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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Oct 17.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3화

1부 「별명의 정글」 ①

   검마가 죽고, 찌는 학교에 오지 않고, N은 서울로 돌아갔고, 피에로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새 학기가 시작됐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빈자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죽은 아이들과 가까웠던 녀석들의 웃음은 흉터 같아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나는 누군가를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때 처음 온몸으로 느꼈다. 죽음은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낯선 애도의 한가운데 표류한 채 내심 졸업을 기다렸다. 고등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섞이며 숨 막히고 긴장된 기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졸업이 한 학기 남았다는 사실을 다행이라 여겼고, 동시에 잇따르는 죄책감을 외면했다. 그날의 일로 모두가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때, 정작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던 N은 그 영향권 바깥에 있었다.

   N은 방학이 끝나기 전에 모두와의 연락을 끊었다. 새 학기가 되고서야 아이들은 그의 전학 사실을 알았다. 작별을 아쉬워하는 아이들도 근황을 궁금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유독 친하게 지내던 녀석들은 의아해했고 서운해했으며 이내 분노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짓을 하지는 않았다. 멍청한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SNS를 뒤지는 정도였는데, N은 그 흔한 SNS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N의 제국’이 물론 대단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모든 학생들이 N을 따랐던 것은 아니다. 추종과 경멸이 관심의 범주라면 한편에는 무관심한 소수의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관심하고 무신경했다. 나도 그런 제 3자 그룹 중 한 명이었다. 나의 사고방식은 간편했다. 세상과 내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은 상호 합의된 사안이라 여겼다. 내심 타인의 주목을 바랄 때도 있었지만, 십대라는 징글징글한 별명의 정글에서 내게 쏟아질 관심의 질이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별명을 싫어했다. 별명은 대상에게 일차원적이고 강력한 선입견을 부여한다. 대개 외면적인 요소를 통해 만들어지고, 비하를 내포할 가능성이 높다. 애써 순기능을 꼽아 보자면 약간의 익명성을 갖춘다는 정도랄까. 그마저도 별명이 아주 노골적이지 않다는 전제 아래서나 통했다. 나는 웃음거리로 전락하면서까지 그 누구도 웃겨 주고 싶지 않았다. 별명이 붙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나는 유전자의 수혜를 받은 케이스였다. 특색 없는 평범한 외모, 평범한 신장, 평범한 체중, 평범, 평범, 평범. 그러나 그런 평범함조차 얼씨구나 하고 좋아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기고 탁월하고 유능하고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별명이 붙기는 싫어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내 모순된 욕망의 초상화를 그리면 아마 우로보로스 같은 모습이 아닐까.

   같은 해 시월 중순, 교실에서 폰 게임을 하던 나는 N에게서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잘 지내냐는 간단하고 태평한 안부 인사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최근까지 다들 N과 연락이 안 된다고 얘기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나는 태연하게 근황을 전했고, 그에게도 안부를 물었다. N의 연락을 다른 아이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런 것을 시시콜콜 알릴 친구도 없었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던 나였지만, 속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 종종 내밀한 개인사를 털어 놓는 아이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편이 속 편했다.

   아이들은 내가 이야기를 잘 들어 준다고,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는다고 신뢰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이 배려가 아닌 무관심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늘 관심 없이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나는 나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모순된 충동과 드러나지는 않지만 들끓던 반항기, 청소년기의 격정이 휘도는 내면을 향해서만 두 눈이 붙박여 있었다. 신비와 비밀, 미스터리에 취향을 두던 나에게 가장 커다란 미스터리는 나 자신이었다.

   N의 연락은 점차 잦아졌다. 한번은 모두와 연락을 끊은 이유를 물었더니 애들이 귀찮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도 없고.” 그가 덧붙였다. 그럼 나와의 연락은 재미있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것은 뭐랄까, 상대방에게 특별한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유치한 짓 같았다. 굳이 알릴 이유가 없으므로 N과의 연락을 함구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연락을 비밀에 부치는 데 모종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일종의 비밀을 원했다. 따분한 일상 가운데 소소한 재미를 주면서 큰 위험을 수반하지 않는 비밀들. N은 나를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학교, 그러니까 N이 살던 마을보다 좀 더 아래에 있는 마을에 살았다. 버스로 한 정류장 거리였다. 정식 지명은 아니지만 토박이 어른들은 N이 살던 마을을 상동, 내가 사는 마을을 하동이라 불렀다. 상동과 하동의 풍경은 엇비슷했다. 상동에서 흐르는 개천은 하동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 큰 강으로 흘러들었다. 상동과 하동 사이에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 있는데, N이 펜션 사건의 진상을 털어 놓았던 그곳이었다. 거기서는 두 마을 전체를 비스듬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건물이긴 하지만, 하동에는 없는 술집 두어 곳과 노래방, 학원 등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상동이 조금 더 낫긴 했다. 나는 오 년 전인 열한 살에 F시로 이사를 왔다. 그 전까지 우리 가족은 셋방살이를 하며 전국각지를 돌았다. 뭐, 전국각지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만 F시 외곽의 하동이 우리 가족의 첫 정착지임은 분명했다.

