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N의 제국」 ②
사건이 터진 것은 일 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였다. N을 포함한 여덟 명의 아이들은 콜택시 두 대를 나눠 타고 해안가로 향했다. N이야 기말고사쯤은 무리 없게 대비해 두었고, 다른 아이들은 성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의 햇볕이 은근한 더위로 해안을 감싸 안았다. 펜션 집 조카라는 여자아이를 따라 모두 펜션으로 향했다. 위치가 좋지 않아 장사를 죽 쑤던 집이었다. 펜션 주인은 돈을 받고 남몰래 조카와 그 친구들에게 방을 내주었다. 아이들 말고 그날 다른 손님은 없었다. 짐을 둔 아이들은 서둘러 선크림을 나눠 바르고 해변에 나가 놀았다. 날씨가 화창해 놀기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한참 수영하던 피에로가 수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야, 안 들어와?”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찌를 불렀다. 뜨거운 모래사장에 앉아 건성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찌가 손차양을 하고 피에로를 봤다.
“나중에 들어갈게.” 찌가 머뭇거리다 소리 높여 말했다.
피에로가 N과 검마를 향해 돌아섰다. “새끼 안 들어오네. 찌답게 물속에 퐁당퐁당 해 주려 했더니.” 그가 찌의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 뺐다 하는 시늉을 하며 킥킥거렸다. N이 그러지 좀 말라며 물을 뿌렸다.
“그러게 놀 줄 모르는 애 데려오지 말자니까.” 검마가 젖은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눈치 없이 따라온 지가 등신이지. 저럴 거면 왜 와?” 피에로가 이죽거렸다.
“너희가 자꾸 놀리니까 그러지. 친하게 지내 좀.” N이 말했다.
아지트에서 여행 계획을 짜던 때, N은 느닷없이 찌를 데려가자고 했다. 피에로와 검마가 썩 내키지 않아하자 가서 말이라도 해 보라며 등 떠밀었다. 다음 날, 피에로와 검마는 교실에서 엎드려 자던 찌를 깨워 다음 주 주말에 바다로 놀러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주변 아이들은 그들의 제안에 한 번 놀랐고, 흔쾌히 응하는 찌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태양이 작열하면서 해변의 모래도 몹시 뜨거워져 갔다. 바다의 수면은 갓 낚은 거대한 물고기처럼 번쩍거렸다.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점심을 때우고 물놀이를 마저 했다. 찌도 그제야 물에 발을 담갔지만 그게 다였다. 발목만 잠기는 곳을 잠시 거닐다가 뜨거운 모래사장에 풀썩 앉았다. 같이 온 여자아이 한둘이나 검마가 이따금 다가가 몇 마디 나누고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찌도 부르라던 N은 정작 그 옆에 가지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펜션으로 돌아갔다. 펜션 주인이 앞마당에 고기를 구울 숯불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순번을 정해 한 명씩 샤워를 했고, 나머지는 쌈 재료와 부엌집기를 들고 파라솔 테이블과 공용부엌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찌가 고기 몇 점을 굽기 시작하자 검마가 그냥 앉아서 쉬라며 집게를 빼 들었다.
“찌 새끼 시켜. 여기 와서 한 게 없잖아. 고기라도 구워야지.” 피에로가 말했다.
“찌라고 부르지 말랬지.”
N이 지나가며 피에로의 뒤통수를 툭 쳤다.
“애칭이지, 애칭. 찐한 사이잖아, 우리.”
피에로가 찌의 허리를 감싸며 맞지? 하고 물었다. 여자아이들은 질색하며 야유를 보냈고, 찌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이거나 먹어.” 검마가 집게를 세워 석쇠에 탁탁 치더니 잘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고기 육즙과 기름이 뚝뚝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고기를 다 먹어갈 즈음 검마와 여자아이 한 명이 편의점에 안주를 사러 갔다. 남은 아이들은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방 안에 술상을 차렸다. 편의점에 간 아이들이 돌아오자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소주와 맥주를 깠다. 찌도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 끼어 있었다. 그를 자세히 보는 아이는 없었다. 여자아이들의 주도로 술게임을 시작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번번이 찌가 벌칙에 걸렸다. 벌칙은 벌주로 소맥을 말아 마시거나 모두에게 몇 대씩 가볍게 맞는 것이었는데, 찌는 매번 벌주를 택했다. 몇 판을 내리 지며 술을 연달아 마시자 피에로가 빈정거렸다.
