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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Oct 24.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5화

1부 「카니발」 ①

   매일 아침, 침대에는 간밤의 꿈과 햇살과 성적몽상이 이불과 함께 헝클어져 있다. 알람을 끄고 베개에 머리를 얹은 채 멍하니 일이 분을 보낸다. 동향의 창문으로 풍성한 아침햇살이 연노랑의 얇은 커튼을 거쳐 온 방 안에 부드럽게 넘실거린다. 매일 보는 풍경임에도 현실감을 잃게 만드는 푸근한 풍경. 넋을 놓았다가, 벌떡 일어난다.

   왜 고등학생들은 방학에도 등교해야 하는가. 지루한 일과를 끝낸 뒤 왓슨과 인사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는 상동으로 향했고 나는 하동 아이들과 후덥지근한 굴다리 아래를 지났다. 땀에 젖은 교복 앞섶을 펄럭였다. 여름의 장점이라고는 낮이 길다는 것뿐이었다. 개천에서 물비린내가 진하게 풍겼고 약간 기운 햇살이 비추는 길 군데군데에는 날벌레가 들끓었다. 아이스크림이나 몇 개 사려고 아파트 상가에 들어섰을 때, N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대뜸 오늘 저녁에 놀러가도 괜찮을지 물었다.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가게 주인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갑자기?”

   금요일이긴 했으나 당일 약속은 갑작스러웠다.

   “응. 내일 J대학교 행사에 아버지랑 참석해야 하거든. 오늘 너랑 놀다가 내일 J대로 넘어갈까 싶어서.”

   J대학교는 F시 남쪽에 접해 있는 타 광역시 소재 사립 대학교였다. N은 이미 나랑 놀 생각에 목소리가 들떠 있는 듯했다. 냉동고 유리문을 통통 두들기며 아이스크림을 눈으로 훑었다.

   “그럼 아버님이랑 같이 오는 거야?”

   “그럴 리가.” N이 웃었다. “아버지는 내일 J대로 바로 가실 거야.”

   나는 부모님께 여쭤본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냉동고를 뒤적이자 성에 바스라지는 소리와 비닐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시원하게 소란했다. 부모님과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여러 개 골라 계산했다. 부모님은 퇴근 전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화해 N의 이야기를 전하자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다.

   “오늘 아빠랑 늦게 들어갈 거야. 편하게 놀아.” 어머니가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이스크림 샀어요. 냉동실에 넣어 놓을게요.”

   어머니는 내가 허락을 받고자 아이스크림을 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정정하지 않았다.

   N은 저녁을 먹고 온다고 했다. 라면 두 봉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휴대폰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검색했다.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배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연기하는 배우, 혹은 어떤 배역이든 자신의 모습에서 뻗어나가는 배우. 전자의 연기는 화려하고 진하나 자칫 어설플 수 있었고, 후자는 개성적이며 안정적이나 뻔해지기 쉬웠다. 나는 전자가 좋았다. 연기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행위라 생각했다.

   설거지와 샤워까지 마친 뒤 연기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때 N이 거의 다 왔다고 연락했다. 아파트 단지 앞에 마중을 나갔다. 굴다리 아래서 흰색 세단이 나타나 마을로 들어섰다. 세단은 개천과 나란히 난 도로를 따라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더니 아파트 단지 앞에 멈췄다. 오른쪽 뒷좌석과 운전석이 동시에 달캉 열리며 N과 낯선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좌측 뒷좌석에서 가먼트 백을 꺼내 N에게 건넸다. 짐가방까지 챙긴 N은 감사하다며 남자에게 짧게 인사했다. 나도 남자와 눈이 마주쳐 어정쩡하게 목례했다. 그도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누구야?”

   “아버지 회사 동료. 내일 함께 참석하시거든. 오늘 J대 근처에 묵으신다길래 같이 타고 왔지.”

   우리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N은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생소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그것은 어딜 가든 나타나는 N의 버릇이고, 그가 친구에게서 수집한 버릇이기도 했다. 모든 사물과 풍경을 처음 보듯 바라보면 그것들이 감각적으로 살아난다고 했다. “그냥 보면 대상은 그저 있을 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어.” 생생하게 살아나는 풍경들. 흰 나시를 입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주민. 중앙이 움푹 팬 아스팔트 도로를 에둘러 가는 자전거. 모서리가 깨진 놀이터의 벽돌담. 짙푸를 대로 짙푸르러져서 축축한 기분까지 들게 하는 화단의 나무들. 괜히 신경이 곤두섰고, 주의를 돌리려 가먼트 백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물어봤다.

