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카니발」 ③
“왔네요?” 포니테일이 다른 아이들을 돌아봤다. “인사해. N 선배 친구래.”
모두와 가볍게 인사했다. 다른 무리들보다 멀쩡한 게 아무래도 무알콜 음료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실수라도 할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리려 했다. 포니테일이 잠시 나랑 얘기하다 오겠다며 들고 있던 술잔을 친구에게 건넸다. 우리는 사람이 비교적 적은 곳으로 갔다. 어둡고 소파가 좀 가깝고, 뭐 그런 자리였다.
“아까는 찬바람 불더니.”
“에어컨 바람이 셌나 보지.”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유머에 소질이 없어.”
“잘 아네. 애쓸 필요 없어.” 포니테일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계속 술잔을 들고 있었다. 아까 누구에게든 맡겼어야 했는데. 이미 나도 모르는 주량을 넘어서서 약간의 술만 더 들어가도 사달이 날 판이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자 포니테일이 내 술잔을 앗아갔다. “어, 그거 진짜 술인데,” 그러나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그는 술을 다 들이켜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런 걸 왜 먹어?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포니테일이 빈 소파를 향해 걸어가며 내 술잔을 근처 안내원에게 건넸다. 포니테일의 뒷모습을 따라 걷는 이 순간이 꼭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포니테일은 술과 대화를 탐하는 무리들을 지켜봤고, 나는 별 뜻 없이 주먹으로 무릎을 통통 치고 있었다. 술잔은 아까 내 손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손에 쥐여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술이 깨고 있다는 자각과 그렇지 않다는 취기가 몸속에서 커다란 와류를 형성했다.
어딘가에서 요란스럽고 위험한 소리가 났다. 인사불성의 한 학생이 술잔을 내던지고 주정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출입구를 지키던 안내원 두 명이 달려오더니 녀석을 손쉽게 제압해 강당 밖으로 끌고 나갔다. 주변의 아이들은 팔짱을 끼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경멸과 조소를 날렸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안내원이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파티, 어때 보여?”
포니테일이 물었다. 비질하는 안내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회의가 깃들어 보였다. 나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맛 가고 정신 나간 십대들의 소꿉놀이 같아.”
나는 후련한 톤으로 대답했다.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어른들 하는 건 다 하고 싶은 바보들이지. 그래 봤자 부모에게 허락받은 인생들밖에 못 살면서.” 그는 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짧게 짓고 시선을 피했다. 녀석들이 어른들을 동경하고 모방하는 동안 아등바등 녀석들을 흉내 내던 스스로가 창피해졌다. 포니테일이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덮었다. 고드름처럼 차가운 그의 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까보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취해서 그런가 봐.” 내가 대꾸했다.
“무슨 일인데? 취한 김에 말해 봐.”
“글쎄.” 손등에 쏠렸던 신경이 다시 머리로 모이는 기분. 펜던트와 셜록, 왓슨, 그리고 왓슨의 동생이 연달아 떠올랐다가 희미해졌다. “친구랑 잠깐 얘기를 했거든. 그런데 십 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지난 몇 년의 세월과 내가 살던 세상이 모조리 무너져 내린 기분이야.”
포니테일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자욱한 담배연기만큼이나 모호한 이야기니 할 말이 없을 만했다. 그런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무릎이 박살났네.”
“뭐?”
“우리 오빠가 싸움꾼이거든. 선방 한 방이면 게임 끝이야.”
그 말에 나는 우리가 어디 앉아 있는지 잠시 생각했다. 옆 소파에서 색정어린 신음이 들려왔다.
“싸움이 붙으면 제일 먼저 무릎을 박살내 버려. 무릎이 반대로 완전히 꺾이도록 세게 내리찍으면 도망은커녕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드니까. 그 덕에 깽값 물어준다고 돈이 꽤 나갔지만.”
나는 그렇구나, 하고 대꾸하면서 이 이야길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심으로 잠시 내 무릎을 걱정했다. 포니테일이 내 손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손이 몹시 차가웠다.