“지 혼자 술 다 처먹네. 마셔라 마셔. 네가 여기 아니면 어디서 술을 마셔 보겠냐?”
아이들이 모두 웃었다. 아까부터 혼자 급하게 술을 마시던 검마가 유독 크게 웃었다.
“너 때문이잖아. 허구한 날 패니까.” 검마가 대신 대꾸했다.
“패긴 누가 패. 같이 노는 거지.”
피에로가 거드름을 부렸다. 검마가 찌를 쳐다봤다.
“괜찮냐? 적당히 마셔.”
“취하게 둬. 주사나 보자.” 피에로가 낄낄거렸다.
찌는 괜찮다고 했다. 소맥을 한 잔 마신 뒤 볼이 빵빵해지도록 숨을 내쉬었다. 햇볕에 발갛게 탄 얼굴이 술기운에 더욱 붉어졌다. 찌가 잔을 내려놓자 한 여자아이가 진실게임을 하자고 했다. 모두들 유치하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정말 안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게임이 시작되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부터 시작해 연애담이 오갔다. N은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진실게임에 은근히 몰입해 있던 검마와 피에로는 N이 담배를 챙기는 걸 보고 따라나서려 일어섰다. N은 혼자 다녀올 테니 놀고 있으라 했다.
펜션 주인집 불은 꺼져 있었다. N은 재떨이가 비치된 파라솔 테이블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안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왁하고 터져 나왔다. N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나름 즐거웠지만 피곤했고, 무엇보다 지루했다. 담배연기를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장마가 한 차례 지나갔음을 알리듯 구름 한 점 없이 별을 잔뜩 부리고 있었다.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두 번째 개비가 반쯤 타들어갔을 때, 펜션 안에서는 찌가 술병으로 검마의 머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찌는 병실에서 눈을 떴고, 사건 당시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손에 칭칭 감긴 붕대를 보고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담임선생과 형사들이 그날의 상황을 설명해 줬다. 검마는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했고, 피에로는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아래서 형과 함께 살던 찌는 가족 중 그 누구의 병문안도 받지 못했다.
차례로 참고인 조사가 시작됐다. 펜션 주인은 조카의 부탁이라 방을 내줬을 뿐, 아이들이 술담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여자아이들은 직접 공격당하지 않아 외상은 경미했으나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중 검마와 비밀 연애를 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남자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형사는 나머지 여자아이 세 명을 차례로 조사한 뒤 이야기를 종합했다. 핵심은 쉽게 모아졌다. 찌가 왜 그랬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직전, 아이들은 진실게임의 일환으로 피에로의 연애담을 듣고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취한 여자아이 한 명을 제외한 두 아이가 진술했다. 시간이 지나고 검마의 여자친구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피에로의 여자친구는 고등학생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아이들과는 친분이 없었다. 형사는 대화 도중 찌의 신경을 긁을 만한 이야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여자아이들은 모르겠다고, 아마 없었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모두 그날 처음 찌를 만났을 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녀석이 언제 얼마나 마시며 취했는지 따위는 안중 밖이었다.
N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마을을 내려다봤다. 공터 깊숙한 곳에 설치된 가로등이 켜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몇 발짝 앞에 떨어진 알사탕으로 시선을 옮겼다. 경계석 근처에서부터 알사탕까지 개미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N은 찌의 병문안을 다녀왔다고, 아버지가 찌를 일반 병실에서 VIP 병실로 옮겨 줬다고 말했다. 나는 가해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찌의 병문안이 가능한지, 불가능하다면 혹시 N의 아버지가 힘을 쓴 것인지 궁금했다. 캐묻지는 않았다.
