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 가라앉기》 7

윤아무개 단상

by 윤아무개

봄날의 저녁 같은 미소가 당신을 안기를.

망각이 봄날처럼 찾아오기를.


그럼 내가 당신의 머리에 슬쩍 꽃을 꽂을 수도 있겠지.


거리에 나선 것은 오후 네 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야말로 완연한 봄날이었다. 따뜻한 햇살. 선선한 바람. 확연히 얇아진 사람들의 옷차림. 눈부시게 찬란한 거리를 걸으며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봄을 싫어하는지. 얼마나 끔찍이도 봄을 싫어하는지. 여름과 겨울 그리고 가을만큼이나. 계절감은 나의 정서와 기질의 가장 병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덥기로 유명한 이 도시에서는 벌써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왕왕 들려오고. 믿기 힘들지만 그로부터 이삼 일 전에는 눈이 왔고 그 주간 최고 기온은 이십칠 도였다. 쨍한 봄날, 초여름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봄날의 공기엔 사실 미세먼지 나쁨이라는 소식이 숨어 있고 휴대폰에는 끊임없이 대규모 산불에 대한 안전 안내 문자가 날아온다.


그는 공연히 카페 메뉴판에 시선을 부렸다가 밀크티를 주문한다. 매일 아메리카노만 주문하던 그는 자신이 발음하는 밀크티라는 어감이 어색하다. 점원이 어떤 밀크티를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종류를 모르던 그는 당황한다. 점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얼그레이, 루이보스, 코코넛 이렇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고 설명한다. 얼그레이는 들어봤지만 정확히 모르고 루이보스는 생전 처음 들어봤고 코코넛은 알고 있지만 고르고 싶지 않다. 그는 얼그레이 밀크티를 주문한다. “버블은 넣어드릴까요?” 점원이 물었고 그는 괜찮다고 대답한다. “따뜻하게 드릴까요, 아이스로 드릴까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 따뜻한 밀크티를 주문한다. 진동벨을 받고 창가에 자리를 잡은 그는 점원의 친절에 기분이 좋아진다. 살짝 감동을 받은 것도 같아 웃음이 난다. 카페 앞에서 문득 밀크티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탓에 긴장을 했는지 메뉴판을 부유하던 시선은 밀크티를 찾지 못했지만 일단 무작정 주문한 그였다. 밀크티를 팔아서 다행이라고 그는 안도한다. 마침내 나온 음료를 한 모금 맛본 그는 놀라운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전에 마셨던 그 맛이다. 얼그레이를 주문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수년전 그에게 밀크티를 권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그는 목이 말랐고 정수기는 멀었고 시간은 넉넉지 못했다. 일행 중 한 명인 A가 자신이 마시던 밀크티를 권했다. 마트에서 파는 페트병에 담긴 음료였다. A는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며 호불호가 많이 갈리더라고 덧붙였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한 모금 마셔봤다. 밍밍하고 별 맛이 없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맛이 어떠냐는 A의 질문에 그는 맛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더 드세요.”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 모금 더 마셨다. A는 밀크티가 그의 입맛에 맞아 기뻐하는 눈치였다. 자신의 친구 중에는 위스키를 밀크티에 타 먹는 녀석도 있다고 들뜬 말씨로 떠들었다. 그는 그렇게까지 맛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A만큼은 이해하고 싶었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 보는 시도를 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초콜릿을 먹어 보기도 했고 뜨겁고 매운 짬뽕을 먹느라 혀부터 식도와 위장까지 갉아내는 통증을 견디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한 시도들을 떠올리며 그는 웃음 짓는다. 그는 좀 더 명확하게 기억을 떠올린다. A는 그에게 처음에는 홍차가 있다고 했었고 “아, 근데 밀크티예요.” 하고 덧붙였었다. 그는 “홍차인데 밀크티라고요?” 하며 의아해했는데 밀크티가 홍차에 우유를 탄 음료라는 것을 몰랐던 때였으니 그랬다. 그는 얼그레이가 홍차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밀크티처럼 밍밍한 미소를 짓는다. A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다시 연락하기가 애매해진 이후에도 그는 이따금 마트에서 밀크티를 사 먹곤 했다. 밍밍한 음료를 먹을 만하다고 여기게 될 때까지 그는 한때 자신이 이해하려던 A를 떠올렸다. 기억은 카카오 함유량이 높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보다 쌉싸름한 풍미로 한 시절의 향취를 전한다. 포근하게 혀를 감싸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밀크티는 그렇게 가벼운 울적함을 남기며 그를 현재에 덩그러니 홀로 남긴다. 미련이 많아 미련한 그의 하루가 지는 햇살처럼 한때 따뜻했던 음료처럼 식어간다.


나는 말이 너무 많다. 쓸데없이. 당신과 나 사이의 어색함이라는 식탁을 가득 채울 만큼 과하고 푸짐하게 말들을 차린다. 그것은 당신이 먹기도 전에 질려 버리게 만들고, 심지어는 당신이 예의를 차려 한술 떠먹음에도 곧바로 난처한 표정을 짓게 만들 정도로 맛대가리가 없다.


내 원고 폴더 한쪽에는 「삭제된 문장들」이라는 파일이 있다. 거기에는 내가 아끼는 문장이지만 원고의 맥락에 맞지 않아 덜어낸 문장들이 쌓여 있다. 최근에 삭제된 문장들은 이런 것들이다.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가 어색한 침묵 속을 미친놈처럼 뛰어다녔다.” “진실은 독한 술이다. 때로는 거짓에 희석해야만 겨우 삼킬 수 있다.” 쌓아놓으면 언젠가 또 써먹을 날이 있을지 모르지.


문장의 외피를 단단히 두르고 힘차게 삶을 밀어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