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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Nov 28. 2024

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15화

2부 「불꽃놀이」 ④

   폭설, 꽃샘추위, 황사, 장마, 폭염, 태풍이 차례로 전국을 휩쓰는 동안 우리는 사무실을 방공호 삼아 처박혀 있었다. 어느새 해를 넘겨 옆 동네에서는 눈꽃축제가 열리고 있다는데, 우리에게는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사계의 전부였다. 사업은 오밀조밀하게 근육을 붙여나갔다. 삼 학년 성적을 된통 말아먹은 것 따위는 신경 쓸 축에 끼지도 못했다. 교수들도 질책보다는 격려하는 분위기였다. 학과 행사 뒤풀이나 강의 중에 교수들이 우리 사업을 언급하며 칭찬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런 영향인지 몰라도 안면을 튼 후배들이 알음알음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중 몇몇은 사업에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은근히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시타는 아무도 합류시키지 않았다.

   “같이 하고 싶다는 애들 많잖아.” 나는 참다못해 푸념했다. “인력 충원 좀 하자.”

   “안 돼. 월급 줄 돈도 없는데.”

   “어차피 걔들도 월급 못 받고 일하는 거 알아. 가능성을 보고 합류하려는 거지.”

   “애들 데리고 열정 페이로 일 시키라 이거야?”

   적시타가 날 선 목소리로 따졌다. 나는 회전의자를 뒤로 물리며 펜을 서류 위에 던졌다. 지금의 오밀조밀한 근육은 옷발이나 겨우 세울 정도지 절대 깝칠 수준이 아니었다. 출퇴근도 없이 일 년 넘게 애쓴 결과가 이것뿐이라는 생각에 내심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다. 곧 학교와 시청에 성과 보고서도 제출해야 하는데 선보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적시타는 쓸데없는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듯했다. 우리는 사업가지 영웅이나 성인군자가 아닌데, 이대로 가다가는 적시타가 아니라 병살타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숍을 쥐고 팔꿈치를 책상에 댄 채 머리를 싸맸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비숍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 달.” 적시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달에 스폰서십 체결 피티 있으니까, 그거까지 어떻게든 해보자. 제대로만 풀리면 인력 충원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안 됐다. 피티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떤 계약도 따낼 수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아보려 두어 달을 더 애썼고 소규모 투자를 겨우 따내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갑자기 투자자가 변덕을 부리며 내빼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결국 지랄맞게 화창한 늦봄에 우리는 사업을 접었다. 서류와 집기들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별 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근래에 여러 번 다투긴 했어도 서로 악감정은 없었다. 피차 열과 성을 다했던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적시타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묵묵히 책상을 비웠다. 서류는 당분간 내 자취방에 두기로 했다. 당장 버리기는 뭐했다. 나는 과자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상자에 서류를 담다가 힘이 빠져 의자에 앉았다. 적시타가 건조한 목소리로 이제 뭐할 거냐고 물었다. 담배를 물고 있어 미숙한 복화술처럼 들렸다.

   “졸업해야지, 일단.” 나는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마 그에게는 같은 질문을 돌려줄 수 없었다. 환풍기 소리가 자꾸 성가셨다. “저거 좀 끄자.”

   스위치 옆자리인 적시타가 벽면에 손을 뻗었다. 그때 문밖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또, 또, 또!” 경비였다. “실내 흡연 금지인 거 몰라요? 당장 꺼요!”

   “네?” 당황한 적시타의 입술에서 담배가 달랑거렸다.

   뭘 또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나는 생각했다. 끔찍한 피로감과 경비의 고성에 신경이 곤두섰다. “불 안 붙였어요. 피우려던 것도 아니고.” 내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긴,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니 건물에 맨날 담배 냄새가 진동을 하지!”

   “아니, 피우려 하지도 않았고 피운 적도 없다니까.”

   “야.” 적시타가 눈짓했다. “아녜요, 죄송합니다. 안 피울게요.”

   “야, 너 뭐하는 거야? 그럼 우리가 진짜 피웠던 것 같잖아.” 내가 쏘아붙였다.

   “정신머리가 이 모양들이니, 어휴.” 경비가 책상에 쌓인 상자들을 보며 혀를 찼다.

   “뭐라고요?”