“사는 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삶이 꼭 나와는 별개로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만 같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소름이 돋았다. 똑같은 생각을 한 적 있어서.
“응.” 내가 대답했다. “삶이 나라는 껍데기를 쓰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알아서 살아간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단지 숙주일 뿐이고.”
“삶의 무릎이 나간 거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그렇지 않은 거야.”
“내가 멀쩡해 보여?”
포니테일이 고개를 돌려 나를 뜯어보더니, 시큰둥하게 다른 곳을 쳐다봤다.
“그렇지만도 않아.”
그와 대화하는 동안 얼굴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면서 머리는 차갑게 식어 버리는 기이한 기분에 빠졌다. 평소 N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나보다 뛰어난 아이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나의 평범함을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근데 또 마냥 평범하다 하기에는 나보다 덜떨어진 또래들이 너무 많았다. 상스럽고 천박하고 저열한 녀석들을 보면, 나도 잘난 것 하나 없지만 너희는 너무 못난 것 아니냐고,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한 데 묶이자니 좆같다고 따지고 싶었다.
잘난 아이들에게 비빌 재목은 안 되고, 뇌를 빼고 사는 듯한 놈들이랑 뒹굴 성품도 안 되고, 그 괴리가 어쩐지 고통스러울 정도로 비참했다. 자학적인 생각들로 가득 찬 일상에 다른 박동을 불어넣어준 아이가 펜던트였다. 그를 보면 신경이 머리에서 심장으로 쏠렸다. 그만이 유일하게 내면에 붙박인 나의 시선을 밖으로 돌릴 수 있었다. 짝사랑의 고통쯤이야 삶의 고뇌에 비하면 달콤했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펜던트에게 할애한 것은 삶의 심장이 아니라 다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삶을 지탱하는 다리, 무릎. 하여 그것이 꺾이는 순간 쉽게 일어설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죽지는 않으나, 그래서 오히려 더욱 크나큰 고통을 안기는 무릎 말이다. 사랑에 빠져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십대라는 사실은 당연했다. 그 나이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토록 뜨겁게 사랑에 전부를 걸 수 있었을까? 볼품없는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지분을 무턱대고 사랑에 내맡긴 나 또한 그 대가로 오늘 처참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라고, 그것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느끼던 찰나였다. 포니테일이 내 손등을 덮은 손에 힘을 줬다. 차갑던 그의 손바닥에서 조금씩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모든 신경이 손등으로 쏠렸다.
포니테일을 돌아봤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뚫어지게 내 두 눈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마치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을 살짝 빼내 그의 손을 잡았다. 손등은 여전히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손이 왜 이렇게 차.” 내가 작게 말했다.
포니테일은 대답 없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과 목에서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가 났다.
짝사랑에 순정이 어디 있어?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다면 되레 화낼 말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나도 모를 반발심으로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펜던트에게 화나거나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멍청한 나에게 행패를 부리고 싶었다. 페르마가 말했듯 사랑이나 추억이 무엇인지, 우정은 무엇이며 일탈과 윤리는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에는 나는 아직 편협할지 몰랐다. 상대를 멋대로 우상화시키고서는 사랑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짓이나, 무관심으로 친구의 상처를 후려친 짓이나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지난 몇 년 간의 세월을 깡그리 깨부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눈을 감으며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소파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팔과 함께 빈 잔 부서지는 느낌이 산뜻하게 마음을 간질였다.
