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난 악필이다.
열심히 받아 적고는 2-3일이 지나 다시 노트를 펴고 보면 중간중간 뭐라 썼는지 알 수가 없다.
심각한 건 중요한 별표를 했던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다.
무슨 암호 같기도 하고 상형문자 같기도 하다.
난 중학교 때부터 와이프를 만나기 전까지 일기를 썼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그리고 회사를 다니면서 거의 15년간 써둔 일기장이 꽤나 많다.
그런데 결혼을 하며 일기장을 고이 박스에 넣어 이사를 했는데 첫째가 한글을 뗀 후 6살쯤에 일기장을 들키고 말았다.
일기장엔 학창 시절과 나의 연애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와이프가 첫째와 함께 일기장을 모두 꺼내놓고는 남편의 출장기간 내내 완독을 했다고 한다.
“오빠, 나한테 할 말 없어?”
출장을 다녀와서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훅하고 공격이 들어왔다.
“뭔 소리지? 출장 선물? “
그랬다.
공항에서 와이프 얼굴 표정이 왠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물어보지 않았다.
옆에 있는 첫째가 거든다.
“아빠 큰 일이야. 빨리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해”
에잉?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딸내미도 아는 나의 잘못이 뭘까?
“어허. 무슨 소리야. 난 깨끗해요. 출장 다녀왔고 딴 일 하지 않았어. 뭔 잘못을 했다고 그래?”
“오빠, 연애 많이 했더라?”
아이고야. 이 눔의 마누라가 아이하고 내 일기장에 밑줄을 그어가며 탐독을 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 게 되었다.
“ 근데 오빠, 글씨가 왜 그래? 중간중간에 못 읽겠어. 아주 중요한 내용 같은데 뭐라 썼는지 모르겠다고”
태평하게 와이프는 내 글씨까지 나무라고 있다.
“읽다가 자꾸 흐름이 끊기잖아 글씨 좀 잘 써요”
나도 내 글씨를 못 알아보는데 와이프는 어땠을까.
지금은 기억조차 흐린 과거의 이야기들. 때론 의미 있게 지내왔지만 기억 못 하고 사라진 날들과 사람들.
마치 “악필”과 같이 들어서 썼지만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문장과 판독할 수 없는 문자들이 과거의 지난날 같다.
일기는 읽을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난 과거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이해 못 할 어리석은 부분으로 섞여 있다.
나의 지난 과거가 대단한 악필이 아니었기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라도 또박또박 알아볼 수 있도록 한 획과 다음획을 써야겠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첫째가 내 일기장 빈칸에 써 놓은 감상평처럼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 아하. 그러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