“찌는 좀 어때?”
“몸은 엉망인데 정신은 멀쩡해. 기억은 안 돌아왔대.” N이 내게서 조금 떨어진 다른 벤치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웃던데.”
“웃어?”
“피에로가 아직 의식 불명이라는 얘기에 웃더라고. 안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어차피 검마도 죽인 거, 걔까지 죽였어야 했다면서.” N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걔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 애들이 깨어나면 보복당할 게 뻔하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나는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N이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뱉으며 씩 웃었다.
“제정신이었다는 거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찌가 고의로 복수했다는 말이야?”
N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담배를 길게 빨고 땅에 떨어뜨려 비벼 껐다. 철봉 아래에도 담배꽁초가 수두룩했다.
“예상대로였어. 판 깔아주니 칼춤 제대로 추던데.”
“판?”
“찌 녀석, 원래 주사가 좀 심해.” N이 술병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학기 초에 아버지가 직장 후배를 집에 초대했었어. 그 사람 동생이랑 같이.”
N의 아버지는 요리솜씨가 좋았다. 직접 차린 문어숙회와 소불고기, 잡채 등을 보고 두 손님은 혀를 내둘렀다. N의 아버지와 N, 직장 후배와 그의 동생이 하얀 세라믹 식탁에 둘러앉아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N의 아버지가 직장 후배의 동생에게 잡채를 덜어 주며 물었다. “우리 애랑 같은 학교 다닌다면서?”
“네.”
“같은 반이에요.” N이 덧붙였다.
“친하게 지내. 자주 놀러 오고.” N의 아버지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N은 아버지의 직장 후배를 살폈다. 성격이나 외모 모두 동생과는 딴판으로 보였다. 동생이 학교에서 찌라고 불리는 건 알고 있을까. N은 찌에게 많이 먹으라며 접시를 가까이 밀었다. 학교에서 녀석은 좀, 불쌍했다.
아버지와 찌의 형은 식사에 반주를 곁들였다. 직장 얘기와 회사 업무, 회계 장부, 주가 증감, 업계의 전망 등 사무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N과 찌가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직접 차린 음식들만 봐도 N은 아버지가 찌의 형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어른들은 커피를 마셨고, 회사에 관련한 자못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싶더니 이내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찌는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무릎까지 덮은 반바지 아래로 깡마른 다리가 비죽 나와 있었다.
“맥주 마실래?” N이 물었다.
찌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 캔쯤 마시는 건 아버지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N은 덧붙였다. 찌를 방에 들여보내고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찌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둘이 있으니 친해져 봐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N의 방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좋았다. 다양한 종류의 책과 영화 포스터, 화집, 피규어, 음반, 기타, 게임 시디 등 일반적인 취미생활에 필요하달 것은 웬만큼 갖추고 있었다. 영 할 얘기가 없으면 음담패설이라도 나눌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N은 그런 이야기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방을 천천히 훑어보던 찌는 N이 권한 의자에 앉아 캔맥주를 받아 들었다.
“술 마셔 봤어?” N이 캔을 따며 물었다.
“한 번.” 찌도 캔을 땄다. “맥주는 아니었어.”
“음. 맛없어서 놀라진 않겠네.”
둘은 건배했다. 찌는 두어 모금 마신 뒤, 시선을 허공에 부려놓았다. 방에 있는 어떤 것도 눈길을 끌지 못한 게 분명하다고 N은 생각했다.
“주말엔 보통 뭐해?” N이 물었다.
“골프.” 찌가 캔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백악관이나 나사에 다녀오기도 하고.”
“나랑 얘기하기 싫냐?”
“아냐, 농담이야.”
“학교 끝나면 뭐하는데?”
“또 자.”
“너 진짜.” N이 짜증을 냈다.