입술이 닿았다. 별 느낌 없는데? 그러나 포니테일이 차가운 손으로 내 얼굴과 목을 감싸고, 고개의 방향을 바꾸며 입술을 움직이자 뜨거운 기운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뗐다 붙는 간격과 숨 막히는 온도의 숨결이 한순간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포니테일의 묶어 올린 머리 아래 드러난 목과 귓불 아래를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손끝과 입술과 혀에서, 말하자면 살결과 세포 하나하나가 열리듯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의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흠뻑 빠지고 싶었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잊고 순간에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거듭할수록 키스를 나누는 내내 처음의 그 어찔한 순간은 다시 맞이하지 못했다. 감각이 열어주는 순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조급하게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오히려 또렷해지는 정신이 내 몸짓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니테일이 잠시 입술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표정과 눈이 사랑스럽게 빛났다. 빨라진 맥박과 달뜬 몸이 그 순간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눈을 맞춘 그 순간이 키스할 때보다 더 혼미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입술을 맞췄다. 여전히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우리의 귀는 서로의 입술과 손길이 만들어내는 소리만을 선택적으로 듣게 했다. 어둠과 실루엣과 술기운과 스킨십, 그리고 카니발적 유희. 그것이 이 밤의 전부였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키스를 끝냈다. 포니테일이 내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내년에 또 봐.”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아쉬움과 허무가 찬물처럼 끼얹혔다.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다. 고주망태가 된 학생 둘이 부둥켜안고 다가오길래 자리를 비켜 줬다. 어느새 강당에 남은 인원은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제야 N이 생각났다.
“혹시 N 봤어요?”
나는 어둠속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N을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고, 틀리지 않았다.
“N 형은 아까 기숙사로 갔어요. 근데 형 왜 다시 존대해요? 아까 저한테 말 놓기로 했잖아요.”
“아, 그랬지.” 기억나지 않았다.
“형도 자려고요? 우리랑 더 놀아요. 술 더 가져올게요.”
“괜찮아, 충분히 놀았어.”
“충분히? 진심이에요?” 그가 두 팔을 연극적으로 펼치며 느끼하게 미소 지었다. “만족하셨다면 더 놀아야죠. 만족이라는 걸 모를 때까지.”
나는 웃었다. “알겠어. 술은 내가 가져갈게.”
시답잖고 느끼한 말에 넘어갈 만큼 기분이 좋았다. 나는 성긴 무리를 수월하게 헤치고 원탁으로 갔다. 살짝 어지러웠다. 테이블 모서리를 짚은 채 애써 눈의 초점을 맞췄다. 어슴푸레한 조명이 술잔들을 영롱하게 통과했다. 마티니. 잔을 쥐려는데 안내원이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이며 가슴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물병을 따서 손수건을 약간 적신 뒤 내게 건넸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그를 봤다. 그가 입술을 닦는 시늉을 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 나는 손수건을 건네받아 입술을 닦고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손수건을 접어 다시 가슴주머니에 넣은 안내원은 친절하게 마티니 잔을 건넸다. 술잔을 들고 돌아섰다. 문득 손수건을 세탁해서 돌려줬어야 했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왠지 그를 무시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마티니에 장식된 올리브를 빼내 질겅질겅 씹다가 걸음을 멈추고, 이유 없이 술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천천히 기울였다. 술이 머리카락을 적시며 귀 양옆, 감은 두 눈과 코 사이로 흘러내렸다. 머리를 흔들어 털고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출입문 옆에 선 안내원에게 빈 잔을 건넨 뒤 파티에서 빠져나갔다.
로비에서 휴대폰을 돌려받고 기숙사로 향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습도와 열기 사이로 이따금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교정을 오가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머리는 띵하고 가슴은 헛헛했다. 무거운 걸음을 끌며 기숙사로 향하다 앞뜰에 늘어선 돌탁자에 무심코 다가갔다. 정사각형의 상판에 체스 판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칸들의 경계는 닳을 대로 닳아 희미했다. 상판 아래 달린 서랍을 열었다. 탁자와 같은 재질의 체스 말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검은색 비숍을 하나 꺼내 손끝으로 조금 문질렀다. 단단하고 반질반질했다. 비숍을 만지작대다 주머니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약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극도의 피로감 가운데서도 또렷한 정신이 내 안에 일어난, 아주 분명하고도 생경한 변화를 해석하려 두 눈 부릅뜨고 있었다.
“왔어?”
침대에 앉아 있던 N은 테니스공을 바닥에 던지고 잡길 반복하고 있었다. 평상복 차림이었고 교복은 침대 사다리에 걸쳐져 있었다.
“응. 웬 공?”