   “얼른 정리하고들 나가요.” 그가 돌아섰다. “인생 아까운 줄 모르고 죄다 시간낭비들이지……”

   “잠깐만요, 아저씨.”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리한테 하는 말입니까?”

   경비가 다시 돌아서더니 이리저리 턱짓을 하며 쏘아붙였다.

   “여기 사업한다는 학생들 전부한테 하는 말이야.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멋 좀 부리고 편하게 살고 싶은 모양인데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누가 편하게 먹고살려 해요? 여기 애들 다 먹고 자는 시간 쪼개가면서 일하는 거 모르세요?”

   “얼씨구, 허구한 날 술판 벌이고 담배나 뻑뻑 피워대면서, 그게 돼지소굴이지 사무실이야? 사업이 소꿉놀이야? 개나 소나 다 하게?”

   “뭐, 돼지소굴? 개나 소나?”

   내가 그에게 다가서려 하자 적시타가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입을 안 다문 것은 경비였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까딱하면 사람 치겠네?” 경비가 턱을 빳빳이 들고 삿대질했다. “청춘에 기분 낸다고 허송세월 보내지 말어. 남의 돈 받으면서 귀 닫고 입 다물고 일하는 게 본인들한테도 좋은 거야. 능력도 안 되면서 자존심들 세울 생각 말고. 그 나이에 새빠지게 뒷바라지한 부모님 등골 빼먹을 요량하면 안 되지.”

   나는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기가 찼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다시 경비를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근데 아저씬 남의 돈 받으면서 입은 안 쳐 다무시네요?” 

   “뭐요?”

   “얼씨구, 귀도 안 닫으시고?”

   “이이, 어디 말을 함부로,”

   “거 댁에 자식새끼 분도 생판 모르는 인간한테 욕지거리 먹고 사는지 모르겠네.”

   “그만해. 내가 잘못했잖아.” 적시타가 담배와 담뱃갑을 한손에 움켜쥐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됐죠? 그만 가 주세요.”

   “대체 네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적시타에게 따졌다.

   “저 봐, 응? 끝까지 발뺌하는 거. 싹수가 아주,” 경비가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씨발, 싹수는 뭔 싹수야.”

   “씨발? 내가 니들 애비뻘이야!”

   “나이 많아 좋으시겠어. 내세울 게 나이뿐인 건 피차일반이네. 덕분에 청춘이고 나발이고 개좆인 거 알았으니까 그만 정신 챙기고 나가 주시죠.”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경비를 거칠게 몰아내고 문을 닫았다. 길쭉한 유리창 너머로 경비가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 나는 주먹으로 문을 세게 치며 눈을 부라렸다. 이윽고 그가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해고나 당해라, 씨발새끼.”

   “너 왜 그래?” 적시타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왜 그러는데? 화도 안 나냐?”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되잖아.”

   “뭘 조용히 넘어가?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웠어 술판을 벌였어? 개 좆 빠지게 일만 하다 나가리 난 것도 열 받는데 왜 덤탱이까지 쓰면서 욕먹어야 하는데?”

   “아니,” 적시타도 짜증이 난 듯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오늘 나갈 거잖아. 그냥…… 지쳐서 그래. 미안.”

   “제발 그놈의 사과 좀 그만해.”

   나는 자리로 돌아가 회전의자를 벽에 박을 만큼 세게 꺼내 앉았다. 적시타나 경비나 싸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게 더 열 받았다. 빌어먹을 상황과 어이없는 오해와 쓸데없는 무례가 진창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있던 비숍을 노려보았다. 삶을 끌어올리기는 개뿔, 비숍을 집어다 출입문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어차피 밑바닥 인생들끼리…….     


   “빡칠 만하지.” N이 소주잔을 채우며 말했다.

   “싸움도 누구 하나 득 볼 사람 있을 때 하는 거지. 애먼 놈들끼리 왜 싸워? 왜 그렇게 무례해?” 나는 자조적으로 대꾸하고 건배했다.

   “사무실 정리는 다 한 거야?”

   “응. 나오는 길에 좆같아서 화재경보기 존나 세게 치고 왔어.”

   N이 큰 소리로 웃었다. “요즘 세상엔 경보가 필요하긴 해.”

   “근데 아무도 안 뛰쳐나와. 망한 선배의 피눈물 어린 조언 따위 들어 처먹지를 않아요.” 나는 닭발을 집어 먹고 소주를 따랐다. “영국은 어땠어? 유럽여행은 할 만 했고?”