   십일월 중순의 수요일이었다. 특별활동 시간을 앞두고 나는 셜록과 왓슨과 함께 문예동아리 교실로 향했다. 추리소설에 환장하는 두 녀석은 실제 사건에도 관심이 많았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사건들의 자료를 찾아 분석하고 나름의 추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녀석들 역시 제 3자 그룹이었는데, 이따금 그들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으니 학교에서 그나마 친하다고 할 만한 아이들이었다. 동아리실로 가는 동안 녀석들은 펜션 사건을 논했다. 피에로의 생일이 다가오던 때라 종종 피에로와 검마의 이름이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셜록과 왓슨이 사건을 두고 떠드는 게 마뜩찮았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 연루된 사건을 두고 흥미를 보이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다. 녀석들도 나름대로 신중을 기하려는 눈치였지만, 태도와 상관없이 추리 내용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남다른 촉이 있던 셜록은 모두가 찌의 보복에 주목할 때, 사건의 쟁점을 N에게로 가져갔다.

   “N은 단기간에 학교를 자기 지배하에 뒀어. 지배는 완벽한 통제의 환상을 갖기 마련인데, 예상치 못한 펜션 사건으로 이제까지의 통제가 박살나 버렸지. N은 그 길로 곧장 서울로 달아났어.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나 지금까지의 입지가 곤란해질까 두려웠겠지.”

   “N이 그런 걸로 도망갈 애냐?” 내가 끼어들었다.

   “걔가 전학 온 건 일종의 실험을 위해서였으니까.”

   “실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실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펜션 사건은 N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실패라는 셜록의 추정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N의 비밀이므로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실험을 위해 전학까지 왔다는 것은 비약이라고 했다. 이사와 전학 같은 문제는 학생의 의사보다 부모의 선택이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가.

   “N은 서울에 남아도 됐었어.” 셜록이 대꾸했다. “N의 아버지는 출장 때문에 길어야 일 년 정도 F시에 체류할 예정이었어. 어머니는 서울에 남아 있었으니 녀석의 의사가 아니었으면 여기로 전학 올 이유가 없지.”

   “도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알아냈어?”

   “내가 조사했어.” 왓슨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N의 엄마는 서울에 있는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야. 승률도 아주 높대.”

   왓슨은 뒷조사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중학생 치고는.

   “그래, 너희 말이 맞는다고 치자. 능력을 실험해서 걔가 얻는 게 뭐야?”

   “재미? 자기만족?” 셜록이 필통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보통의 방식으로 이해할 만한 애가 아니긴 해.”

   나는 힘없이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헛소리나 마찬가지인 가설에 흥미를 느낀 나 자신이 한심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N에게 물어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나, 그는 분명 아버지의 결정에 따랐다고 할 것 같았다.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은 조용했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하동의 겨울은 황폐했다. 낡은 공장들과 황량한 논밭을 내달려온 강바람이 아파트 단지에 갇혀 휘돌았다. 나는 무시무시하게 웅웅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겨울을 났다. 귤 몇 알과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들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중상위권 성적에서 더 이상 욕심내지 않았다. 새해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N이 놀자고 연락을 해 왔다. 어디서 놀자는 거냐고 묻자 그는 주말에 F시로 내려오겠다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서울에서 F시까지 오려면 기차로 네다섯 시간은 족히 걸릴 터였다. 주말이 올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N은 정말 그 시간을 견디며 우리 동네에 왔다. 순전히 나를 만나러. 나는 반갑기도 했으나 솔직히 당황스러웠고, 좀 부담스러웠다. 연락을 이어오기는 했지만 N과 그렇게까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우리가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것은 언덕 위에서가 전부였다.

   N과 나는 강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폐타이어 고무분말 아스팔트를 깐 자전거 도로와 시멘트 콘크리트를 깐 보행자 도로가 경계석을 사이에 두고 강과 나란히 뻗어 있었다.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 탓인지 지나가는 자전거도 행인도 없었다. 폭신폭신한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걸으며 귤 두 알을 꺼내 N에게 한 알 건넸다.

   “서울 생활은 어때?”

   “원래 살던 덴데 뭘. 여기보다 편하지.” N이 귤껍질을 까며 말했다. “고등학교는 어디로 가?”

   “근처에 아무 데나 갈 것 같아.”

   나는 다 깐 귤껍질과 귤을 한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귤을 한 쪽씩 떼어 먹었다. 맛이 아주 달았다. N이 내 손에 든 귤껍질을 빼내 자신이 깐 껍질과 함께 산책로와 강가 사이 억새밭에 던졌다. 을씨년스러운 억새 군락이 버석거리며 그것을 삼켰다.

