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 가라앉기》 6

윤아무개 단상

by 윤아무개

이상과 비현실의 구분. 이상의 사전적 개념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살아있으니 가능한 행위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 살아있으니 이상을 좇는다. 모든 이상은 현실에 발붙이고 있다.


침묵이 금이다. 우리 사이를 가르는.


내가 당신을 보고 싶어 했기에 당신을 보았다고 착각했을까.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이 나도 모르는 새 자라나 당신이라는 착각을 만들어냈을까. 그날 내가 본 사람을 당신′라 하자. 당신′는 내가 기억하는 당신과 다르다. 그 사이에는 십여 년의 간극이 있다. 내가 보지 못한 그 세월은 당신′의 얼굴에 균형 있게 자리 잡았다. 당신′는 내가 기억하는 당신보다 안정되어 보였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게 퍽 안심이 되고 또 아쉽기도 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이기적이었다. 그날 나는 당신′에게 왜 말을 걸지 못했나. 내가 틀렸을까 봐? 그러니까 당신′가 당신이 아닐까 봐? 아니면 단순히 내게 일행이 있었기 때문에? 혹은 당신이 맞는다면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아직 그 가수를 좋아하는지. 요즘도 콘서트에 가는지. 그 조용하던 장난기는 여전한지. 그때의 눈부시게 빛나던 눈을 뜨고 바라보던 일들이 지금도 있는지. 그해 왜 내 롤링페이퍼에 글을 쓰지 않았는지. 따로 편지로 전하려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꿈에 가끔 나를 보는지. 장난스러운 꿈에 내가 나타나는지. 혹여나 악몽은 아닌지. 나는 당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예뻤다고. 좋았다고. 고마웠다고. 신기했다고. 즐거웠다고. 미안하다고. 지금까지도 이기적인 내가 당신에게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내 착각을 뒤집어썼을지 모를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고. 긴가민가한 사이에 시간은 또 나를 몰고 간다. 추운 연말에서 새해로. 십 년 후. 이십 년 후로. 풍화와 마모와 훼손과 적막의 심연으로.


그의 목소리는 인상적이었다. 또렷하지 않고 공기 중에 힘없이 번지는 느낌. 물에 풀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그의 말에는 신경을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그의 분위기인지 그를 향한 나의 호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명이 귓구멍을 찌른다. 뇌에 단도를 갖다 박는 느낌. 카페인 탓인가.


글씨를 정서하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정성. 정성을 들이는 태도가 삶과 나 사이의 불화를 잠재운다.


커피는 따뜻하다. 밤은 차갑다. 겨울이 물러간다. 나는 잘 놀았다. 잘 놀다 갑니다. 그것이 나의 유언. 하고픈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하지 않아 죽어버렸답니다. 그것이 나의 사인. 커피를 후루룩 마시는 습관. 눈이 크고 아름다운 사람은 도무지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해는 불가피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사랑하더군요. 마음은 테이블을 넘나드는 목소리 같아. 여기에 있는 동안 당신의 목소리는 공공재. 누구나 당신의 목소리로 하루를 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나의 철학은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에게서 떨어져나간 비늘. 나는 이 밤의 이물이었다. 적어도 당신의 밤에 이물이기는 했다. 글씨가 부드럽게 적히는 이 느낌을 사랑하지. 사랑한다는 말은 내게 이젠 좀 진부해. 할 말 없으면 사랑한대. 나는 끝까지 내 사랑을 유세했다. 철없이 유세하고 미움을 사곤 했다.


잊어버린 이름이 나를 찾아오는 밤이다

좀비처럼 고개를 꺾고


숲마다 퍼지는 향긋한 과일 냄새

선악과가 폭죽처럼 터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너를 지키면 네가 나를 버리기로

한다 모두가 그런 약속을

체인처럼 엮고 있다


도망치는 발길에 선악과가 으깨지고

썩고


취객처럼

그 숲을 지나는 모든 이가 고개를 꺾고 있더라고 한다


아침부터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걸레 빤 물처럼 흐리멍덩한 햇살이 도시를 메웠다. 글을 써야 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이자크 디네센이 한 말을 메모하여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고 한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쓰라” 매일 작업 전에 잠깐 하는 명상은 어설프지만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아침에 『존 치버의 일기』를 읽는 시간은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시간이 나는 대로 밀크티에 대한 삽화를 쓰자. 《심연으로 가라앉기》에 올릴 만한 삽화가 될지 모른다. 잘 나온다면. 사랑에 미쳐 있던 시절은 다 갔다. 아쉽지도 않다. 자극은 피곤하다.


기회는 역시 나다니는 사람의 것. 행동하는 사람의 것. 나의 활동에도 언젠가는 기회가 따라붙겠지. 길은 많다. 내가 당장 걸을 수 없다는 게 흠이지만. 밤은 피로하고 욕정은 지루하다. 커피를 담은 머그컵은 빨간색 유광에 매끈한 표면을 지니고 있다.

얼굴에 상처가 났다. 반창고를 붙이고. 삶이 뜻 없이 이어지는 듯하고. 이걸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싶고.

커피가 천천히 식는 동안 나는 헤밍웨이의 단편 「깨끗하고 밝은 곳」을 떠올린다. 이곳이 내게 그런 곳이지 않을까 싶고. 일찍 문 닫긴 하지만. 좀 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분노가 사라졌음을 느낀다. 난로에 얹어둔 주전자의 물이 끓고. 분노로 내 속이 끓을 때 증발해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증발한 뒤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허기를 느낀다. 지하철에서 책 읽다 졸던 시간. 이렇게 별거 아닌 문장들로 노트 한 면을 채우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누군가는 내가 의미 강박을 앓고 있다고 할지 모르나, 나는 인간이란 의미 강박보다 무의미한 삶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정정. 나란 인간은 의미 강박보다 무의미한 삶을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생각한다.


냉소로 삶의 문제를 일축시키지 않으리.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