“복도에 있길래.”
공이 내 쪽으로 가볍게 날아왔다. 공을 잡아 다시 N에게로 던졌다. 그가 내 몰골을 보더니 비 오냐며 창밖을 돌아봤다. 나는 웃었다.
“오길 잘한 것 같아?”
“뭐, 나름.” 나는 공연히 코 밑을 문지르고 주머니에서 비숍을 꺼냈다. “이걸 챙겼거든.”
N이 멀뚱하게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념품으로 딱이네. 샤워부터 해. 교복은 나한테 주고.”
“교복은 왜?”
“빨아야지. 안내원들이 세탁에 건조까지 해서 오후 일정 맞춰 갖다 줄 거야.”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N과 옥상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바깥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이른 오전의 햇살이 간밤의 흔적들을 죄다 까발리기 시작했다. 돌 밑에 숨어 있던 벌레들처럼 기숙사로 비칠비칠 기어들어가는 아이들. 풍경을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아 올리고 싶었다. N은 날이 샜으니 우리의 놀이는 끝났다고 했다.
“이따가는 뭐하는데?”
“장학생 선발. 근데 그건 어른들 노름판이라.”
“여긴 정말 다른 세상 같네.” 벽돌로 된 난간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풍경이 나선형으로 도는 듯해 눈을 질끈 감았다. 담배는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른 세상이 아니야. 애석하게도 네가 살던 세상의 한쪽은 언제나 이랬어.”
애석하게도. 그 말이 은근히 거슬렸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모르는 세계, 내가 사는 세계의 알지 못하는 면면과 살피지 않은 나의 주변을 생각했다. 담배를 깊이 빨며 N을 쳐다봤다. 포니테일과는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다. 카니발의 뜻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내년에 또 보자는 인사에도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포니테일은 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지만, 그는 우리의 재회가 N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N이 늘 그러듯 무심하게, 내년에도 같이 오자, 하고 말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가 오늘 권유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대와 짐작과 실망을 반복하며 일 년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대하지 않기로 한다. 내년의 재회는 오롯이 나의 의지로 관둔다는 자기최면. 그때라면 삼학년이라 입시 준비로 바쁠 테니 핑계도 좋았다.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초인종 소리에 일어났다. 안내원들이 다림질까지 마친 교복을 방마다 배달하고 있었다. 오전 열한 시였다. 우리는 간단하게 씻고 교복을 입었다. 우리는 전날 마신 술이 무색하게 숙취 없는 컨디션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점심식사 후 중앙강당으로 모였다. 전날 오후처럼 원탁 군락과 철제 접의자 군락이 말끔하게 재정비돼 있었다. 간밤의 흔적은 아이들의 얼굴에나 남아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지키다 행사 직전 어수선한 틈을 타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강당 입구의 음료자판기에서 콜라 두 캔을 뽑았다. 차가운 캔을 이마에 댔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포니테일이 친구 두 명과 함께 강당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상냥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로 화답했지만 좀 어색한 표정이었다. 멍청해 보였을 것이다.
콜라를 마시면서 N과 중앙강당을 빙 둘러 걸었다. 그늘진 길을 골라 걸으며 행사에 가 보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가 봤자 기분만 잡칠걸. 궁금해?”
나는 아니라고 했다. 호기심이 일기는 했지만 간밤의 일들만으로도 어지럽고 피곤했다. 구내식당 옆 카페에 죽치고 앉아 노름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날씨에 에스프레소 마시면 안 더워?”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물었다. 그는 마지막 모금을 마시고 에스프레소 잔을 받침접시에 내려놓았다.
“금방 식어서 괜찮아. 근데 왜 다른 말이 아니라 비숍이야?”
“이거?” 나는 주머니에서 비숍을 꺼내 테이블에 세웠다. “어릴 때 누구한테 들었는데, 장기 둘 때 상(象)을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이기기가 어렵대. 뭐,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괜히 상을 잘 쓰려고 애쓰게 되는 거야. 멋있으니까.”
