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면도날」 ②
기말고사를 앞두고 망원과 카페에서 공부할 때였다. 비광에게서 전화가 왔다. 망원이 무심코 내 휴대폰 액정에 뜬 비광의 이름을 보더니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술 한잔하자. <텅텅비어>.” 이미 한잔한 목소리였다.
“바빠. 넌 시험공부 안 하냐?”
사실 이미 속이 안 좋기도 했다. 시험 전에 마지막으로 한잔하자며 동기들끼리 퍼마신 게 전날이었다. 비광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즈음 그는 학과 내 모든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 밖에 자신이 속한 거의 모든 무리에서도 환대받지 못했다.
“나 자퇴해.” 비광이 말했다.
“뭐?”
“그러니까 한잔하자고. 마지막이야.”
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빠르게 두들겼다. 망원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금방 간다. 네가 사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 망원에게 먼저 가야겠다고 했다. 비광이 곧 자퇴할 것 같다고 언질을 주고 가방을 챙겨 나섰다.
비광은 취해 있었다. “오늘 씨팔 잔고 텅텅 빌 때까지 마시는 거야.”
“빈 건 네 대갈통 같으니까 그만 마셔. 많이 취했다.”
“비꼬긴.” 비광이 내 몫으로 생맥주를 주문했다. “이제 학교에 친구라곤 너뿐이다. 우리 둘뿐이야.”
“미안한데 난 아니야.”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퇴한다고?”
“수속도 다 밟았어. 이미 학교생활 잡쳤는데 뭘.”
“공부하러 왔지 놀러왔어? 학점이나 따다 졸업하면 되지.”
“까고 있네.” 비광이 진심이냐는 눈으로 나를 봤다. “이딴 학교 간판 따서 뭐해? 수능 망쳐서 온 거지.”
빌어먹을 새끼. 생맥주가 나왔다. 가볍게 건배하고 마셨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비광도 한참을 말없이 맥주잔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애들이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 이윽고 녀석이 입을 열었다. “다 맞는 말이고.”
나는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대학 와서는 좀 다르게 살고 싶었어. 딴사람이 되고 싶었지. 나를 알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트림을 삼켰다. 나도 조용히 맥주를 들이켰다. 은연중에 그런 이야기가 돌았다. 비광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막 설치는 게 보인다고. 어설프게 사람들을 주도하려 한다고. 그런 이야기가 들려와도 나는 그냥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게 나쁜 건가.” 내가 중얼거렸다.
“넌 몰라. 내가 왜 달라지고 싶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식어 버린 감자튀김이 입 안에서 부서져 내렸다. 그의 푸념은 녀석이 물어다 나른 소문의 당사자들이 했던 말과 같았고, 나는 그 점을 공교롭게 생각했다. 텁텁한 입 안을 맥주로 씻어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던 거 아니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내가 장난치듯 말하자 비광도 피식 웃었다.
“상황이 개판 났으니까.” 그가 씁쓸히 웃음을 감췄다. “근데 솔직히 다들 존나 웃겨. 씨발 내 얘기에 같이 웃고 떠들 땐 언제고.”
“말도 가려가면서 해야지 새끼야. 막 하긴 했잖아.”
“나만 즐긴 것처럼 지랄들이야. 나 혼자 떠들었으면 그게 뒷담화냐? 나 혼자 날랐으면 그게 소문이냐고?” 그가 팔을 뒤로 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다 유머지, 유머. 하여간 인간들 꽉 막혀서 유머 감각이 없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를 설득하고픈 의지도 없었다. 맥주를 마시며 내가 왜 여기에 녀석과 함께 있는지 생각했다. 우리가 걔랑 멀어졌다고 너도 걔랑 멀어질 필요는 없지. 적시타와 망원은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왜 말이 없어?” 비광이 말했다. “너도 다 내 잘못이라는 거지?”
“다는 아니더라도, 뭐, 딱히 잘한 게 없긴 하지.”
“너도 유머 감각 좆도 없어요.”
“댁은 있는 척 설치다 학교생활 쫑나신 거 아니에요?”