   어색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N이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서울에서의 일상과 고등학교 진학, 그리고 가족 이야기…… 왓슨의 말대로 N의 어머니는 로펌 소속 변호사였다. 잠깐 셜록과 왓슨의 추리를 들려줄까 하다가 관뒀다. 펜션 사건과 관련한 N의 이야기는 내가 관심 없이 듣고 지나친 여느 아이들의 이야기와는 달랐다. 이따금 나는 그가 들려준 일화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곤 했다. 험악한 인상에 담배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형사, 손에 붕대를 감고 천진난만한 찌, 피바다가 된 펜션에서 쓰러진 검마와 피에로 등등, 본 적 없는 상황을 마치 본 것처럼 자세히 상상했다. 그럴수록 그의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더욱 입체적이고 생생해져 갔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기이한 상태에 빠졌다. 내게 N의 존재는 언덕에서의 대화 이후에 더 커졌다. 펜션 사건이 가끔 영화 속의 장면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그것이 실제 사건이라는 점과 N이 그 모든 일의 주동자였음을 되뇌며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해야 했다.

   산책하는 내내 나는 셜록의 추리나 학교 분위기 등은 입에 담지 않았다. N은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았고, 왠지 여기까지 찾아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도리 같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현실감을 잃었던 것 같다. 살을 에는 추위마저도 나를 보러 서울에서 온 친구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지 못했다. 강가를 걷다가 근처 다른 동네의 카페에서 두어 시간을 보내고 기차역까지 N을 배웅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역시나 모든 게 꿈속의 일 같았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마지막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문예 동아리에서는 서로에게 롤링페이퍼를 쓰고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를 감상했다. 동아리 담당 교사인 국어선생님은 교사들 중 드물게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젊었고, 말을 조심했고, 종종 산뜻한 위트를 던질 줄 알았다. 나도 그를 잘 따랐다. 어쩌면 그 시절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어른이었을지도.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내게는 약간의 글재주가 있었다. N이 전학 오기 전까지 교내 글짓기 대회 수상자는 매번 나였고, 학교 대표로 지역 대회에 나가 상을 탄 적도 있었다. N처럼 강당에서 수상작을 낭독하기도 했지만, 선생들이고 학생들이고 주의 깊게 들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점심 메뉴 따위나 생각하고 있었겠지. 모두의 기대와 안중 밖에 있던 나를 국어선생님만은 아껴 줬고, 글재주를 키워 주고 싶어 했다.

   나는 셜록과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다. 특별활동 시간은 수요일 오후에 잡혀 있었는데, 왓슨은 겨울방학 전부터 그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입원한 동생을 보러 가야 했다. 면회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부모는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왓슨은 매주 수요일 오후에 조퇴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나는 발끝으로 바닥을 밀어 의자 앞다리를 띄우고 뒷다리로 중심을 지탱했다. 안락의자를 타듯 간들거리고 있는데 국어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복도에 따라 나가자 그가 창문으로 교실 안을 슬쩍 보더니 내게 말했다. “이따 종례 마치면 잠깐 동아리실로 와.”

   “네?” 나는 망설였다.

   “무슨 일 있니?”

   “약속이 있어서요.” 셜록과 함께 왓슨의 동생 병문안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 오래 안 걸리는데.”

   나는 알겠다고 했다. 교실로 돌아가자 셜록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자초지종을 듣더니 바쁘면 자기 혼자 가도 된다고 했다.

   “얼마 안 걸린대.” 내가 말했다.

   “됐어. 바로 택시 타도 십 분이나 볼까 말깐데. 혼자 갈게.” 셜록이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다음 주에 같이 가면 되지.”

   종례를 마치고 텅 빈 동아리실로 돌아갔다. 오늘부로 다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자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하릴없이 게시판에 붙어 있는 글들을 읽고 있는데, 국어선생님이 작은 파우치를 들고 동아리실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나는 인사했다.

   “그래. 이제 여기도 마지막이네.” 선생님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책상 하나에 걸터앉았다. “동아리 활동은 어땠어?”

   “재밌었어요. 추천해 주신 책들도 방학 때 거의 다 읽었고요. 좋던데요.”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넌 글을 잘 써. 너도 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더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잘 쓰는 게 아니라 정확히 쓰는 건데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선생님이 웃었다. “정확한 눈을 지켜야 해.”

   그가 파우치에서 무엇을 꺼내 내게 건넸다. 머뭇거리다 받아들었다. 인조가죽으로 된 펜파우치에 버건디 색상의 펜이 금색 펜 클립을 드러낸 채 꽂혀 있었다. 펜을 꺼냈다.

   “돌려서 여는 거야.”

