼 아예 들고 오지 말지.”
“너무 바란다.” 우리는 웃었다.
카페를 나서서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시내 뒷골목에 나 있었다. 단층의 사주팔자를 보는 집과 작명소, 타로 집, 철학관 들이 즐비했다.
“웃기지 않냐?” 내가 말했다.
“뭐가?”
“이름이나 태어난 날 가지고 사람 운명이 정해진다는 거 말이야. 내가 날짜랑 시간을 정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이름도 내가 지은 게 아닌데 그딴 걸로 앞날까지 정해지면 열심히 사는 게 억울하지.”
“그러게.” N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름으로 운명이 정해진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래도 안 믿을 거야?”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지. 아니, 그따위로 정해지진 않으리라 믿는 거지.”
“믿는 대로 될지어다.” N이 길가에 있던 구겨진 캔을 작명소 쪽으로 걷어찼다.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졸았다. 눈을 뜰 때마다 차창 밖의 풍경이 맥락 없이 바뀌어 있었다. 하동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 더운 여름날의 하수구 냄새가 피어올랐다. 해가 살짝 기우는 시간이었다. N은 관광객처럼 들뜬 미소를 머금고 주변을 살폈다. 공장의 냉정한 침묵 너머 싱그러운 녹색 벼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도로변으로 난 외길을 따라가다 굴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국도와 철도 아래로 난 굴다리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집에 올 때마다 지나는 길이었다. 걸음마다 울리는 공명이며 내벽의 축축한 기운에는 모종의 수치심을 끼치는 포자가 떠도는 것 같았다. 음습하고 외진 곳으로 ‘숙여’ 들어가는 기분. 나는 그것이 하동 아이들의 공통된 정서에 일조한다고 생각했다.
“저거 만석이 아니냐?”
아파트 단지를 향해 가다 N이 골목 한쪽을 가리켰다. 오래된 구멍가게에서 만석이가 비닐봉투에 뭔가를 잔뜩 담아 나오고 있었다. 녀석의 어머니는 부동산 투기로 암암리에 유명했는데, 그의 아들인 만석이 역시 계산과 거래, 도박에 능했다.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쌀 한 석쯤은 금세 만 석으로 불려 줄 수 있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N은 반가운 듯했지만 굳이 아는 척하려 하지 않았다. 나도 N도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 아니라 우리는 그냥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으로 피자 두 판을 시켰다. N은 서울에서의 학교생활과 분위기를 들려주었다. 교육열 높은 학부모들, 경쟁심 강한 학생들이야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악명 높은 폭력조직에 벌써부터 몸담은 아이들이나 성적인 일탈, 학교폭력과 교외에서의 범죄 일화 등은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나는 우리 학교를 떠올렸다. 지독히 밉살스러운 아이들도 몇몇 있었으나 대부분은 철이 들기 시작했다. 중학생 물을 빼는, N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적 발달인 ‘적응’을 거치는 티가 났다. 하지만 N의 이야기 속 아이들은 세상물정 모르고 날뛰는 망아지들 같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왓슨에게 했다. N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는 빼고.
“샌님은 그게 놀랄 일이신가 봐요.” 왓슨이 비아냥거렸다. “여기도 그런 일들 많거든요.”
“많다고?”
“그럼. 얼마 전에 학교 근처에 브로커 떴잖아.”
왓슨이 음료 자판기에서 차가운 콜라 두 캔을 꺼내며 말했다.
“브로커라니?”
“성매매 알선 브로커.” 그가 캔을 건넸다. “며칠 간격으로 찾아와서 연락처 적힌 쪽지를 여자애들 몇몇한테 돌렸다나 봐. 대포폰 번호겠지.”
내가 멍청하게 듣고 있자 왓슨은 고개를 저으며 캔을 땄다. 콜라가 맥없는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이런 씨발.” 그가 캔을 다른 손에 후딱 옮겨 입을 대고 젖은 손을 털어댔다.
“그래서 어떻게 됐대?” 내가 물었다.
“나도 잘 몰라. 어떤 애가 쪽지 이야기를 담임한테 알렸다고는 하던데.”