“정말이야.” 찌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집에 가서 누워 자.”
N은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맥주를 마셨다. 형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말 별거 없는 애였다. N과 찌는 별말 없이 술만 마셨다. 꽤 많이. N의 휴대폰이 울렸다. 피에로의 전화였다. 그는 받지 않고 휴대폰을 엎어뒀다. 찌는 풀린 눈을 하고서 무릎만 만지작댔다. 몸이 꾸벅꾸벅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
“피에로 성가시지 않아? 계속 시비 거는 거. 검마도 그렇고.”
N이 물었다. 찌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발음이 꼬였다. 그는 일렬로 세워 둔 빈 캔 하나를 집어 들어 구긴 뒤 자신의 무릎을 톡톡 쳤다. 그러더니 불콰한 얼굴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N이 입을 뗐다.
“왜 당하기만 해?”
“대들어 봤자 더 처맞기나 하지.” 찌의 목소리에는 체념 아닌 단호한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발음은 다소 뭉개졌지만.
“네가 가만히 있으니까,”
“됐어.” 찌가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길게 트림했다. “끝을 볼 게 아니면 시작도 안 하는 게 나아.”
허공을 향한 찌의 눈에 취기와 살기가 돌았다. N이 그의 눈을 흘깃거리면서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찌는 방금 비운 캔을 구겨 바닥에 툭 던지듯 놓았다.
“벼르기만 해서는 별 수 없다?” N이 부드럽게 말했다.
“뭐?”
“그렇게 비장해 봤자 아무도 모른다고. 넌 내일 또 처맞을 거고.”
“네가 뭘 알아?”
“녀석들을 알지. 널 얼마나 좆밥으로 보는지.”
“씨발, 그건 나도 알아.” 찌가 인상을 찌푸렸다.
“모든 애들이 알지. 전학 온 나도 아는데. 너희 형님은 모르실까?”
“닥쳐.”
N이 맥주 캔 윗부분을 잡고 둥글게 흔들었다.
“졸업이라도 기대하는 거야? 고등학교 가서도 별 수 없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찌가 욕을 하며 달려들었다. N이 잽싸게 일어나 찌를 밀쳤으나 녀석은 다시금 거세게 달려들었다. 살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N이 찌의 어깨를 꽉 쥐고 발을 걸어 침대에 넘어뜨렸다. 발버둥치는 녀석의 몸 위로 올라가 무릎으로 양 어깨를 짓누르고 턱을 움켜쥐었다.
“새끼, 재밌네.”
찌는 그를 노려보며 안간힘을 썼다. 못 당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작은 체구에 비해 힘이 좋았다. N의 얼굴에 차츰 흥미로운 미소가 번졌다.
밤이 깊어 가던 펜션에서, 진실게임을 하자는 여자아이와 손사래 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찌를 N만이 간혹 흘깃거렸다. 그는 찌가 마신 술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찌는 혼자 종이컵에 소주를 몇 잔 더 따라 마셨다. 진실게임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다. N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나갔다.
병이 깨지고 여자아이들이 뛰쳐나왔다. N은 상황을 묻고 펜션 안으로 달려갔다. 검마는 나가떨어진 뒤였고, 피에로는 쓰러진 채 찌한테 목이 졸려 심하게 발버둥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N은 골치 아프다는 듯 검지로 콧등을 비스듬히 문질렀다. 내키지 않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피에로의 다리를 직접 잡아 눌러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곧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찌가 놀랄 만큼 안정적인 자세로 피에로의 어깨와 가슴팍을 짓누르고 있던 것이었다. 일전에 N이 찌를 제압했을 때와 같은 자세였다. 피에로는 애쓰는 듯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N은 피에로의 몸부림이 완전히 멈추고도 좀 더 기다린 뒤, 달려가 찌의 머리를 발로 갈겼다.