   나는 그의 말대로 뚜껑을 조심스럽게 돌려 열었다. 영롱하고 단단해 보이는 커다랗고 깨끗한 금닙이 드러났다. 만년필이었다.

   “이게 뭐예요?”

   “플래티넘 프레지던트. 내가 조금 쓰긴 했는데, 거의 새 거야.” 그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졸업하더라도 웬만하면 글을 계속 써 봐. 도움이 될 거야.”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먼저 동아리실을 나섰다가 다시 문 안으로 몸을 반쯤 들여 나를 바라봤다.

   “그, 전업 작가가 되라는 건 아니야.” 알 듯 말 듯한 표정.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솔직히 나는 독서를 좋아했을 뿐 글쓰기를 즐기지는 않았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는 써야 하니까 썼을 뿐이지, 그 외에는 글을 잘 쓰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저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러겠다고 했다. 어쩌면 선생님은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늘 언행에 신중을 기하던 그는 자신이 학생들의 삶에 책임질 수 없는 영향을 끼칠까 경계했다. 그런 것들을 헤아리기에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선생님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와 무관하게, 그가 내게 좋은 어른이었음은 확실했다.

   만년필을 선물 받은 주중에 왓슨의 동생이 퇴원했다. 주말에 셜록과 나는 왓슨 집에 들렀다. 왓슨의 동생은 우리를 보고 희미한 미소로 인사했다. 한눈에 봐도 수척했다. 부스스한 머릿결은 영양분도 정신도 모두 빠져나갔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개새끼들.” 셜록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인상을 찌푸렸다. “처벌은 어떻게 됐대?”

   우리와 한 살 터울인 왓슨의 동생은 우리와 다른 중학교에 다녔다. 밝고 무난한 성격의 아이라 학교생활도 잘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해 학생들은 학원까지 쫓아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견디다 못해 자해까지 하고 입원한 왓슨의 동생은 퇴원 후에도 정신의학과 통원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흐지부지됐지 뭐. 우리랑 동갑인 새끼들도 있어서 졸업 앞두고 적당히 넘어갈 분위기인 것 같아.”

   “그냥 이대로 넘어간다고?”

   “마음 같아서야 찾아가서 대가리라도 깨고 싶지.”

   셜록과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 봤자 어떻게 되는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저건 뭐야?”

   나는 현관 신발장 근처에 노끈으로 묶인 책들을 가리켰다. 소설책과 만화책 같았다.

   “버릴 것들. 나나 동생이나 저렇게 어두운 거나 좋아하니 안 좋은 일들만 생기는 거라면서 부모님이 다 갖다 버리래.”

   “그게 뭔 말 같지도,” 나는 말을 삼키고 다시 덧붙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왓슨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 상관없지. 나도 알아. 근데 막상 이런 상황 닥쳐 봐. 다 연관되어 있는 것 같고 몽땅 내 탓 같고 그렇지.”

   셜록이 책무더기에 다가가 책들을 손가락으로 주르륵 훑었다.

   “야, 이거 네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이잖아.”

   “그렇지.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가도 돼.” 왓슨이 목덜미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대신 안 좋은 일 생겨도 모른다.”

   “내가 보관할게. 상황 나아지면 다시 가져가.” 셜록이 말했다.

   나는 셜록에게서 닫힌 방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피해 소식을 들었을 때는 화가 나고 안쓰러워 울화가 치밀었는데, 뭐랄까, 막상 왓슨의 동생을 마주한 방금은 오히려 정수리 위에서 얼음이 녹듯 내면이 빠르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문득 N이 떠올라서였을까.

   N은 나를 잠깐 보기 위해 겨울방학 동안 왕복 아홉 시간의 거리를 세 번이나 오갔다. 아무리 나 혼자 팔짱 끼고 아이들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지낸다 하더라도, 먼 길을 찾아와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아이와 친구가 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N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내가 느끼는 N의 이야기의 무게는 먼 길을 달려온 그의 헌신과 비례했다. 또한 자기 얘기만 하는 아이들과 달리 N은 나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끄집어냈고 잘 들어 주었다. 나는 거의 처음으로 친구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해 봤다. 펜션 사건이 보여 준 것은 N의 일부분이었고, 나는 그의 다른 면모들을 차츰 알아가고 있었다. 만약 N을 변호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공정한 판단을 위해 내가 아는 그의 모습들을 선뜻 이야기했을 것이다.

   셜록이 책무더기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왓슨의 동생을 괴롭힌 녀석들도 알고 보면 착한 아이들일 것이다, 라는 말과 진배없고 역시나 부적절한 이야기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사람을 한 면모로 정의하는 게 과연 옳은지, 사람의 한 면모가 다른 면모들을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선악과 관련한 문제라면 어떤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윤탐입니다.

현재 텀블벅에서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출간을 위한 펀딩이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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