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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복 11시간전

설거지

쉽지만 요령이 필요


“남자 놈이 부엌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고등학교 2학년쯤에 아버지께서 호통을 치셨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를 보시며 핀잔을 하셨다.

어머니께서 저녁준비로 바빠하시는 것 같아 조금 도와드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얼굴이 달아오르고 창피를 느꼈었다.

그날 이후로 부엌일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외지에 살다 보니 부부는 서로를 지키고 도우며 협력해야 하는 동지가 되었다.

그리고 남성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인생의 깨달음이었는지 나는 생각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은 약자이며 (예외는 있습니다) 보호받아야 할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였다.

작은 집안일부터 하기로 했다.

간단한 요리부터 시작했다.

아침에 같이 먹을 과일 샐러드와 감자를 으깨어서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도록 건포도가 들어간 메쉬드 포테이토를 만들었다. 약간의 꿀을 첨가해 단맛을 내고 하와이안 모닝 빵을 구워서 아침을 준비했다.

와이프는 커피를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아침에 맡는 커피 향이 좋다며 내려주는 커피를 함께 즐긴다.

점심은 국수를 삶아 동치미 국수나 생마늘이 들어간 고추장 비빔국수를 했다.

저녁으로는 가끔 스테이크를 하거나 불고기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요리의 가짓수가 많이 늘었다.


요리 다음으로는 설거지를 했다.

처음엔 서툴러서 싱크대가 뒤죽박죽으로 되었었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서 쉽게 쉽게 하는 편이다.

예전 아버지께로부터 들었던 핀잔으로 인한 사고의 경직은 시대가 흐르며 조용히 사라졌다.


식사가 끝나면 그릇에 남아 있는 음식은 디스포절이 있는 싱크대에 버리며 물로 씻어 내고

기름이 묻어 있는 그릇이나 프라이팬은 종이 타월로 닦아 쓰레기 통에 기름과 함께 버린다.

세척기에 넣을 때는 작은 것들부터 그릇이 겹치지 않도록 배치하고

오목한 곳이 항상 아래로 향하게 한다.


난 그릇 세척기가 있기는 하지만 일일이 손으로 닦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각 그릇들을 두세 번씩 비누칠을 한다.

특히 컵 같은 경우엔 입술이 닿았던 컵 입구 주위를 주의한다.

기름을 사용했던 프라이팬은 물리적인 힘을 써서 바닥을 잘 닦아야 한다.

기름뿐만 아니라 음식이 붙어있거나 탄 음식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누칠이 끝나면 수세미를 물이 닿지 않게 옆에 두고

가장 먼저 사용했던 칼을 씻어낸다.

설음질을 할 동안 칼의 날카롭고 뾰족한 부분이 고무장갑을 구멍낼 수 있고

움직이는 손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칼을 우선적으로 닦아낸다.

다음으로는 큰 도마나 프라이 팬을 물로 씻어 낸다.

물로 씻어 낼 때에는 두세 번 손으로 비누 칠한 부분을 닦아낸다.

깨끗하게 닦아낸 도마와 프라이 팬을 세척기에 세워서 배치하고

중간 크기와 작은 크기로 씻어낸다.

마지막엔 수저와 포크 및 음식 할 때 사용한 도구를 씻어낸다.

이런 순서로 하면 세척기 안에 그릇들을 잘 배치할 수 있고 모두 잘 말릴 수도 있다.


중요한 한 가지는 고무장갑을 꼭 착용해야 하는 것이다.

초기에 고무장갑이 귀찮아 사용하지 않았는데 손등이 거칠어지고 건조해지는 현상이 있었다.

원인은 주방세제였다.

주방세제는 기름때를 닦아내도록 만들어져서 사람의 손에 있는 지방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도 이만하면 절반은 주부가 된 듯하다.

역지사지란 말이 있듯이 남편이 집안일을 하고 보니 와이프의 고단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집안일에서는 말이다.


“여보! 빨래해놨어?”


이번엔 빨래를 돌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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