   “교복이야. 내일 행사에 입어야 해서.” N이 갑자기 멈춰 서서 나를 살폈다. “키 큰 것 같다?”

   “그럼. 아주 무럭무럭 자라고 있지.” 나는 씩 웃었다. 올해만 오 센티미터 이상 자랐다.

   내가 집의 창문들을 꼼꼼히 닫고 거실의 에어컨을 켜는 동안, N은 가먼트 백에서 교복을 꺼내 내 방 행어에 걸어 두었다. 그가 가방에서 녹색의 무시무시하게 생긴 위스키 병을 꺼냈다.

   “이거.” N이 내게 건넸다. “부모님 선물.”

   “올 때마다 미안하게.”

   “내가 좋아서 오는데 뭘.”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병을 받아 라벨을 살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스펠링 그대로 읽으면 된다고, 아드벡 코리브레칸이라고 N이 말해 줬다.

   “특이한 이름이네.”

   “마셔 볼래?”

   “됐어. 부모님 선물인데.”

   “우리 몫은 따로 있지.” N이 가방에서 조그만 잭 다니엘스를 꺼냈다. “간단하게 먹자고.”

   나는 글렌피딕 로고가 그려진 온더록스 잔 하나에 얼음을 채우고 샷 잔 하나를 챙겨 방으로 가져갔다. 그 잔들도 모두 N이 먼젓번에 위스키와 함께 가져온 잔들이었다.

   “오려면 며칠 전에 연락하지.” 샷 잔에 위스키를 따라 건네며 내가 말했다. “뭐, 언제 연락해도 상관은 없지만.”

   “갑작스러워야 즐거움이 배가 되지.” N이 연극적으로 팔을 벌렸다가 풀썩 웃었다. “미안, 사실 나도 행사 일정을 오늘 알았어.”

   내일 예정된 행사는 J재단이 주관하는 장학 후원 행사였다. 참석 대상은 후원자들과 장학생들, 그리고 후원자의 초청 손님들이었다. J재단의 장학생은 중학생부터 대학원생까지 다양했는데, 그중 중고등학생들이 참석 대상이었다. 후원자들은 가족과 지인을 소수 초대할 수 있었다. 아마 재단 홍보와 새로운 후원자를 모집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N은 말했다. 나는 온더록스 잔에 위스키를 따라 그와 건배했다.

   “너도 장학생이야?”

   “아니.” N이 코를 찡긋거렸다. “아버지가 후원하셔서.”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코를 쨍하게 휘감는 독특한 향이 얼얼하게 풍겼다.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일박이일 일정이야.” N이 말했다. “교회만 아니었으면 너도 같이 가자고 했을 텐데.”

   “나? 나도 가도 돼?”

   “당연하지. 아버지가 초대했다고 하면 돼.”

   나는 술잔을 다시 쥐었다. 잔 표면의 엷은 물기가 손바닥에 냉기를 전했다. 두어 모금 마시고 얼얼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요즘 교회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왜? 너 잘 다녔잖아.”

   “모태신앙이지. 근데 자꾸 의구심이 들더라고. 만약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과연 내가 알아볼 수 있을까.”

   N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뭐, 일곱 재앙에 천둥번개 몰고 나팔 부는 천사들까지 대동해 온다면야 누가 봐도 예수의 재림이다 싶겠지만, 이천 년 전처럼 초라하고 낮은 데서 태어난다면 솔직히 알아볼 자신이 없어.”

   “이천 년 전에도 예수는 이단으로 몰려 죽은 거나 다름없었지.” N이 웃었다. “지금 이단들 중에 예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내가 바란 건 구원보다도, 메시아 같은 특별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었던 것 같아.”

   “그래?” N이 잔을 채웠다. “내일 후원 행사가 굉장한 안목이 필요한 자리거든. 관심 있어?”

   우리는 내일 함께 참석하기로 하고 건배했다. 부모님도 N과 함께 간다면 허락해줄 게 분명했다. 녀석에 대한 부모님의 신뢰는 나 못지않았다. 그 덕에 나는 그와 놀기 한결 편했지만, 일말의 석연찮음 또한 따랐다.