“정곡을 찌르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재미없는 애처럼 보이기 싫었다, 왜?”
“재미 좀 없으면 어때? 조용히 살아도 친구할 애들은 다 친구하고 살아.”
“말했잖아, 다르게 살고 싶었다고. 재미있으면 다들 좋아하잖아. 관심도 좀 받고 주목도 좀 받고 싶었다. 그게 잘못이야?”
“방식이 문제였지. 막말로 아무리 술자리라도 애먼 친구 개인사 추측하고, 확인도 안 된 뜬소문 떠들고 다니면 누가 좋아하냐?”
“다들 좋아했어.”
“분위기 망칠까 봐 웃고 넘어갔겠지. 얘는 고딩 때 어땠다더라, 이 선배랑 저 선배랑 잤다더라, 아니 그런 이야기는 왜 떠들고 다녀? 웬만한 소문은 듣고도 모른 척 말을 아끼는 게 나아. 특히 사람 많은 데선.”
“따지러 왔냐? 사회생활 만렙이 옆에 계신데 내가 몰라 뵀네.” 비광이 빙퉁그러져 말했다. “그래, 너는 뭐 그렇다고 쳐.” 그가 감자튀김을 한 개 집어 창밖을 가리켰다. “근데 씨발 딴 놈들은 이제 와서 깨끗한 척한다고 진땀 빼는 거 보면 존나 웃겨. 딱 보면 각 나오잖아. 재밌게 놀다가 시끄러워지니까 나만 팽당한 거. 솔직히 선배들도,”
그때 술집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비광이 출입문을 건너다봤고, 나도 따라서 그쪽을 보았다. 모르는 손님 한 무리가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비광은 말할 맛이 가셨는지 됐다며 감자튀김을 접시에 던졌다. 나는 그가 던진 조각을 젓가락으로 골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방금 느낀 안도감에서 내가 비광과의 이 자리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심이란 게 한번 받아 보니까 사람 미치게 만들더라고.” 비광이 말했다.
“난 받아 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야.”
나는 그렇게 눙치며 맥주를 마셨다. 비광이 왜 건배도 안 하느냐며 얼른 술잔을 들었다. 건배하고 몇 잔을 더 기울이는 동안 비광은 유머의 희생양을 자처하다 끝내 테이블에 엎어졌다. 그의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술값을 계산했다. 내친김에, 물론 비광이 취해서 불가피하기도 했지만, 녀석의 돈으로 함께 택시까지 타려 했다. 그러나 창밖으로 비광의 상태를 흘끗 본 택시기사들은 주저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런 씨발.” 나는 텅텅비어 건물 외벽에 비광을 기대어 앉히고 옆에 녀석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쪼그려 앉아 녀석의 뺨을 툭 쳤다. 반응이 없었다. “잠깐 기다려. 먼저 가 주면 더 고맙고.”
나는 길 건너 편의점에 들렀다. 택시비라 셈치고 비광의 돈으로 숙취해소제와 아이스크림, 생수 한 병을 샀다.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뻗어 있었다.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어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녀석이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겨우 뜨고 아이스크림을 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그를 살살 달래 일으켜 부축했다. 녀석은 횡설수설하면서도 아이스크림도 잘 먹었고, 끌려오다시피 했으나 걷기도 걸었다.
정문을 지나 어둡고 고요한 교정을 힘겹게 걸었다. 비광이 가로등 아래서 멈춰서더니 비틀거리며 내 어깨에서 팔을 거뒀다.
“정신이 드냐?”
“이건 뭐야?” 비광이 잠투정하듯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흔들었다. “한잔 더 하고 들어가자.”
“한 마디만 더 해. 그거 모가지에 꽂아버릴 테니까.” 나는 비광이 든 아이스크림의 나무막대를 가리켰다. “빨리 들어가자. 힘들다 정말.”
녀석의 가방을 떠맡기듯 주고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앞장섰다.
“그건 뭐야? 뭐 샀어?” 비광이 따라오며 물었다.
“알 게 뭐야.”