“체스에서는 비숍이 상이다?” N이 몸을 뒤로 젖히며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손끝을 모아 첨탑 모양을 만들었다.
“그렇지. 게다가 시원하게 뻗어나가잖아.”
“룩이랑 퀸도 시원하게 뻗는데.”
“룩은 직선이라 심심하고, 퀸은 뻔하잖아.”
N이 내 말에 빙그레 미소 짓더니 양손을 깍지 꼈다. “비숍은 평생 체스 판의 절반밖에 밟지 못하지.” 그때 N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일어섰다. “끝났나 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거세게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소리로 가득했다. 어제처럼 차 안에는 셋뿐이었다. 땀 냄새와 희미한 술담배 냄새가 섬유탈취제 냄새와 함께 어릿하게 공기를 누볐다. 나는 술담배 냄새가 진짜 나는 것인지 간밤의 기억 때문에 나는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대표님이 손해를 보셨어.” 운전석 남자의 목소리가 낮았다.
N이 뜸을 들이다 얼마나 손해를 봤냐고 물었다. 남자는 꽤 많이, 라고 대답했다.
“대화가 잘 안 풀렸나 보네요.”
“대화는 충분했어.”
“돈을 덜 푸셨나.”
“그럴 리가. 대표님이 얼마나 공들이셨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나는 잠자코 앞유리 너머로 쭉 뻗은 고속도로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N이 손톱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상관없잖아요. 모두들 형편 어려운데 누굴 도와주든 좋죠.” N이 교복 칼라를 매만지며 약간 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단순한 행사가 아니잖아.”
“그럼 어떡하죠? 식탁에 올라가서 재롱이라도 부려야 하나.” N이 나른하고 느린 말투로 대꾸했다. “뭐, 아버지 노래방 십팔 번이라도 알려주실래요?”
그의 목소리에는 모난 데가 없었으나 은근한 오만함과 위압적인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좀 놀랐다. 평소 예의를 잃지 않는 녀석이라 더 그랬다. 운전석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 차내를 감돌았고, 불편한 정적이 메스꺼워질 때쯤 N이 죄송하다고 이야기했다.
“괜찮아. 대표님 언짢아하시면 어떤지 아니까, 너도 그냥 알고 있으라고 말해 준 거야.”
“감사해요.”
나는 집 앞 큰길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N이 차창을 내려 또 보자고 인사했다. 차가 커브길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나는 천천히 굴다리 위를 지나 상동과 하동 사이의 언덕으로 향했다. 교복에서 풍기는 어릿한 냄새와 자동차의 매연, 하수구의 악취, 논밭의 거름냄새, 개천의 물비린내가 코에 섞여들었다. 나는 곧 이 냄새들이 내면과 기억에서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냄새들은 고향을 조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조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주머니에서 비숍을 꺼내 쥐었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나는 신이 무더위의 온도를 더욱 높여 주길, 그리하여 용광로에 넣은 쇳조각처럼 이 마을을 녹여 버리기를 바랐다.
탁 트인 시야, 조잡한 풍경.
이 년 전의 N처럼 두 발을 땅에 딛고 철봉에 매달렸다. 눈앞에는 내가 끔찍이도 떠나고 싶어 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시골도 도시도 아닌 이 동네는 내가 혐오하는 세계의 본질과 다름없었다. 어정쩡한 세계. 어정쩡하고 어중간하여 이도저도 아닌 세계가 끝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아니, 실은 이미 나는 이 동네와 끔찍하리만치 닮아 있을지 몰랐다. 어중간한 재능과 어중간한 노력, 평범함과 특별함을 동시에 좇는 자기모순이 나를 구성하는 전부일지 몰랐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이 풍경이 나의 앞날마저 삼킨다면, 평생토록 달라지지 않는 내면의 초상이 된다면,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일 것이다. 떠날 수 있을까. 나는 철봉을 쥔 채 신발코로 땅을 연거푸 찍었다. 그리 고민할 일이 아니다. 세상을 사는 법은 아주 쉽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힘들이지 않고 철봉에 매달리는 방법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