왓슨은 브로커가 뜬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뜬소문이 많다며 말을 삼갔다. 셜록이 있었다면 왓슨과 둘이서 사건을 신나게 추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와 달리 왓슨은 매사에 다소 신중한 태도를 가지는 듯했다.
나는 페르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페르마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잘 없었지만, 사교성이 떨어지는 녀석은 아니었다. 문니처럼 시비만 걸지 않는다면 친절하게 대했다. 나는 그에게 수학에 대해 물었다. 입시 수학이 아니라 녀석이 실제로 관심을 가지는 수학에 대해.
“너 책 좋아하지?” 페르마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학교 도서실로 갔다. 문학 코너만 오가느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수학 코너 앞에 섰다. 페르마는 흔히 난해하다고들 하는 현대미술도 예술사를 짚어 가면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듯이 수학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역사는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서술되어 있어. 이 공식이 왜 나왔으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 누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아가다 보면 재미가 없을 수 없지. 여기서부터는 공식뿐 아니라 이야기가 펼쳐지는 거니까. 중요한 건 서사와 맥락이야.”
그 말을 듣던 나는 문득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그를 쉽게 미워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페르마가 추천한 책 몇 권을 빌렸다. 별 기대하지 않고 펼쳤는데 생각 이상으로 몰입해서 읽었다. 수학의 역사는 그의 말대로 흥미진진했다. 해가 바뀌고 나는 왓슨과 함께 문과로 진학했다.
이 학년이 된 첫날, 같은 반에 앉아 있는 왓슨에게 물었다. “홈즈에 나오는 왓슨 박사는 이과 아니었냐? 군의관이었잖아.”
“그럼 엠마 왓슨하지 뭐.”
“또라이새끼.”
공부에 영 흥미가 붙지 않던 나도 슬슬 입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맘때쯤 연기에 관심이 생겨 인터넷 기록을 배우들의 명연기로 가득 채웠지만 진로로 생각할 만큼 진지한 꿈은 아니었다. 구체적인 대학교나 학과를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가능한 한 멀리 가고 싶은 마음만 확고했다. F시에서의 미래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문과에 갔으니 미래 걱정을 하지.” 고민을 듣던 페르마가 말했다. 악의는 없었다.
N은 이 학년이 되자마자 전국 고교생 스피치 대회에 나가 대상을 수상했다. 정해진 주제로 직접 글을 써서 낭독하는 대회였다. 그는 참가 신청 기간 내내 함께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연락했지만, 더 이상 글도 쓰지 않고 말재주도 없던 나는 별 고민 없이 거절했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주신 만년필은 내 방 책장 어딘가에 관상용으로만 전시돼 있었다. N이 피드백을 해달라고 해서 대회에 나가는 글을 몇 번 봐 줬었지만, 이미 트집 잡을 요량이 아니라면 덧붙일 말이 없는 훌륭한 글이었다.
N이 F시에 놀러온 날, 부모님은 스피치 대회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수산시장에서 회를 떠왔다. 회와 수육이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을 보고 N은 놀란 듯했다. 자기 집에서도 이렇게 축하받지는 못했다며 귀띔했다. 녀석은 연신 감사를 표했다.
“축하한다, N. 전국 대회에서 상도 타고 대단하네.” 어머니가 말했다.
N은 감사하다며 내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술은 마셔 봤어?” 아버지가 N에게 물었다.
“네. 부모님께 배웠습니다.”
“그래,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지. 훌륭한 분들이셔. 아들도 이렇게 잘 키우시고 말이야.”
아버지는 내게 잔을 두 개 가져오라고 한 뒤, N과 내 앞에 잔을 하나씩 놓고 소주를 따랐다. 처음 맛 본 술은 더럽게 맛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얼른 회 한 점을 입에 넣자 모두 웃었다. 식사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 부모님은 N에게 칭찬 일색이었고 N은 예의를 잃지 않았으며 술이 한두 잔 돌수록 분위기는 더욱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만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N과는 어느새 둘이 있는 게 세상 편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됐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자 녀석과 비교당하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부모님은 방에서 한잔씩들 하라며 N이 가져온 위스키를 얼음과 함께 따라 줬다. 그리고는 내게 N이 올 때만 한잔씩 하라며 당부했다. 우리는 술잔을 챙겨 방에 들어섰다. N도 다소 긴장했었는지 닫힌 방문에 기대어 심호흡을 크게 했다. 눈이 마주치자 둘 다 웃음이 터졌다.