우리는 고행의 계단을 올랐다. 통금시간이 가까워 기숙사로 가는 학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비광은 서너 칸 아래서 따라 올라왔다. 날이 제법 선선한데도 땀이 나고 숨이 가빠졌다. 연둣빛 잎들이 돋아난 나무와 흙에서 싱그럽고 건강한 냄새가 났다. “304호!” 누군가가 계단 아래서 연거푸 소리쳤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어 올라갔다.
“304호! 거기 비닐봉지!”
나는 손에 쥔 비닐봉지를 의식하고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보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헐떡이는 경비가 비광을 지나쳐 올라와 내 앞에 섰다. 비광은 짝다리를 짚고서 어리둥절하게 나와 경비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 밑에서부터 한참 불렀는데 왜 안 돌아봐요?”
“아.” 나는 경비의 얼굴을 보고 304호를 기억했다. “죄송해요. 어쩐 일이세요?”
“비닐봉지 안에 뭐예요? 딱 보니 술 마신 거 같은데.”
경비의 개구쟁이 같은 얼굴에 의기양양함이 비쳤다. 나는 실소했다. 친구랑 한잔했다고 말하며 봉지 안을 슬쩍 보여줬다. 내용물을 확인한 경비가 짐짓 헛기침하더니 알겠다며 돌아갔다. 비광이 쫓아 올라왔다.
“304호라니?”
“아, 별거 아니야.” 나는 비닐봉지를 그에게 안겨 줬다. “내일 먹어라.”
비광이 봉지를 들여다봤다. 내가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데 녀석이 붙잡았다.
“왜?”
“304호 뭐냐고.”
“별거 아니라니까.”
비광은 취기가 싹 가신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러다 다시 비틀거리며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것은 또 취한 모습처럼 보였다. 이 새낀 또 왜 이래? 돌연 무거운 다리와 찌뿌둥한 어깨에 통증이 느껴지며 피로감이 솟구쳤고, 저녁의 모든 일들이 성가시고 귀찮게 느껴졌다. 녀석을 등지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비광이 큰 소리로 욕을 하며 성큼성큼 쫓아 왔다.
“씨발새끼, 너도 다를 거 없잖아.” 계단 꼭대기까지 올랐을 때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뭔 소리야? 왜 이래?”
나는 짜증을 내며 그를 제치고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주랑현관에서 비광이 다시 나를 막아섰다.
“너희는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나한테 지랄하는데?”
“너한테 뭔 지랄을 해?”
“거짓말에 뒷담화에, 너희도 씨발 다 똑같으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그러니까 그걸 씨발 왜 나한테 따지냐고, 미친놈아.”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그가 내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놈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댔다. 알맹이는 없고 성질만 부리는 욕설이었다. 나는 목소리라도 좀 낮추라고 하며 주위를 살폈다. 기숙사에 들어가던 학생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갔다. 비광은 고함을 멈추지 않았고, 보다 못한 내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닥치라고 좀.”
순간 물컹한 게 손바닥을 훑었다. 미친놈이 혀로 핥아댄 것이었다. “이런 씨발새끼가!” 나는 그의 얼굴을 힘주어 밀쳤다. 비광이 낄낄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쏘아봤다.
“사기꾼 새끼. 내가 신고할 거야. 다른 호실 쓰면서 구라쳤다고.”
“뭐?”
“씨발, 넌 오류야 새끼야.” 그가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기숙사가 형편 안 좋으면 다 받아 주는 줄 알아? 공부도 존나 잘해야 돼. 빡대가리에 돈도 좆도 없는 새끼 들여 줬으면 정직하게 살 것이지. 맨날 여자애들이랑 붙어먹고.”
“돌았냐?”
“다 좆될 줄 알아. 나만 망할 것 같아?” 비광이 믿음동을 가리켰다. “너나 저 씨발년들이나 내가,”
나는 녀석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그가 컥 하고 몇 발짝 비틀거리더니, 먹은 것을 전부 토해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토사물이 주랑현관 바닥과 내 신발은 물론 바지에까지 튀었다. 고개를 돌려 기숙사 로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고행의 계단 쪽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는 동안 숨이 가쁘고 땀이 났다. 한껏 화가 치솟는 동시에 기묘한 감정이 감돌았다. 방에 들어가자 침대 사다리를 오르던 미스터 생쥐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나지막이 씻으라고 말했다.