   다음 날 정오에 우리는 교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전날의 흰색 세단이 우리를 태우고서 하동을 유유히 빠져나가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향했다. N은 행사 분위기와 유념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일러줬는데, 나는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아까 집에서 교복을 갈아입은 N을 봤을 때 느꼈던 이질감이 가시질 않았다. 나와 다른 교복을 입고 있는 게 당연하고, 하물며 전날 저녁에 그의 교복을 처음 봤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가 교복 입은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거리감이 들었다. 녀석과 나의 세계가 단절되어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아무 상관없다는 상징 같았다.

   “내 말 듣고 있어?” N이 인상을 찌푸렸다.

   “응. 행사장이 어디랬지?”

   “중앙강당. 안 듣고 있었네.”

   나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미소 지었다. N이 교복 칼라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바람이 통하게 했다. 룸미러를 흘깃거린 운전석 남자가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온갖 차들의 행렬이 교통체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마 다른 출입구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운전석 남자가 말했다. 차창 밖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어 주황색 보도블록을 번쩍번쩍하게 비췄다. N은 차문을 벌컥 열었다.

   “내리자. 저희 먼저 걸어갈게요.”

   “그래. 행사장에서 보자.” 운전석 남자가 뒤돌아 씩 웃었다.

   우리는 인도로 넘어가 행사장으로 향하는 학생들 사이에 섞였다. 햇볕이 따가워 뒷덜미가 뜨거웠다.

   “장학생들이야.” N이 학생들을 둘러보고는 정문에 밀리는 차들을 가리켰다. “후원자에 그 손님만 해도 인원이 상당하니까 장학생들한테는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거든. 부모님이 데려다주신대도 그분들은 참석 못 하시니 수고도 덜어드릴 겸.” N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명은 그렇지만 좀 너무한 처사지?”

   “그럴 수 있지. 차가 심하게 막히긴 하네.” 나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장학생들에게서 기대할 법한 자신감이나 자부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개 서로 다른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간혹 같은 교복의 학생들끼리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냉랭하고 권태로운 표정들을 나는 곧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더위에 모두가 해맑고 신날 필요는 없으니까. 뒤돌아보니 흰색 세단이 저 멀리서 느릿느릿 기어오고 있었다.

   중앙강당 로비에는 참석자 명단과 다과, 커피 등이 준비된 안내 테이블이 좌우에 하나씩 있었다. N은 나를 데리고 오른쪽 테이블로 갔다. 안내원이 우리 이름을 듣더니 <후원자 참석 명단>을 펼쳐 주었다. 나는 왼쪽의 안내 테이블을 힐끗 건너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N이 먼저 서명하고 펜을 넘겼다. 전날 밤 급하게 참석 의사를 밝혔음에도 N의 이름 아래 나의 서명 칸이 있었다. 칸을 벗어날 정도로 크게 쓴 N의 서명 아래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안내 테이블에 구비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챙겨 강당으로 들어갔다. N은 안내원들도 J재단이 중고등학생 때부터 후원한 명문대 장학생들이라고 귀띔했다.

   중앙강당에 들어서자 정문에서부터 느껴온 이질감이 실체를 드러냈다. 입구에서부터 강당 중앙까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다닥다닥 깔린 철제 접의자는 압도적인 냉엄함을 보였다. 접의자 군락 너머에는 서른 개쯤 되는 원탁이 넉넉한 간격을 두고 단상 앞까지 놓여 있었다. 하얀 식탁보에 꽃병과 샴페인, 다과들로 장식된 원탁이었다. 왼쪽 안내 테이블을 거쳐 들어온 장학생 무리는 철제 접의자에, 오른쪽 안내 테이블을 거쳐 들어온 후원자 무리는 원탁에 가 앉기 시작했다. 하나둘 채워지는 서로 다른 군락을 바라보면서 나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N이 내 어깨를 감싸 쥐며 얼른 가서 앉자고 했다. 원탁에는 자리마다 간이 명패들이 놓여 있었다. 후원자 자제로 보이는 한 학생이 N을 알아보고는 안부를 물으며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우리 테이블에는 나와 N 말고도 두 사람의 명패가 더 있었다. 운전석 남자와 N의 아버지일 터였다. 입이 말라 커피를 들이켰다. 원탁의 아이들 몇몇이 찾아와 N에게 인사했다. 모두 부티가 풀풀 나는 인상들이었지만, 원탁의 후광 덕분이리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만났다면 그냥 평범한 아이들로 보였을 것이다.

   “네가 F시에 사는 친구구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풍채가 좋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는 중이었다. 그의 눈매는 N과 똑 닮아 좋은 인상을 주다가도 순식간에 섬뜩함을 안길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짧은 순간 압도당한 채 N의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네, 맞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겨우 인사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몸에 꼭 맞는 네이비색 정장이 젊고 세련된 인상을 줬다.