N이 놀러오는 날이면 우리는 동틀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둘만이 공유하는 시간인 만큼 나는 전에 없이 솔직해졌다. 사적인 일들은 물론,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생각이나 견해들을 진솔하게 꺼내놓을 수 있었다. 사회문제에도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던 N은 종종 뉴스에서 본 현시대의 문제들을 화제로 꺼냈다. 내게는 대개 생소한 뉴스들이었지만 주의 깊게 듣고 직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십대인 우리에게 세상은 이해 불가능한 곳이었기에, 역설적으로 항상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N은 간혹 내가 뜬구름 잡는 방안을 내놓을 때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교가 될 법한 방안들을 덧붙여 줬다. 명쾌하지만 현실에 적용될 리 없는 해답들을 내놓을 때마다 나는 세상이 두렵지 않아졌다. 오히려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세상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간밤의 일장춘몽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N은 성적이나 진학 따위는 일절 입에 담지 않았지만,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는 보기에 따라서 본인이 회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발달, ‘적응’의 과정을 잘해내고 있었다. 여전히 교육체계에 불만을 가지는 듯했지만,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교육체계에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N은 아버지가 회사를 관두고 창업을 했으며, 괜찮은 수익을 내고 있다고 귀띔했다. 거기에는, 그러니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훗날 자신이 망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갈 비상구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원한다면 내 손도 이끌어줄 수 있다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묘하게 안도가 됐다.
어른들은 항상 도움이 되는 친구들을 사귀라고 했다. 어중이떠중이들 말고 나보다 뭐든 나은 애들과 친구를 하라고, 또 친구를 믿지 말라고, 친구를 함부로 돕지 말고, 그러나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나라고, 또한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 되라고, 물론 함부로 돕지는 말고…… 애정과 걱정이 담긴 조언들을 들을 때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교차했다. 댁들의 빌어먹을 조언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이미 나는 당신들의 충고 이상으로 약아빠지게 잘해내고 있다는 마음. N과의 관계는 어른들의 조언을 모두 충족하면서도 그들의 인간관계론을 작살내 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며 의심할 필요 없는 좋은 친구였다.
“무슨 생각해?”
N이 얼음이 든 위스키 잔을 달각거리며 물었다. 그의 눈길이 내 손 끝에 가 있었다. 나는 무심코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것을 멈췄다. 언젠가 N은 내가 생각에 잠기면 테이블이나 의자 팔걸이를 규칙적인 박자로 두들긴다고 했다. 생각의 속도나 감정에 따라 리듬이 달라진다고도 했다. 나는 때때로 그의 관찰력을 부러워했다. 틈날 때마다 배우들의 연기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따라하던 나는 연기야말로 관찰이 필수적인 영역이라 생각했다.
“너는 버릇처럼 하는 행동 없어?” 내가 물었다.
“맞춰 봐.”
“줄곧 지켜봤는데 모르겠어. 애매해.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해. 버릇을 수집하는 버릇.” N이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버릇이라기보다 취미에 가까웠지만, 당시 나는 N의 표현, ‘버릇을 수집하는 버릇’이라는 말 자체에 매료됐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N은 자못 자신감을 드러냈다.
“오른손 검지 측면으로 콧등을 사선으로 문지르는 건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때 보이는 아버지의 버릇. ‘말하자면’으로 긴 설명을 압축시키는 건 어머니의 말버릇. 반찬을 집기 전에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건 친애하는 검마의 버릇. 말문이 막히면 주먹을 살짝 쥐어 입에 가져다댔다가 머뭇거리며 삿대질하는 건 지금 담임선생의 버릇.”
N은 버릇을 이야기하며 하나하나 직접 몸짓으로 보여줬다. 녀석이 그 버릇을 보였을 때가 머릿속에 휙휙 지나갔다. 그의 관찰력에 내심 감탄했다.