N이 병문안을 갔을 때, 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찌는 천진난만했다. N은 손님용 의자에 앉아 사건 당시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피에로의 목을 조르던 찌의 눈은 분노와 광기, 취기에 돌아 있었다. 그렇게 보였었다. 하지만 그날 찌를 돌게 한 것이 두려움이었다면.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너 제정신이었지?” N이 불쑥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끝장내자고 마음먹었던 거지?”
찌가 N을 똑바로 쳐다봤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찌의 입가에 미소가 깊게 새겨졌다.
“기억 안 난다니까.”
그 말을 들은 N은 찌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둘은 병실 밖으로 웃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애썼다.
수사는 ‘학교폭력에 대한 보복’으로 종결됐다. 그래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왜 찌는 피에로가 아니라 검마를 먼저 공격했을까? 피에로를 먼저 공격하기에는 두려움이 컸다는 게 형사의 견해였다. 또한 늘 피에로 곁에서 폭력을 방관한 검마에게도 원한이 컸으리라 판단했다. 석연찮은 결론이라고 N은 생각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확실한 만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였다.
찌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피에로는 깨어나지 않았다. 검사는 증거와 정황을 토대로 사건 당시를 재구성했다. 찌는 검마를 병으로 먼저 내리치고 유리 파편으로 피에로의 얼굴을 그은 뒤 목을 긋고 가슴팍을 찔렀다. 피에로가 얼굴을 감싸 쥐고 여자아이들이 펜션에서 뛰쳐나오는 동안, 찌는 다른 술병으로 또 한 번 검마를 내리친 뒤 깨진 병목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술병으로 피에로의 머리를 내리치고 목을 졸랐다. N은 확신했다. 찌는 그날 술자리에서 수도 없이 그들을 죽이는 상상을 했으리라고.
찌는 소년교도소에 송치됐다. 재판부는 피해자들과 피고인 사이의 골이 깊었던 만큼 술에 취해 사리분별이 어려웠어도 가해의 의도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특수상해 및 특수상해치사. N은 아버지와 함께 모든 재판을 참관했다.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눈만 내리깔고 있는 찌를 보며 N은 피고석에 앉아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쳐다봤다. 인생의 비상구, 그런 것이 정말 필요할지 몰랐다.
“그 녀석, 한 번 내리치고 마구 그은 다음에야 정신이 들었겠지. 보복당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N의 발밑은 신발코로 마구 그은 자국과 담배꽁초들로 어지럽혀 있었다.
“넌 찌가 그럴 줄 알았고?” 내가 물었다.
“어느 정도는. 그러라고 데리고 간 거니까.”
땅거미가 지며 온 마을이 검푸르게 차분해져갔다. 더위를 식혀 줄 수 없는 미온의 바람이 살갗을 스쳐갔다. N이 일어나 철봉에 다가갔다.
“갑자기 연락했는데 나와 줘서 고맙다.”
“고맙긴.”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렇게 느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왜 나한테 들려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려다 관뒀다. 평소에도 적지 않은 아이들이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곤 했다. 가끔은 나를 어떻게 믿고 이런 이야기까지 하나 싶은 아이들도 있었다. 공연히 신발로 흙을 흩뜨렸다. 땅에 떨어진 알사탕은 여전히 개미 떼의 애호를 받고 있었다. N이 일어나 자신의 키보다 높은 철봉에 다가가서 살짝 뛰어 매달렸다. 가볍게 두어 번 턱걸이를 하고는 가뿐히 착지했다.
“나 다시 전학 가. 서울로.” N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젠가는 떠날 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우리 동네, 우리 학교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나는 철봉 아래로 가서 그와 함께 마을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어둠이 언덕 아래를 집어 삼켜 동글동글한 가로등 불빛만 빛나고 있었다. 집도 논밭도 공장도 길도 구분되지 않았다. 시시하다, 하고 N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잠자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N이 돌연 돌아서서 악수를 청했다. 서울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나도 악수를 받으며 혹시나 놀러오면 연락 달라고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반년에 걸친 N의 제국사는 그렇게 마쳤다.
안녕하세요, 윤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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