샤워타월로 비누거품을 내어 손바닥을 벅벅 문질렀다. 난데없이 미친개한테 물린 기분이었다. 손을 헹구고 쏟아지는 온수를 맞으며 머리카락을 몽땅 쓸어 넘겼다. 흥분이 씻겨 내려가자 두려움과 어슴푸레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거울에 서린 김을 손으로 훔쳤다. 젖은 얼굴이 비쳤다. 일회용 면도기를 집어 물을 묻혔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닫는 사실들이 있다. 십대의 나는 눈에 띄게 튀지는 않았지만, 항상 과녁에서 벗어나 있던 아이도 아니었다. 극심한 신체적 폭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페르마처럼 받아칠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나는 비누거품을 충분히 내어 하관에 바르고 면도기를 뺨에 댔다. 다른 녀석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조용한 아이. 막 대해도 상관없는 아이. 그런 취급은 눈빛과 말투만으로도 충분히 와 닿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대학에 오면서는 깔보이지 말자고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거칠어지지는 않았지만, 유약하면서도 쉽사리 부러지지 않는 강단 있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 그것이야말로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뇌리에 자연스럽게 남을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만하면 됐다. 더 설치지만 않으면, 욕심내지만 않으면 비광처럼 비참히 실패할 일은 없었다. 나는 비광의 심정을 이해했다. 녀석이 망원과 적시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씹고 다녔으리라 충분히 짐작했고, 때문에 불편하고 불쾌하기도 했으나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거울을 닦아낸 자리에는 금세 다시 김이 서렸고 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조심히, 상처가 나지 않도록 면도했다. 이제는 그러고도 말끔히 할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미스터 생쥐는 잠들어 있었다. 검은 비닐봉투에 토사물이 묻은 바지와 신발을 쑤셔 넣고 방을 나섰다. 지하의 세탁실로 가려다 봉투를 꽉 묶고 발길을 돌렸다. 흡연구역인 공동테라스에는 학생 두 명이 멀찍이 거리를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봉투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선득하게 파고들었다. 먼저 담배를 피우던 두 사람이 돌아간 뒤, 나는 난간에 다가서서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대하고 어두운 현관지붕이 비광과 싸웠던 현장을 덮고 있었다. 기왓장 같은 안도감이 마음을 때렸다.
그날 이후로 비광은 더 이상 연락해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를 본 사람도 더는 없었다. 만취했던 녀석이 그날 일을 기억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를 때린 게 못내 마음에 걸렸고, 혹시 깽값이라도 물어야 하면 어쩌나 싶었다. 주랑현관을 지날 때마다 CCTV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비광이 아니라 학교 관계자나 경찰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불안감도 고작 며칠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기말고사를 마친 주말에는 망원과 적시타와 함께 종일 시내에서 놀았다. 영화도 보고 옷가게와 서점을 돌다 볼링도 쳤다. 저녁 늦게 우리는 각종 술병으로 조명을 장식한 펍에 들어갔다. 재즈 음악이 쾌적한 펍 내부를 경쾌하고 우아하게 떠다녔다. 우리는 라운지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망원은 블랙 러시안을, 나는 마티니를 주문했다. 적시타는 점원에게 추천 메뉴가 있느냐고 물었고, 점원은 모히또를 추천했다.
“그거 헤밍웨이가 좋아한 술인데.” 내가 덧붙였다.
적시타는 모히또를 주문하고 점원에게 메뉴판을 돌려줬다. 점원이 돌아간 뒤 그가 말했다. “독서광이라 아는 게 많네.”
“독서광은 무슨. 공부 안 하고 책만 읽다 기숙사에서 쫓겨나게 생겼어.” 내가 대꾸했다.
“에이, 쫓겨나긴.” 망원이 말했다.
“성적 달려서 못 들어가는데 쫓겨나는 거랑 다름없지 뭘.”