   “죽여주더라. 테이트 갤러리에 갔다가 버킷리스트 하나 추가됐잖아.”

   “뭔데?”

   N이 건배를 하고 술잔을 비웠다. “73번. 돈을 존나 벌어. 그리고 반 고흐 유화작품을 한 점 사서 핥아먹는 거야.”

   “뭘 한다고?”

   “핥아먹는다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걸 왜?”

   “네가 직접 못 봐서 그래. 조명 불빛에 붓 터치의 결들이 하나하나 살아나는데, 물감이 정말 탐스러워. 직접 봐야 알아. 그걸 딱 보면, 와, 진짜 맛있어 보여. 눈으로만 즐기는 게 죄스럽더라니까. 온 감각을 동원해서 그림을 흠뻑 느끼고 싶어.”

   “물감 굳었잖아.”

   “녹여 먹으면 돼.”

   “유독성 아닌가?”

   “먹고 죽지 뭐.” N이 소주잔을 채우며 말했다. “고흐의 그림에 목숨을 바친 인물로 역사에 남는 거야.”

   “진짜, 죽여주는 버킷리스트네.”

   나는 떨떠름하게 감탄했다. 73번까지 있는 버킷리스트가 죄다 저 모양일까 생각했다. N이 닭발을 입에 넣고 뭔가 생각난 듯 옆자리에 둔 가방을 뒤졌다. 그는 포장된 검은색 상자를 꺼내 건넸다. 안에는 시가 다섯 개비와 시가 커터가 정갈하게 들어 있었다.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귀국할 때 선물로 사 왔어.” 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사도 된다니까.” 시가 한 개비를 꺼내 코밑을 훑었다.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고맙다. 나중에 같이 피우자.”

   N은 오늘 술값은 자신이 대겠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소란스러운 닭발 집을 나와서 조용한 펍으로 갔다. 라운지의 한 테이블을 잡고 나는 마티니를, N은 이름 모를 위스키를 샷으로 시켰다. 술을 마시면서 일 년 넘게 지속해온 사업 이야기를 털어놨다. N은 간간이 술을 추가로 주문하면서 진지하게 들었다. 취기가 오르는 와중에도 내가 얼마나 창업에 진심을 다했는지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쉽지는 않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N은 투자자들의 뇌가 잘못된 거 아니냐며 왜 그런 아이템을 버렸는지 의아해했다. 나는 약간 알딸딸한 상태로 손을 내저었다.

   “됐어, 싱거운 위로는 사양합니다.”

   나는 일곱 잔째인가 여덟 잔째인가 하는 마티니 잔을 들었다. 손이 살짝 떨려서 잔 밖으로 술이 흘렀다. N이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들기다 잔을 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내가 투자자를 모아 볼까?” 그가 물었다.

   “뭐?”

   “모을 수 있어. 여기저기 연줄도 있고.”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뻑뻑했다. 그가 술잔을 살짝 들어 올려 보이고는 단숨에 마셨다.

   “투자자고 나발이고 사무실까지 뺐는데 무슨 수로 계속해.”

   “그런 건 됐고, 어때? 싫어?”

   나는 선웃음을 치며 등받이에 몸을 풀썩 기댔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지금의 내 현실만큼이나. 학점은 개판이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매일같이 취업난과 경제위기라는 뉴스만 들려왔다. 경비의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떤 회사든 마다않고 들어가기로 작정한다면 빠듯하게나마 먹고살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의 밑에서 목만 겨우 축이는 미래 역시 불안전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바에야 좀 더 불안하더라도 열의를 태워 볼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연이은 야근에 불평을 해대면서도 적시타와 계속 사업을 추진해왔던 것은 나도 그 일을 함께 꾸려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의 대가보다는 가능성을 보았고, 후에 엄청난 보상을 안겨 주리라 확신했다. 그것이 낙관의 푸른 잎인지 희망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일이 어긋나기는 했지만 사업 자체의 가능성은 아직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모아 줄 수 있다면야, 나는 좋지.”

   “좋아. 대신 같이 하던 애 말고 나랑 하자.”

   “뭐?”

   N이 술을 들이켜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업 나랑 하자고. 어차피 친구는 사업에서 손 뗐다며. 서류도 다 너한테 있고. 우리 학교에도 창업 지원 프로그램 있으니까 사무실 차리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나는 N을 빤히 보다가 픽 웃었다.

