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기타 May 21. 2024

이 빠진 식칼 사건                    

  초임 관리소장 때의 일이다. 처음 부임한 곳이 서울 성북구 300세대 임대 아파트였다. 부임 얼마 후 대표자 모두가 여성으로 새로운 임차인대표회의가 구성되었다. 신임 회장은 직선적, 외향적 성향의 여걸형으로 관리소 업무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대표자들의 첫 번째 사업은 폐쇄 중인 경로당 재개관 사업이었다. 관련 서류와 함께 두세 차례 방문을 통해 한 달여 만에 구청 승인을 얻었다. 

  재개관 행사 계획을 수립한 후 개관일을 정하고 구청의 국장, 팀장 및 동장(주민센타장)과 지역 내 유력인사 및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형 업체에 초청장을 보냈다. 지역 국회의원, 시청, 구청의 관련부서 팀장 등 상급기관 관계자의 참석이 예정되어 하부 기관인 주민센터(동사무소)의 센타장(동장)의 관심도 높았고 행사용 마이크, 앰프 등 장비 지원에도 매우 협조적이었다. 

  식순에 내외빈 소개 순서가 있었다. 행사준비 확인 겸 개관일 이틀 전 방문한 동장은 외빈 소개 시 공직 서열에 따라야 한다며 이를 잘 지켜달라며 신신당부하고 갔다. 그게 뭣이 그리 중한 것인지 행사 전날에도 혼자 방문하여 소개 순서를 확인하고 개관일에도 먼저 도착하여 구청, 시청 관계자와 함께 의원을 맞이한 후 행사장 한쪽에서 외빈소개가 잘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경로당 재개관사업 추진 경과보고를 시작으로 외빈과 내빈을 탈없이 소개하고, 축사, 답사에 이어 행사 마지막인 케이크 절단 순서에 이르렀다. 행사를 준비하며 케이크 얘기가 나왔을 때 생크림 케이크를 생각했으나, 참석자 대부분이 노인층이니 떡 케이크로 하자는 의견에 따라 동네 떡집에 주문했었다. 

  케이크를 탁자 위로 옮기고 살짝 덮은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기는 순간 불길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까 케이크 상자를 건네받을 때 플라스틱 칼이 안 보이던데 혹시...’ 그래도 설마 하며 상자 속과 상자 아래쪽도 확인하였으나 칼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정신 나간 떡집 보소.'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케이크를 주문할 때 칼을 부탁하지 않은 게 잘못이지 떡집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살다 보면 순간적인 기지나 임기응변이 필요한 때도 있다. 사무실에 있는 과도가 생각났다. 나지막이 대표회장께 과도 좀 챙겨주시라 했다. 회장은 옆에 있는 대표자 한 사람에게 본인 집에 가서 과도를 가져오라 했다. 득달같이 회장댁에 다녀온 대표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헉’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길이가 내 팔길이 절반쯤 되고 우리 집 싱크대 안쪽의 제일 큰 칼집에도 들어갈 수 없는 대형 식칼이었다. 그것도 이가 두세 군데 빠져있었다. 손님 접대용 음식 장만에 쓰라고 회장이 제공한 갈비짝을 장만하다 그리된 것으로 짐작되었다. '소장님, 과도를 못 찾아 급한 대로 이거라도 쓰시라고..." 하는 대표자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었다. 칼이며 도마며 회장댁 주방 기구는 어제 음식 준비하느라 경로당 주방에 다 와있었기에 찾지 못한 것이었다.