“이 학기 기숙사 신청이 다음 달이지? 신청은 할 거야?”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건 사지 말았어야지.” 나는 낮에 산 소설책을 꺼냈다. “문학적 소양은 가산점으로도 안 쳐 줘. 자취한다고 하면 집에서 지랄할 텐데.”
술과 함께 바나나칩이 기본안주로 나왔다. 우리는 건배하고 한 모금씩 마셨다. 적시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헤밍웨이 아저씨, 생각보다 취향이 상큼하시네.”
나는 웃으며 바나나칩이 든 그릇을 그에게로 밀어 주었다. 우리는 학기에 있었던 다사다난한 일들을 추억하며 가볍게 먹고 마셨다. 망원과 적시타가 비광과 담판을 지은 이후로 우리는 비광에 대한 이야기를 대체로 삼갔고, 녀석이 자퇴한 뒤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술김인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누군가 비광 이야기를 했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걔 그날 별일 없었어? 자퇴한다면서 너랑 술 한잔하자고 했었잖아.” 망원이 물었다.
“개새끼, 꼴아서 개소리해댔지 뭘.”
나는 괜히 오른쪽 어깨가 뻐근해 스트레칭하듯 가볍게 돌렸다. 망원이 지금도 연락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안 한다고, 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둘 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음을 눈치 챈 듯했으나 캐묻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그런 애들 싫어.” 적시타가 일갈했다. “어른들 말이 옳다는 걸 몸소 증명하잖아.”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뭐 그런 말?” 망원이 대꾸했다.
테이블 위로 씁쓸한 미소가 오갔다. 망원이 쾌활하게 술잔을 들고 건배를 청했다.
“됐어, 마시기나 해. 우리가 그런 말들의 반증이 되면 되지.”
“그래. 그러면 되지.” 나도 잔을 들며 호응했다.
“장담하지 마.” 적시타가 찝찝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넌 분위기나 깨지 마.” 망원이 장난스레 쏘아붙였다.
“그래, 그래.” 내가 잔을 더 내밀며 말했다. “장담하지 말고 잘들 지내자. 편하게.”
다들 웃으며 건배하고 마셨다. 망원이 독립서점에서 우리와 나눠 가지려고 책갈피를 샀다고 했다. 우리는 오늘 각자 산 책에다가 책갈피를 꽂고 테이블에 둔 뒤 인증샷을 찍었다. 나는 소설, 적시타는 해양생물도감, 망원은 철학자의 아포리즘 모음집을 샀다. 적시타가 망원더러 아포리즘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망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포리즘은 복잡한 세상을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오만한 산물이야.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은 돈 주고 착각을 사는 거지.”
“그런데 왜 읽어?” 내가 물었다.
“애써 착각에 빠지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망원이 한숨을 쉬듯 말하고는 적시타가 산 해양생물도감을 턱짓했다. “넌 그런 책 좋아해?”
적시타는 대답 대신 휴대폰으로 블로그를 보여 줬다. 최근에 올린 글들에는 일기와 책 리뷰, 짤막한 여행기 등도 있었는데 유독 해양생물에 관한 포스트가 많았다.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학술적인 느낌에 가까운 글이었다.
“공부하는 거야?”
“응. 전공 관련 없이 일 년에 한 가지씩 관심사를 두고 공부하거든. 평일에는 잠들기 전에 십 분에서 삼십 분 정도 책을 읽거나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주말에는 한두 시간 정도 더 쏟지.”
“대단하다. 언제부터 했어?” 망원이 물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적시타가 모히또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칵테일을 공부할걸 그랬어.”
각자의 관심사와 취미를 이야기하다 마티니 한 잔씩을 더 주문해 마셨다. 분위기에 휩쓸려 주문한 탓에 머리 한쪽은 대화에 신경 쓰고 다른 한쪽으로는 생활비를 계산했다. 아무래도 오늘 돈을 다 쓰고 기숙사 퇴소까지 방에만 처박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술병 장식이 불빛을 요란히 굴절시키는 벽을 따라 걷는데, 화장실 근처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게 손을 살짝 흔들고 지나갔다. 나도 무심결에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곧바로 몸을 돌려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오랜만이야.” N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