“영화나 연극, 드라마에서 인상 깊게 본 배우들의 버릇도 종종 수집하곤 해. 남의 버릇이 내 몸에 자연스럽게 스미는 걸 보면 재밌거든.”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 순간 나는 N의 버릇 하나를 알게 됨으로써 수많은 면모를 미궁으로 흘려보냈다. N이 가진 모든 버릇이 남의 버릇이라고 생각하자 그의 소소한 윤곽들이 흐릿해졌다. 어쩌면 ‘버릇을 수집하는 버릇’ 또한 어딘가에서 수집해온 버릇은 아닐까. 그러나 N에 대한 관심은 이상하게 높아져갔다.
“나도 네가 모르는 버릇이 하나 있어.” 내가 말했다.
“내가 모르는 버릇? 뭔데?”
“버릇이라기보다는 취미인데, 전화번호 외우는 거.”
“전화번호?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 다?” N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아니.” 나는 웃었다. “그냥 뭐, 기본적으로 외워야 할 사람, 혹은 친한 친구들, 소중하거나 고마운 사람들 등등.”
“내 번호도 외웠어?” N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부모님, 셜록, 왓슨, 페르마, 중학교 국어선생님 등등?”
그리고 펜던트. N과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나눈 사이였지만, 연애에 관해서는 누구도 일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러자고 한 적은 없지만 암묵적인 약속인 듯 그래왔다. 연애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왜 N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친구들에게는 말하고 다녔다. 오래도록 진전이 없던 내 짝사랑 이야기에 왓슨은 지칠 정도였다.
“쟤가 그렇게 좋냐?”
왓슨이 복도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나는 먼저 보고 있었다.
“응.”
“왜? 뭐가 좋아?”
“예쁘잖아.”
왓슨이 픽 웃었다. “네 눈에나.”
아니었다. 왓슨만 부정했지, 적지 않은 남학생들이 펜던트를 좋아했다. 나는 혹시 왓슨도 펜던트를 좋아하거나, 적어도 예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까 했다. 개중에는 연애에 관심이 없는 척하는 녀석들도 있기 마련이니까. 남녀공학인 우리 학교는 H형 건물로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연결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물을 따로 썼다. 물론 성별에 따라 학생 수가 딱 떨어지지 않아서 학년마다 한 반씩 남녀 합반이 생겼다. 나는 이 학년을 합반에서 보냈다. 펜던트와 같은 반은 아니었다. 펜던트는 건너편 건물에 있었고, 나는 연결다리가 딱 사랑에 빠지기 좋은 거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비밀과 신비, 미스터리에 취향을 두고 있다는 것은 논외로 두더라도, 어쨌거나 설렘을 머금은 사랑은 환상의 산물이며,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소심해지고 수줍어하는 내 성격도 거리두기에 한몫했다. 그때의 나는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은커녕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펜던트를 보는 시간은 지나가다 마주치는 단 몇 초간이었다. 그 몇 초간을 위해 나는 스물세 시간 오십구 분 오십 몇 초를 견디며 살았다.
“콩깍지 제대로 씌었네.” 같은 반 여자아이가 넥타이 대신 맨 리본을 고쳐 매며 말했다. 왓슨의 짝이라 친해진 아이였다.
“콩깍지가 아니라 누가 봐도 예뻐.”
“주접은.” 왓슨이 거들었다. “하여간 얼빠에 금사빠면서 지조 하나는 죽여줘요.”
“예쁜 거 말고, 쟤에 대해 뭐라도 알면서 좋아하는 거야?” 리본이 물었다.
나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을 아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내 사랑은 연애의 감정보다 우상화에 가까웠다. 결함이 있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순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었다. 완전하고 무결한 존재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단순한 복종심과는 달랐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예찬할 수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동경했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을 성적 대상화 시키며 희롱하는 녀석들, 함부로 대하기를 일삼는 치들과는 천성부터 다르다고 믿었다. 그런 짓들을 불편해하는 스스로의 고결함에 취해서는 우상화를 사랑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그 몰인격한 짓거리가 내 발등을 노리는 도끼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찬양하고 따르고 숭배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했다. 얼마 뒤 우연히 리본과 펜던트가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리본은 그 후로 내게 펜던트의 연락처를 알려줬고, 종종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 했다. 문니와 셋이서 술을 마신 적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리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무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리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굴었지만.
안녕하세요, 윤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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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과 후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