  어떡하나. 국회의원, 노인회장, 대표회장은 칼 가져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손잡이 부분만이라도 흰 종이로 싸서 건넬까 하다 그냥 칼자루를 의원에게 건네며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원님, 떡집에서 플라스틱 칼을 빼먹어 이걸로 대신 쓰셔야겠습니다." 순간 당황한 듯하였으나 이내 재선의원 다운 노련한 표정으로 칼을 건네받았다. 털털한 성격의 대표회장이 한마디 보탰다. "식칼이면 어때요. 의원님, 그냥 이걸로 해요." 하며 칼을 쥐고 있는 의원의 손을 떡케이크 쪽으로 끌어당겼다. 의원도 이 빠진 커다란 식칼을 든 자신의 모습이 어색해서인지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고, 의원의 그런 모습에 처음부터 이 과정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모든 참석자가 박장대소했다. 이 빠진 식칼 덕분에 경로당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이가 빠진 탓인지, 쫀득해서인지 칼이 바닥까지 닿기도 쉽지 않았다. 세 사람이 합세하여 간신히 식칼이 바닥에 닿을 무렵, 박수를 유도하고 칼을 뺏듯이 거둬들이고 나서야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이런 해프닝이 또 있을까. 이 빠진 식칼 때문에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어 동장의 얼굴 표정을 못 본 게 아쉬웠다. 그놈의 소개 서열을 지키는 일에 자리를 걸다시피 했던 동장이었기에 동장 인사에도 영향력이 있을 수 있는 국회의원에게 이 빠진 식칼을 건넨 주최 측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경(?)스러운 광경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했으나, 아쉽게도 호흡정지나 정신적 쇼크로 쓰러지는 소동은 발생하지 않았다.      

  지역구청과 주민센터의 홍보용 사진 협조 요청을 받고 어떤 사진을 보낼까 고민했다. 이 빠진 커다란 식칼을 들고 있는 모습과 그 식칼로 케이크를 자르는 사진을 보내면 분명 식칼(?) 의원님의 정치적 활동에 도움이 되고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에 기사화될 것이다. "OOO 의원, 이 빠진 대형 식칼로 케이크를 자르다" 같은 머리기사에 해설 기사를 실어 주최 측의 준비 소홀과 무례함을 탓하지 않고 행사를 잘 이끌어 개관식이 원만하게 끝날 수 있도록 리드한 의원의 위기관리 능력과 인품이 어쩌고 저쩌고.. 그 서민적 행보에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크게 상승하여 몇 달 후의 당 대표 선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등의 미주알고주알 해설 기사가 실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 말미에는 이런 기사도 한 줄 있으리라. '해당 관리소장은 그 일 이후 보직 해임되어 대기 발령 중이나,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며 사의를 표명했다'. 어이쿠, 이 사진 보냈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다른 사진을 보냈다. 


  일하다 보면 이런 의도하지 않은 경우를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런 경우, 상대방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고 관대한 마음으로 대해 준다면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마천 司馬遷의 절영지회 絶纓之會라는 고사다. 왕이 전장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대하게 연회를 베푸는 중 갑자기 광풍이 불어 촛불이 꺼졌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서 왕이 총애하는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여인은 누군가 자신의 입술을 훔친 자가 있어 갓끈을 끊었으니 불을 켜 그자를 가려내 벌을 내려달라 청했다. 그러나 왕은 불을 밝히는 대신 "모두 갓끈을 끊어라"라고 말해 연회에 참석한 모두가 갓끈을 끊고 밤늦도록 연회를 즐겼다. 3년 후 왕이 참전한 전쟁터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장수가 선봉에 나서 죽기를 무릅쓰고 싸운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왕이 장수를 불러 공을 치하하며 물었다. 내가 특별히 잘해준 것도 없는데 어찌하여 그토록 목숨을 아끼지 않았냐고 묻자 장수는 3년 전의 연회 때 갓끈을 잘린 사람이라며 그때 술에 취해 죽을죄를 저질렀으나 왕께서 관대히 용서해 준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다음의 말을 의원께 전해 본다. ‘본의 아니게 이 빠진 식칼을 드린 점 송구했습니다. 우리 300세대 주민은 이 빠진 식칼로 케이크를 자르신 의원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음 대보름 척사대회 때 오시면 그때는 플라스틱 칼을 여분까지 잘 챙겨 놓겠습니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서 사용하셨던 이 빠진 식칼도 날이 시퍼렇게 잘 갈아 놓겠습니다. 의원님의 의정활동을 응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다리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