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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소낙비 Mar 13. 2022

밥맛이네요

밥, 두번째 이야기

하얀 쌀밥과 소고기국 한 그릇이 로망이었던 시절을 지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나이지만 지금은 밥과 식사가 주는 의미와 가치가 희석되어 버린 듯하다.


일단 집에서 밥을 먹는 시간이 줄어든 요즘이고 서로 바빠서 혹은 같이 있어도 같이 할 만한 무엇인가가 점점 없어지는 듯한 요즘은 사회가 발전하고 개별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관계와 교감에서는 주지는 않으면서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이기적임이 생긴다.

음식을 먹고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고 서로의 감정을 섞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양문화와 달리 예전의 식탁문화는 일방적이고 권위적으로 농경사회의 가부장적인 잔재를 여전히 일부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의 아빠, 엄마들은 한없이 부드러워 밥그릇을 들고 따라 다닌다. 그러다가 밥그릇은 식탁에서 사라지고 애들만 따라다니다 애들도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요즘이지만 우리집은 농경사회를 경험한 귀농가족이었던지라 권위는 없었지만? 같이하는 식탁문화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니 예전의 것들이라도 항상 폄훼하고 폐기시킬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쌀이나 보리와 같은 곡식에 물을 적당히 넣어 끓인 다음 뜸을 들여 익힌 음식을 밥이라 부른다면 밥말고도 다른 식자재와 같이 먹어야 식사가 되는 동양권에서의 주식이라 부르는 밥은 탄수화물의 결정체이고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밥이라도 실컷 먹어보는게 소원이었던 우리 조상님들은 쌀이 모지라기 일쑤인지라 보리나 기타 잡곡을 섞거나 혹은 쌀이 빠진 잡곡과 구황작물 또는 잡곡도 빠지면 구황작물로, 그마저도 없고 귀하면 산천초목이 삶의 에너지였던 궁핍하고 가혹한 환경에서도 삶을 살아오기 위해 억척일 수 밖에 없었던 환경유전자는 여전히 세대속에 녹여져 있다.


밥이 주식인지라 쌀(곡식)의 생산량과 삶의 질은 불가분의 관계였고 예전 농업에서의 발전의 척도는 쌀 생산량이라면 이젠 쌀이 남아도는 시절이기도 하고 밥맛을 따지는 요즘의 쌀은 품종과 품질이 이미 소비자의 눈높이 위에 있지만 그마저도 식탁에서는 천덕꾸러지인지라 어쩌다 맛있는 찌게나 찜 혹은 라면이라도 끓여야 비벼지고 말아지는 밥과 맛은 그 자체로 이미 별개다. 물론 가끔 이천의 쌀밥집이나 고슬하고 윤기나게 보여지는 백반기행같은 프로그램에서의 인트로같은 밥 자체의 맛을 느끼기엔 집에 있는 전기밥솥은 너무 늙었다. '니들이 밥맛을 알어?'(feat by 쿠쿠밥솥)


‘밥 없으면 라면이라도 먹으면 되지 왜 굶어요?’ 궁핍을 알 수 없는 세대의 순진하고 어린 눈에는 굶거나 혹은 가혹하거나의 경험은 여전히 외계의 문화이지만 현재 진행형이기도 한 ‘빈익빈 부익부’의 환경속에서 여전히 밥은 중요한 에너지원이기도 하고 교감의 수단이기도 한 것이란 생각에 글을 써본다.


삼시세끼를 다 먹으면 이젠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물리적 나이와 운동량 혹은 기초대사량이 떨어지는 것에 비하면 식욕이나 음식의 종류, 먹방이나 음식을 보여주는 영상의 폭발로 몸과 정신이 모두 힘들다. 밥을 먹기 위해 밥 그릇에 반 이상 담으면 나머지 먹고 싶은 반찬의 가짓수와 양을 줄여야 하지만 그건 마음일뿐 보이면 먹는다. 먹으면 다 살로 가지만 말로는 ‘물만 먹어도 찌는 체질’로 포장하게 된다. 먹기 위해 운동하고 먹기 위해 먹방을 보며 먹기 위해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삶의 원동력이 식욕에서 부터 시작하는 원리라고 가족들에게 외치지만 식욕도 억제가 안되는 무절제속에서 가장의 모범을 보여주기는 힘들다. 그래서 같이 먹고 같이 찌는 쪽으로 유도한다. 나만 찔 순 없지…


밥맛인가 나?

(급한 마무리라는 마눌의 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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