   원탁 군락이 천천히 채워지는 동안 철제 접의자 군락은 갖가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거의 다 채워져 있었다. 눈이 어지러웠다. 운전석 남자도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원탁에 합류했다. 한 손에 책자를 든 그는 자리에 앉으며 장학생 무리를 돌아보았다. “잡탕이네.” 그는 조소를 흘리며 엎어 놓은 잔 두 개를 바로 세우고 샴페인을 따서 잔을 채웠다.

   아아, 하고 강당 스피커가 울렸다. 흰 정장을 맞춰 입은 남자가 단상에서 마이크를 쥐고 서 있었다. 경박한 인상에다 건들거림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말본새도 약장수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이 행사의 사회자였다.

   여느 행사처럼 개회사부터 내빈 축사까지 길고 지루한 순서가 이어졌다. 내빈들은 하나같이 위엄을 뽐내려는 굵고 낮은 목소리를 위조해냈다. 나는 단상 뒤쪽에 마련된 내빈용 소파 개수를 세어 보고서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것에 탄식했다. 분위기를 보니 중요한 행사임은 분명해 보였다. 축사를 하는 내빈에 따라 좌중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고, 손님들 중 몇몇은 후원에 동참하기로 한 듯 긍정적인 제스처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이었고, 나는 이 행사가 왜 이틀짜리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빈 축사에 이어 장학생 현황을 포함한 기존 장학생들의 진학률, 취창업 성공률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발표는 사회자가 계속했다. 발군의 말솜씨였고 내용도 전문적이었지만 경박한 약장수 느낌은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나서야 J재단의 장학제도가 단순히 기부나 지원의 의미가 아닌 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다분히 쓸 만한 인재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했으며, 대부분 J재단의 계열사에 입사시켰다. 장학생들이 창업하는 경우 주식을 상장해 최고 주주를 J재단과 후원진이 갈라먹는 방식이었다. 나는 사실상 장학금이 아니라 대출금 아니겠냐고, 장래에 월급을 구 대 일로 뜯기는 노예계약이리라 멋대로 생각했다.

   “다음은 하반기 장학생 후보들입니다.”

   힘을 잔뜩 준 사회자의 목소리가 돔 천장을 쩡쩡 울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당 뒤쪽에서 의자들 끄는 소리가 나를 비롯한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 장학생 전원의 무미건조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표정도 환호도 없는 박수들이었지만 사회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근시를 뽐냈다. 장학생들이 다시 앉자 모두 단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크린에 팔십 명 가량의 장학생 후보 증명사진이 떠올랐다. 사회자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첫 번째 후보의 사진이 확대됐다. 이름과 주소, 나이, 학교, 성적과 교우관계 등 상세한 프로필이 스크린 한쪽을 장식했다. 운전석 남자는 재빨리 책자를 펼쳐 N의 아버지 앞에 두었다. 책자 속 사진은 스크린에 뜬 학생과 같았다. N의 아버지는 책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단숨에 샴페인을 들이켜고 잔을 밀어놓았다. 사회자가 프로필을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자세한 내용은 책자를 참고하라고 덧붙였다. 스크린은 다음 학생 사진으로 넘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후원자들은 책자를 살펴보는 중이었고, 손님들은 약간의 흥미와 호기심을 띤 채 힐끗거릴 뿐이었다. 후보가 한 명 한 명 소개될 때마다 조금씩 분위기에 열이 올랐다. 후원자들은 후보 파악에 몹시 집중했다. 손님들이 어깨너머로 관심을 보여도 건성으로 알려주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점이 손님들을 안달하게 했다. 그러니까 이 행사에는 뭐랄까, 도박의 유희가 느껴졌다. 후원자들은 베팅에 열을 올린 도박사들 같았고, 초청된 이들은 얼른 판에 끼고 싶어 달아오른 호구들 같아 보였다.

   “어때? 굉장한 안목이 필요한 자리지?”

   N이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사회자가 아홉 번째 학생을 소개했다.

   “구 번 마.”

   책자를 살피던 운전석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입으로 작게 말발굽 소리를 냈다. 나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불쾌한가 보네.” 말을 건 사람은 뜻밖에도 N의 아버지였다. 그는 나를 보며 씩 웃고는 다시 책자에 집중했다.

   “네?”