   “이 새끼 취했네. 너는 네 아버지 회사 들어가야지.”

   “거길 왜 들어가?” N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웃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띠었다. “아버지 회사는 뭐랄까,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비상구야. 평생 아버지 밑 닦으면서 일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네가 나 좀 도와주라.”

   나는 조금 놀란 채 진심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N이 나한테 뭘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었나? 어느 때보다도 깊어진 N의 눈동자에서 진정성이 느껴졌고, 동시에 나는 취기가 올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둘이서 공동대표 타이틀 딱 달고 시작하는 거지, 어때?”

   “창업이 엘리베이터는 아닐 텐데……. 오히려 비상계단에 가깝지.” 내가 말했다. “아무튼, 같이 시작한 애를 두고 가기는 좀…….”

   적시타를 버리는데다가 사업을 도둑질하는 기분까지 들어 찝찝했다.

   “어차피 아이템을 제시한 건 다른 친구였다며.”

   “그걸 구체화시킨 건 적시타야.”

   “실현시키지는 못했지. 그걸 우리가 하자니까?”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적시타한테 얘기하고 다 함께하는 게 어때?”

   “글쎄, 내가 낯을 너무 가려서.” N이 나를 빤히 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고민되면 좀 더 생각해 봐. 신중해야지. 누구랑 사업을 할지를 정하는 게 아니라, 사업을 계속 이어나갈지 말지를 정하는 거니까.”

   N은 천천히 생각해 보라며 화장실로 갔다. 나는 테이블에 올려놨던 담뱃갑을 쥐고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담뱃갑을 톡톡 두들겼다.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N의 말이 옳았다. 녀석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적시타와의 사업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머리는 자기 역할을 다 했다는 듯,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뻗어나가지 않았다. 마음만이 도의적인 영역과 막막한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 오갔다. 화장실에서 나온 N은 내게 오지 않고 계산대 앞 바에 혼자 앉아 있던 여자에게로 가 말을 걸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여자는 곧 호의적인 미소를 보였다. 거의 삼 년 만에 만난 N은 인물이 훤했다. 이메일은 물론, 종종 통화를 하거나 화상채팅을 할 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N은 더 믿음직스러워지고 더 멋있어지고 더욱 자유로워 보였으며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었다. 취기가 다시 오르며 시야가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기둥에 몸을 기댔다. 적시타 혼자 일한 것도 아니잖아. 여자와 대화를 나누던 N이 고개를 돌려 두 자리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있던 남자를 불렀다. 세 사람은 간단하게 술을 한잔씩 하더니 곧 좋은 분위기를 이어갔다. 나도 일 년 넘게 뺑이 쳤다고. 씨팔, 어차피 망한 사업이고. 반쯤 감긴 채 천천히 돌아가는 시야 속의 N을 보며 나는 무엇을 느꼈던 걸까. 동경심. 모종의 안도감. 그의 옆에 있으면 그와 닮은 인간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그런 바람.

   나는 N에게 다가가 어깨를 담뱃갑으로 툭툭 쳤다. N이 웃음기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돌아봤다.

   “하자.” 내가 말했다.

   N이 씩 웃더니 벌떡 일어나 나를 자신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여기, 같은 걸로 한 잔 더요.”

   “뭘 해요?” 여자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비밀이에요.” N이 말했다. “여긴 내 친구예요. 야심과 야성 빼면 별로 가진 게 없는 앤데,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애죠.”

   야심? 내게 그런 게 있던가? 조금 편하게 사는 것, 원하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이 야심인 시대인가. 어떤 시대에나 그랬나.

   “근데 야성은 뭐야?” 내가 N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게요, 그게 뭐예요?” 하고 같이 있던 남자도 물었다.

   “살면서 비상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거죠.”

   N의 말에 나는 웃었다. 다른 두 사람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날 N은 비싼 돈을 들여 내게 술을 많이 먹였다. 나는 취하고 싶었다. 불안함과 미안함, 마음의 짐, 여러 사람들, 당장 내일이면 닥칠 상황들과 얼굴들을 잊으려 미친 듯 마셔댔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다음날 아침, N과의 창업을 결정한 이후의 기억은 가위로 자른 듯 잘려나갔지만, 정작 잊고자 했던 모든 것들은 숙취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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