   “좋은 시작이야. 불쾌함을 증오로 발전시키도록 해. 증오는 오기를 불러일으키고, 그게 친구의 삶을 몇 계단 위로 끌어올려 줄 거야.”

   “집중하셔야 합니다, 대표님.” 운전석 남자가 걱정스레 말하고는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N의 아버지가 엄한 데 신경 뺏기지 않도록 대신 상대해 주겠다는 티가 역력했다. “친구는 저기 있는 학생들이 들러리 같아요?” 그가 철제 접의자 군락을 가리켰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요.”

   “망했네. 친구의 눈이 정확하다면 저기에는 인물이 없겠다.” 남자가 퍽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봐 줘요. 분명 눈에 불꽃 튀는 학생들이 있을 겁니다.”

   그는 장학생들을 다시 돌아보라고 손짓했다. 마지못해 몸을 돌려 그들을 찬찬히 살폈다. 무미건조한 표정들 사이사이 저마다의 농도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얼굴도 있었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는 얼굴도 있었다. 운전석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장학생들이 여기서조차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후원은 죽 쒔다고 봐야죠. 불쾌감이나 호기심, 흥미를 느끼는 학생들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그 학생들도 별 볼 일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가망 없는 경주마란 뜻인가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멸이 완곡하게, 그러나 가감 없이 드러나길 바랐다.

   “오해하고 있군요. 우리는 우리만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학생들은 오직 본인들을 위해 자극을 받으라는 거죠. 이런 장난에 무신경하거나 토라져 버린다면, 그저 그런 정도의 학생인 겁니다. 별거 없는 인생을 살겠죠. 그러나 동경이든 증오든, 오늘을 원동력 삼아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뒷배가 되어줄 테니까요. 쉽게 말해 오늘 우리는 저들에게 기회를 주는 원탁의 기사들인 셈이죠.”

   남자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원탁의 기사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나는 단상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승리의 미소를 지을 남자가 역겨웠고, 그걸 예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긴 셈 쳤다.

   장학생 후보 소개가 끝난 뒤, 사회자는 내일 오후 이곳에서 장학생 선정 투표가 진행된다고 알렸다. 당장의 행사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무대 조명이 꺼지고 사회자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후원자들은 익숙한 듯 몇 사람씩 모여 샴페인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황과 사업, 정치, 자녀, 그리고 후보에 관한 이야기들. 나 같은 아이들이 낄 틈이라고는 없었다. N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며 나가자고 눈짓했다. 로비에서 우리는 기숙사 출입증을 받았다.

   “여기는 방학에 보름 정도 기숙사를 전부 비워. 후원 행사는 매년 그때를 맞춰 진행하지. 그래야 이 많은 학생을 재우니까.”

   “어른들은?”

   “그건 우리 알 바 아니지.”

   바깥은 아직 환했다. 해가 슬슬 기울며 노란 햇살이 풍경을 물들이고 있었다. 습도 높은 열기가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진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숨을 몰아쉬고 손부채질을 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중앙강당 맞은편 흡연구역으로 몰려가서 담배를 피웠다.

   “너무 대놓고 피우는 거 아니야?”

   “좀 봐줘, 나도 피울 거니까. 잠깐만 기다려.”

   N이 내 어깨를 툭 치고 흡연구역으로 갔다. 나는 헛웃음을 짓고 강당 입구 기둥에 기대 휴대폰을 꺼냈다.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드니 어떤 아이가 N의 담뱃불을 붙여 주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대학교 구내식당 세 곳에서 이뤄졌다. 어른들은 모두 학교를 비운 모양이었다. 안내원들이 성실하게 학생들을 인솔했다. 메뉴는 오므라이스로 통일되어 있었는데, 대학생활에의 기대를 잡칠 만큼 더럽게 맛이 없었다. 억지로 반쯤 먹다 일어나자 N이 내 접시를 잡았다.

   “다 먹는 게 좋을걸.” 건성건성한 말투였다.

   “맛없어.”

   “그래도 먹는 게 좋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말투와 달리 N이 내 접시를 너무 꽉 잡고 있었다. 낯선 환경에 있으니 나도 모르게 녀석의 말에 고분고분해진 면도 있었다. 남은 오므라이스를 꾸역꾸역 먹어치우고 N과 식당을 나섰다.

   우리는 식당 옆 흡연구역으로 향했는데, 그쪽 가로등 근처에서 홀로 담배 피우는 아이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야, 잠깐만,” 나는 N을 제치고 흡연구역으로 달려가 녀석에게 다가갔다. “너 셜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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